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59화 (359/925)

359회

62. 공작님과 룩스메아 교단 (5)

"신의 사자께서는 참으로 자애롭고 인자하시군요. 에일리히 님과 알타르 님이 말한 그대로라, 이 노부는 진심으로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교황의 광신도적인 면모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에일리히와 알타르 앞에서 자애로움을 뽐낸 적이 있던가?

과거를 되돌아보아도 그런 적은 없었다. 심지어 에일리히 앞에서는 마새개새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룩스메아 교단에서 제시하는 인자함의 척도가 '마왕을 얼마나 맛깔나게 까는가.'라면 할 말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딴 걸 기준으로 인자함을 논한다면, 성직자들은 전부 욕쟁이게?'

나는 머릿속으로 욕 배틀을 뜨는 에일리히와 리에나를 상상해 보았다.

끔찍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후회막심하고, 둘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샘솟았다.

"두 분께서 저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로움에 사무쳐 상처 입은 영혼을 어찌 달래고 어루만지셨는지. 편협한 사고에 갇힌 자를 타일러 어떤 깨달음을 내리셨는지. 전부 들었습니다."

상처 입은 영혼은 세르펜스를 뜻하고, 편협한 사고에 갇힌 자는 한스를 말하는 듯하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교황이 어째서 나를 자애롭고 인자하다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에일리히와 알타르가 전한 보고를 제 입맛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인 거다.

어쩌면 내가 악마 숭배자를 악숭이라 줄여 부르는 것에도, 멋대로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지칭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악숭이를 향한 두려움을 물리치려는 거라고 말이다.

"프라시더스 님에게도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둔한 탓에 신의 뜻을 어림짐작하여, 긴 시간 무거운 짐을 떠맡게 했습니다."

나에게 고정되었던 교황의 시선에 드디어 세르펜스가 담겼다. 정중한 사과의 말이었으나, 인사말을 건너뛴 순간 정중함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하긴 건물에 들어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인사를 건네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긴 하다.

교황에게 신의 사자란 대체 뭘까? 원래 신의 사자가 교황보다 높은 걸까? 아니면 이 교황이 룩스메아 처돌이라 이러는 걸까?

나는 도통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만 늘어났다.

자고로 미친놈은 이해하려 들면, 괜히 피곤해지기만 할 뿐이라 하였다.

광신도의 광은 빛 광(光)자가 아닌 미칠 광(狂)이다. 이해하려 들지 말자.

"아닙니다. 저는 그저 훗날 성검의 주인이 될 자를 대신하여, 짐을 맡아 두었을 뿐입니다. 이런 영광된 일을 하고도 어찌 제가 사과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교황의 사과에 세르펜스가 고결한 미소를 꾸며내며 대답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참 잘도 한다.

세르펜스가 빈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신성한 겉모습에 속아 넘어간 교황이 녀석에게 경탄의 시선을 보냈다.

"프라시더스 님의 신앙심은 여전하시군요. 그렇기에 룩스메아 님께서도 프라시더스 님에게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중한 임무를 내리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황이 말한 중한 임무란, '신의 사자를 모시는 일'을 뜻하는 걸 테다.

하지만 실제로 금이야 옥이야 모셔지는 건 세르펜스였다.

결과만 놓고 따지자면, 교황은 '신의 사자에게 둥개둥개 받는 것'을 '성검의 주인이 되어 대륙을 지키는 것'보다 우위에 둔 셈이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신성 모독이 아닐까?'

룩스메아 교단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이 이따위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세상 참 잘도 돌아간다.

아직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신의 사자를 모셔두고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괜찮습니다."

"과연, 신의 사자께서는 이해심도 넓으십니다!"

너무 과하게 치켜세우니, 비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래서 과한 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가 보다.

"그보다 그···, 신의 사자 소리는 이제 좀···."

"좀···?"

"···제겐 너무 과분한 명칭이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물며 교황 성하께서 저를 이리도 공손하게 대해주시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한순간, 교황의 눈매가 날카로워진 건 내 착각이 아니리라.

나는 '그놈의 신의 사자 소리는 이제 그만 해라.'라는 말을 겸손으로 포장했고, 그제야 교황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는 내가 과한 예의를 차리면, 웃음보가 터지는 특이한 녀석이 하나 있었다.

흘깃 옆을 쳐다보자, 세르펜스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박장대소하진 않더라도, 살짝은 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웃긴 개그라도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법인가 보다.

기출 변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호칭이 편하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시온 님께서도 저를 편히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신의 사자께 성하라 불리니, 저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원래 신의 사자가 교황보다 높은 겁니까?"

어지간하면 묻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다행히도 교황은 나를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뒤가 켕긴다는 표정을 지은 탓에, 내가 교황을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게 되었다.

"그건···. 크흠, 일단 자리에 앉으십시오."

교황이 괜한 헛기침을 하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서 있는 것보다 앉는 것을. 앉은 것보다 눕는 것을 선호하므로, 거절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집주인이 귀족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잘 사는 편인지, 소파가 제법 푹신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와 세르펜스, 교황. 이렇게 세 사람뿐이다.

