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56화 (356/925)

356회

62. 공작님과 룩스메아 교단 (2)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에일리히였다.

"바뀐 머리 모양도 잘 어울리는구나."

분명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것일 텐데. 에일리히는 세르펜스의 왼쪽 어깨 위에 떡하니 걸쳐진 땋은 머리칼을 발견하고는, 대뜸 칭찬부터 꺼냈다.

배냇머리를 묶은 어린 조카의 모습을 처음 본 삼촌의 반응이다.

원래 세르펜스는 머리카락를 묶고 다니지만, 뒤에서 하나로 묶은 것과 땋아서 어깨에 걸친 건 느낌이 많이 다르다.

뿌듯한 마음에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저 작품의 나의 작품임을 알렸다.

"제가 묶었어요!"

"그···, 시온 님께서는···. 손재주가 뛰어나시군요."

에일리히가 떨떠름하다는 말투로 날 칭찬했다.

얼굴은 무언가 따지고 싶다는 표정인데, 내가 신의 사자라서 참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에일리히 님께서는 신앙심이 뛰어나시네요."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에일리히를 시험에 들게 한 것 같다.

그래도 보상이 조카의 새로운 헤어 스타일이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백부님께서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화제의 주인공인 세르펜스가 목소리를 내었다.

질문은 에일리히에게 하고 있었으나, 눈으로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을 걸 그랬다.

"어제 시온 님께서 부탁하셨던 일 때문에 왔단다."

드디어 에일리히가 방문한 용건을 꺼냈다. 내가 부탁한 일이라면 마력 구속구에 관한 거다.

슬쩍 시계를 보니 짧은 시곗바늘이 2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젯밤이나 오늘 오전에 알타르 이단 심문관을 만났다면, 진작 찾아왔을 테고···.'

점심때 에일리히를 식사실에서 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가 1시쯤이었다.

고작 한 시간 만에 알타르와 접선하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금방 만나고 오셨네요?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어젯밤에 잠깐 나가서, 근처로 와 달라는 표식을 남기고 왔습니다."

"그럼 알타르 님은 여기까지 오셨다가, 구속구만 주고 그냥 가신 겁니까?"

"구속구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방금 전한 터라, 일단 세 개만 받아 왔습니다."

에일리히가 품에서 마력 구속구 세 개를 꺼내어 내 책상 위에 올렸다.

알타르에게 예지 능력이 있어서 미리 준비해 온 건 아닐 테니. 교단이 알타르에게 지급한 구속구를 뺏어 왔다는 뜻이다.

'어차피 새로 지급받을 테니, 상관없나?'

내가 마력 구속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악숭이를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속구를 세르펜스에게 넘기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청천벽력같은 에일리히의 말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교황 성하께서 시온 님과 세르펜스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알타르 님이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절 만나고 싶어 하신다니···.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가요?"

"가능하다면 내일 당장 만나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언제 한번 밥이나 같이 먹자.' 같은 입발림 소리일까 기대해 봤지만, 진짜로 만나자는 얘기였다.

내가 신의 사자라니까,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서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내일 당장이라니. 너무 급하다.

"갑자기 왜요?"

"저도 알타르 님께 물어보긴 했는데, 확실한 사항이 아니라 섣불리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냥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용건이 있나 보다. 그것도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용건이 말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괜히 마음이 켕겼다.

물론 나는 도둑이 아니며, 악숭이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룩스메아 욕을 조금, 꽤, 많이···한 터라. 그게 조금 걸렸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구속구를 넘기며, 슬쩍 눈을 마주쳤다. 세르펜스가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수락해도 좋다는 뜻이다.

'그래. 내가 룩스메아를 욕한 걸, 교황이 어떻게 알겠어?'

어쩌면 작금의 사태에 대해, 신의 사자에게 자문을 얻고자 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거대로 걱정이지만. 나만 보자는 게 아니라, 세르펜스도 함께 보자고 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한동안은 대외 스케줄도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만나는 건데요?"

나는 망설임을 약속 시각에 관한 고민으로 포장하며 질문했다.

다행히도 에일리히는 별다른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장소는 저택 후문에 나와 계시면, 알타르 님께서 안내해 주실 겁니다. 시간은 아무 때고 괜찮으니, 시온 님께서 정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알타르는 구속구만 주고 돌아간 거냐고 물었을 때, 그에 관한 얘기가 없길래 혹시나 했더니.

약속 시각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아직 저택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나 보다.

이단 심문관이 이런 거 하라고 있는 직업이 아닐 텐데.

"몰래 만나는 거니까, 저녁 여덟 시쯤···. 괜찮죠, 세르펜스?"

너무 내 맘대로 정했나 싶어서 세르펜스에게 질문하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구속구는 세 개면 충분하십니까?"

"많으면 좋죠! 우리 일행이 다섯이니까, 한 사람당 두 개씩. 열 개만 더 주세요."

"이미 드린 세 개는 안 세는 겁니까?"

"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일리히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세르펜스의 땋은 머리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역시 내 눈썰미는 정확해! 세르펜스라면 이 헤어 스타일이 잘 어울릴 줄 알았죠."

"헛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해라."

"지금 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머리카락, 잘라 버릴까?"

세르펜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큰일 날 소리다.

"진짜 급한 일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질을 그만 놔주세요."

"인질은 사람을 뜻하는···. 아니, 이건 됐다. 급한 일이라는 게 뭔지, 그것부터 밝혀라."

