354회
61. 공작님과 잠깐의 휴식 (6)
세르펜스는 아침 식사 후, 홀로 황궁으로 향했다. 잠깐 황제를 만나고 오겠단다.
그간의 일을 보고하고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나 어쨌다나.
'그리고 겸사겸사 칩거 얘기도 하고 오겠지.'
휴마누스를 걸고넘어지며, 그를 위한 거라 설명하면 황제도 알았다고 할 거다.
어쨌거나 세르펜스가 자리를 비운 고로, 나는 방에서 빈둥거렸다.
침대 위를 뒹굴다 문득 어제 압수한 자문회 요약 서류가 떠올랐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침대에 다시 몸을 던졌을 때.
- 똑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이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침대에 다시 눕자마자 몸을 일으켜야 했지만, 그게 뭐 대수랴. 오랜만에 나타난 예의 바른 누군가를 위해, 이 정도 귀찮음은 감수할 수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에 서서,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했다.
"누구세요?"
"에드나에요. 잠깐 괜찮으신가요?"
문 너머에서 흐릿하게 에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지 않을 것도 없어서 방문을 열자, 고동색 로브를 걸친 에드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 일이세요?"
들어오라는 말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침 식사 중 세르펜스가 황궁에 간 사이 방에서 쉬고 있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때는 조용히 있다가 예고도 없이 이렇게 찾아오다니.
없던 용건이 갑자기 생겨났거나, 몰래 와야 할 이유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제 방에 방범 마법을 설치하다가, 시온 씨가 떠올라서요. 아! 물론 공작저 내부는 안전하겠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에드나가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혹여 내가 공작가를 무시한 처사냐고 화를 낼까 봐, 그런 게 아닐까 한다.
"다른 분들은 걱정 없지만, 시온 씨는 조금··· 그렇잖아요."
이번에는 에드나의 변명이 따라붙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나를 무시한 처사냐고 화를 낼 타이밍인가?
하지만 내가 일루미나티 최약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인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 성현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방범 마법 잘못 건들면 큰일 나지 않아요? 전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서 생활할 자신은 없는데요."
"괜찮아요. 아주 간단하고 안전한 마법 하나만 설치할 거니까요."
"어떤 마법인데요?"
"밖에서 창문을 열면 경보음이 울리며, 침입자를 감전시키는 마법이요."
언제부터 감전 마법이 안전한 마법 축에 속하게 된 걸까?
어쩌면 일반인과 마법사가 생각하는 '안전함'이란 다른 뜻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이번 주말에 솔레르티아에게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냥 일반인이라서요. 가벼운 정전기 정도라면 모를까, 그 이상은 많이 위험합니다."
"아! 어디까지나 밖에서 창문을 열었을 때만 반응하는 마법이에요. 방안에서는 얼마든지 창문을 여닫아도 괜찮아요."
그녀의 말인즉. 이곳은 2층이고, 내가 밖에서 창문을 열게 될 일은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일반인과 마법사가 사용하는 단어 체계에 큰 차이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치만 그런 마법을 걸어 두면 누가 창문으로 방문할 때마다, 제가 직접 열어줘야 하잖아요. 그건 너무 번거롭지 않아요? 그렇다고 창문을 계속 열어둘 수도 없고···."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거죠?"
에드나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이해한다. 나도 한때는 창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에게 안 좋은 편견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창문으로 자주 드나들거든요."
"어째서요?"
"문보다 편하니까?"
"······."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에드나가 입을 다물었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그녀와 마주 보고 서 있기를 수 분. 슬슬 뻘쭘함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단 들어오실래요?"
"···네, 그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죠."
에드나의 대답이 어딘가 이상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생각에 깊이 빠진 탓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에게 어젯밤 세르펜스와 술을 마시던 탁자 쪽을 가리켰다.
"우선 저쪽에 앉으세요. 커피는 아직 준비를 못 했는데, 그냥 홍차라도 드릴까요?"
"괜찮아요. 오래 있을 건 아니라서요."
에드나는 어제 세르펜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내게도 빨리 앉으라는 듯 손짓했는데, 표정이 제법 진지하다. 나는 알 수 없는 패기에 눌려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창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말은 해 보셨나요?"
"했···었나?"
에드나의 질문에 나는 곰곰이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안 했나 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온 씨가 두 분과 친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개인 공간은 서로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저, 혹시 지금 혼나고 있는 건가요?"
"혼내다니요! 그럴 리가요. 그냥···."
에드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무래도 혼내는 게 맞았나 보다.
"그래도 유지스는 제가 위험에 처했다 싶을 때만 쳐들어오는 거라서···.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전 또 뭐라고···. 그런 이유라면 괜찮죠. 저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찾아온다는 줄 알았지 뭔가요?"
"그건 세르펜스가 그렇죠."
잠깐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던 에드나의 얼굴이 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마도 예의 바른 세르펜스의 대외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 테다.
나는 세르펜스의 보좌관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지켜야 할 임무가 있었다.
"이 모든 건 휴마누스 탓입니다. 휴마누스가 10년 전부터 공작저로 쳐들어오면서, 세르펜스에게 친구끼리는 그래도 된다고 주입했거든요. 잘못된 선행 학습의 폐해죠."
"저런···!"
에드나가 심히 안타깝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휴마누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으나, 없는 사실을 꾸며낸 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떳떳하다.
"제국의 황태자가 남의 집 창문을 드나들 줄이야···."
"그냥 정문을 통과해서 복도를 지나, 집무실까지 걸어서 왔는데요?"
"······."
"그래도 세르펜스는 제 허락을 받고 찾아오는 겁니다! 제가 세르펜스에게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말했거든요."