알타르와 이름 모를 두 명의 성직자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는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선 시온 님께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교황이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열심히 내 얼굴에 금칠하더니, 이제는 고해성사라도 하려나 보다.

"제가 불민한 탓에 시온 님께서 신의 사자임을 바로 깨우치지 못하여, 조사를 조금···. 크흠! 했습니다."

어쩐지 순순히 믿어준다 했더니, 뒷조사를 한 모양이다. 예상했던 바다.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콜라보하여 만들어 낸. '시온은 악숭이에게 납치를 당한 적이 있다.'라는 설정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열심히 조사해 봤자 나오는 건 없을 거다.

'수도로 올라온 후, 시온은 완전 아싸 생활을 했으니까. 면접날 말고는 목격자도 없겠지.'

특히나 보좌관 면접은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덕분에 백수 기간이 더욱 길어졌고, 안 그래도 소심했던 시온은 더욱 소심해졌다.

이 몸에 내재된 시온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프라시더스 가문에 합격하기 직전에 이르러서는 은둔형 외톨이가 따로 없었다.

집에만 처박혀 있었는지, 납치당했다가 돌아왔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성격 변화야 뭐···. 번듯한 직장을 잡고 자존감을 되찾았다고 우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내가 속 편한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교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교황인 제가 시온 님께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는지, 의아해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온 님께서는 보통의 신의 사자와는 다르시잖습니까?"

이미 신의 사자인 시점에서 '보통'과 한참 멀어진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딴지를 거는 대신, 교황이 뭐라고 말하는지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다르다니, 어떤 점이 말입니까?"

"시온 님께서는 알고 계신 바에 비해, 발언의 제약이 적습니다."

"아···."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겠다.

세르펜스의 족집게 과외에서 나왔던 '신의 사자' 파트에 관한 거다. '그런 부류'에 대한 얘기이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에 관해 설명하기 곤란할 때마다 써먹어 온 '그런 부류'라는 터무니없는 변명이 통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로 그런 부류라는 게 있으니까.'

신의 사자는 '행하는 자'와 '전달하는 자'.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명을 내려받고 그것을 행함으로써, 신의 뜻을 구현한다.

'어찌 보면 성검의 주인도 이쪽 부류인가?'

그리고 두 번째 부류가 바로, 문제의 '그런 부류'다. 그들은 신에게 전달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구원한다.

정보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첫 번째 부류와 달리,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들도 신의 사자이니만큼 사명은 있다.

다만, 사명이 많다. 대표로 내세울 수 있는 사명이 있긴 하나,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면 끝이 없다.

첫 번째 부류와 달리, 종종 추가 지시를 받는 일도 있다. 상황에 따라, 처음부터 일감을 잔뜩 떠맡기도 한다.

'나 자신을 예로 들면···. 세르펜스를 키우면서, 곁다리로 악숭이들 계획을 막는 거려나?'

아무튼. 문제는 두 번째 부류는 아는 게 많은 만큼, 말할 수 없는 것도 많다는 게 특징 아닌 특징이다.

그 때문에 지식을 에둘러 전했고, 사건이 터진 후 억지로 끼워 맞춰야 겨우 들어맞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 비효율적인 방식에, 룩스메아의 뜻을 이해하고자 많은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신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길 바라신다. 사람들이 가진 가능성을 믿기에, 헤매지 않도록 방향만을 제시해 주시는 거다.'

이와 같은 얘기가 정설로 굳어졌다고 한다.

살짝 정신 승리 같은 면이 없잖아 있지만, 어차피 룩스메아가 해답을 내리는 것도 아니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나쁠 건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동안 무능메아의 가능성을 주장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단 말이야?'

이게 바로 유일신 시스템의 단점인가 보다.

어쨌거나 [성검의 주인]을 '신에게 전달받은 지식'으로 퉁친다면, 나는 '그런 부류'가 맞다.

나는 그냥 룩스메아의 이름을 팔아먹는다는 생각으로 신의 사자를 자칭했는데, 정말로 신의 사자였던 거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제약 같은 건 아예 없는데···?'

그딴 게 있었으면 세르펜스에게 소설이 어쩌고 하는 얘긴 꺼내지도 못했다.

그나마 이제까지 그런 부류라는 변명을 해 왔기에 망정이지, 진짜 되는 대로 떠벌렸으면 새로운 부류로 분류될 뻔했다.

"···그렇기에, 저는 시온 님이 실은 룩스메아 님께서 직접 대륙에 내려보내신 천사의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잠깐 복습 시간을 가진 사이, 나는 천사가 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툭툭 쳤다. 세르펜스는 내가 딴생각을 하느라 대화를 놓쳤음을 알아채고, 교황의 말을 짧게 요약 정리해 주었다.

"갑자기 등장한 일루미나티의 행적과 시온의 행적이 일치한다는 점, 비슷한 시기에 시온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이전에 백부님께서 잡아들인 악마 숭배자를 심문하여 들은 얘기 등을 취합하여 내린 결론이라고 합니다."

"잠깐만요, 그 일들은 옛날 옛적에 잘 둘러댄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아!!"

나는 뒤늦게 입을 막았고, 세르펜스는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