내 말을 정정하려던 세르펜스는 방향을 틀었다.

녀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레터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적극적으로 위협했다.

"교황을 만나야 하잖아요. 그 전에 룩스메아에 관해서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저 룩스메아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그래. 어느 정도 상식은 갖춰 두는 게 좋겠군."

세르펜스가 인질을 놓아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용만 놓고 보면 내게 상식 좀 갖추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왠지 모르게 내가 아닌 세르펜스 본인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책을 골라주면 혼자 읽고 공부하겠다는 기특한 소리는 아닐 테고."

"네! 세르펜스가 요점 정리만 해주세요."

"일단 일부터 해라."

세르펜스가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3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리 속성 과외라도 범위가 넓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간식 시간이 끝난 후에 하겠다는 뜻이다.

서류를 몇 장 살펴보고 났더니 금방 3시가 되었다.

오늘의 간식이 뭘까 궁금한 마음에, 냉큼 응접실로 가서 앉아 있었을 세르펜스가 오늘따라 꾸물거렸다.

당연하게도 머리 모양 때문이다. 공작저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얼마나 호들갑 떠는지 잘 알아서, 쑥스러워하는 거다.

결국 세르펜스는 시녀들이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나간 뒤에야, 응접실로 들어갔다. 얼굴은 빼어난데 팬 서비스 정신이 많이 부족하다.

"앗! 세르펜스, 그 머리 모양도 잘 어울려요! 시온이 해 줬나요?"

세르펜스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도착해있던 유지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 * *

오늘의 간식, 바움쿠헨을 먹고 난 뒤. 유지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떠났다.

들어올 때는 긴 청록색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던 것과 달리. 나가는 그녀의 머리칼은 곱게 땋여,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당연히 내 작품이다.

'고양이 조각상을 만든 실력을 생각하면, 나보다 손재주가 훨씬 뛰어날 텐데···.'

땋은 머리를 하고 싶었으면 평소에 알아서 땋고 다녔을 거다. 그냥 세르펜스와 맞춤 머리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뭐지?"

집무실로 돌아온 세르펜스가 방음 스크롤을 찢으며 내게 물었다.

"룩스메아에 관해 전반적으로 다?"

"내가 질문을 잘못했군. 알고 있는 게 뭐지?"

"성검이 룩스메아의 영혼 조각이라는 것과, 룩스메아가 대륙의 유일신이라는 것. 그리고 룩스메아가 사람들의 바람에서 태어났다는 것 정도?"

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답하자, 세르펜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 정도로 아는 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마지막 하나는 얼마 전 신전에 들렀을 때 주워들은 거지만,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척해야겠다.

"정말 처음부터 설명해야겠군."

"그래서 '전반적으로 다'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우선···, 신성 루멘 제국의 수도 이름을 아는가?"

"어···?"

룩스메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할 것처럼 굴더니, 세르펜스가 기습 퀴즈를 냈다.

수도 이름이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루멘 제국은 신성 국가를 표방하는 만큼 분명 관련이 있을 거다.

문제는 내가 수도의 이름을 모른다는 거다.

"자, 잠깐만요. 생각해보겠습니다. 분명 시온의 기억 속을 잘 뒤져보면 나올 겁니다!"

"쯧, 그럴 리가."

내게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세르펜스가 딱 잘라 답했다. 심지어 혀까지 찼다.

아무리 리벨론 백작가가 수도 진출도 못 한, 변변찮은 가문이라 해도 엄연한 귀족 가문이다.

자국의 수도 이름도 모르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시온은 수도까지 올라와서 구직 활동을 했다.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가 아까 뭐라고 했지?'

제국의 수도 이름이 뭐냐고 묻지 않고,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저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설마, 없어요?"

머저리 취급당할 각오를 하고 반신반의하며 물었는데, 놀랍게도 세르펜스의 고개는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말로 제국의 수도에는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선우는 자신이 관심 없는 문제에 지나치게 무심하다."

"관심 가는 것에만 신경 쓰고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요. 선택과 집중, 기회비용, 뭐 그런 겁니다."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는 것치고,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휴식과 취미 생활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중요 수단입니다!"

"음···."

예전이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톡 쏘아붙였을 텐데.

세르펜스는 침음만 흘릴 뿐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지금 남의 배움에 기특해할 때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설명해주세요!"

제국 수도에 이름이 없다는 키워드를 얻었으니 조금만 고민하면 그 이유도 떠오를 테다.

하지만 기왕 세르펜스에게 배우기로 한 거, 그냥 녀석에게 듣기로 했다.

"그럼 또 묻지. 프뤼네 왕국에서 신전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신상(神像)을 본 적 있는가?"

"아니요."

그냥 조각상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고 신성한 존재를 조각으로 빚는 걸 금지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게, 크레아토가 세르펜스를 보며 천사상을 운운한 적이 있었다.

"수도에 이름이 없는 까닭은 신 룩스메아에게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신 룩스메아에게 이 땅을 바친다는 의미도 있으나. 실상은 신께서 이 땅을 자신의 몸과 같이 아끼며, 지켜 주길 바라는 기원이 더 크다."

형체가 있되 이름이 없는 땅과 이름이 있되 형체가 없는 신이라.

역시 강의를 세르펜스에게 맡기길 잘했다. 시작부터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에 나는 짝짝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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