"그렇다고 창문으로 들어오나요? 보통은 문으로 찾아오지 않아요?"
지당하신 말씀이다.
세르펜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게 보통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게···, 몰래 오는 거라서요."
"어째서요?"
지당하신 의문이다.
공작저는 본관이고 별관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세르펜스의 집이다.
자신의 집안을 도둑놈처럼 몰래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니. 통념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상하게 여겨질 만도 하다.
"원래 제국의 공작쯤 되면 남들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거든요. 친구와 노는 것도 남들의 눈치를 봐야 하죠."
"그런···, 건가요?"
"그런 거죠. 친구가 친구 방에 놀러 가는 건 당연하지만, 공작이 보좌관 방에 놀러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부르면 될 텐데. 권위가 안 선다느니, 어떻다느니···. 여러 말 오갈 게 뻔하니까, 그냥 몰래 드나드는 겁니다."
그냥 놀러 가는 것도 이러한데. 매일 밤 친구 방에서 잔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공작저 사람들 입이야 단속하면 그만이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에드나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 많은 귀족이라고 마냥 좋은 건 아니네요."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뭐 그런 거죠."
내 말을 이해했는지 에드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돌연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마 씨는 에드나 씨 방에 불쑥불쑥 찾아온다거나, 그런 적 없어요?"
"창문으로는 안 들어오죠."
"아···."
창문으로 드나드는 건, 판타지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일인가 보다.
그런데 어째서 내 곁에는 두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허락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있었는데, 몇 번 그러지 말라고 얘기했더니 이젠 안 그래요. 항상 노크하고, 제 허락까지 받고 난 후에야 들어오죠. 정말 귀엽지 않아요?"
에드나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대체 어느 부분이 귀엽다는 건지, 나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마탑은 개인 방에 자물쇠도 없나 봐요? 문을 맘대로 열고 들어오는 걸 보면?"
"그럴 리가요! 당연히 마법으로 연 거죠."
"네?"
"그렇다고 마탑의 내부 보안이 허술하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아니마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가능한 일인 거죠."
에드나가 뿌듯하다는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이쯤에서 에드나가 했던 말을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허락을 받고 난 후 들어온다는 건, 과연 에드나가 문을 열어주었음을 뜻하는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분명 마법으로 따고 들어왔을 거다.
"제 방은 세르펜스의 집 일부에 속하기라도 하지···! 마탑은 아니마 씨 소유가 아니잖아요?"
"아니마의 조부님께서 마탑주잖아요."
"에이~. 그렇다고 마탑이 마탑주 개인 소유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마탑주는 마탑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이다.
마탑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지긴 하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건 불가하다.
에드나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마탑은 마탑의 마법사들 모두의 것이에요."
"그럼 다른 마법사들도 친한 사람의 방문을 막 따고 다녀요?"
"그, 그건 아니지만···. 그들은 실력이 부족해서···."
"에드나 씨는 실력이 되면, 친한 마법사의 방문은 얼마든지 열고 들어가도 된다는 주의입니까?"
"지금 이게 마법으로 문을 연다니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지, 친한 사람에게 보조키를 줬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듣고 보니 에드나의 말이 옳았다.
보조키를 줬는데, 노크하고 허락까지 받은 후에야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아니마는 에드나의 사생활을 존중할 줄 아는 아이였다.
의외의 면모에 살짝 감탄하며,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질문 있습니다."
"네, 하세요."
"아니마 씨가 악몽을 꿨다고 가정합시다."
"저런···."
그저 가정만 했을 뿐인데, 에드나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덕분에 어이가 없어서 잠깐 말이 끊겼다.
"아무튼. 그래서 방문을 멋대로 따고, 잠든 에드나 씨의 침대에 숨어들면···."
"귀엽겠네요."
"그때도 혼···낼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괜한 질문이었다. 아니마가 악몽을 꿨다고 가정한 시점에서, 에드나는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참 중증이다 싶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서운 꿈을 꿔서 침대로 파고든 아이를 어떻게 혼낼 수가 있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시온 씨, 참 매정하시네요!"
"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나도 똑같은 마음인데. 세르펜스를 혼내지 않았는데.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어 이렇게 혼나야 한다니!
괜히 물어봐서 손해 봤다.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탁자의 나뭇결을 세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이건 무슨 얼룩이죠? 붉은빛이 감도는 게 어째···."
나를 따라 탁자로 시선을 내린 에드나가 탁자에 스며든 와인 자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표정도 그렇고 꺼림칙하다는 목소리도 그렇고, 피로 착각한 듯하다.
"어제 세르펜스가 흘린 와인 자국이요."
"어제? 환영회 끝나고 또 마셨어요?"
"술자리를 1차에서 끝내긴 아쉽잖아요. 그래서 세르펜스와 방에서 2차로 또 마셨죠."
"과음은 건강에 안 좋아요."
세르펜스의 신성력으로 커버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면 또 혼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 참! 개인 공간이 어쩌고 하는 얘기, 세르펜스에겐 하지 말아주세요."
"네? 왜요?"
이유는 별거 없다. 세르펜스가 에드나의 저의를 의심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 방에 몰래 드나드는 것을 막아 놓고 나를 습격하려는 게 분명하다며, 과잉 해석하겠지.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이런 얘기를 에드나에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제가 자신의 방문을 꺼려서, 에드나 씨의 입을 빌려 말한 거라고 오해하면 어떡해요? 그럼 마음 여린 세르펜스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정말 상상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이지 않아요?"
"···네.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대답하며, 에드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입으로는 '네'라고 답하며 고개를 저리 흔들면, 나는 도대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