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
아침 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창밖이 어두워졌다가 도로 밝아졌다.
대륙 어딘가에서 악마가 소환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폴드 공국 쪽에서 소환된 걸 테다.
휴마누스가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만, 기분이 뒤숭숭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주말 아침부터 재수 없게···."
나는 괜스레 투덜거리며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불평을 내뱉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지만, 악숭이 욕이라도 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다.
"어딜 나가려는 거지?"
세르펜스가 기척도 없이 창문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경비가 치밀해져서, 낮에는 창문으로 드나들기 힘들어졌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무래도 본관에만 적용되는 사항이었나 보다.
에일리히도 세르펜스가 내 방에서 자는 걸 알고 있으니, 별관 쪽 경비는 내버려 둔 거겠지.
"수도를 오래 비웠잖아요. 근처 디저트 가게 순회하면서 신상 체크하고, 예약도 좀 해두려고요."
"음···."
"같이 갈래요?"
내 말에 세르펜스가 반색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후드 달린 로브를 주섬주섬 꺼내 걸쳤다. 지금이 5월 중순인데 덥지도 않은가 보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옷걸이에 걸쳐둔 페도라를 쓴 후 거울을 살폈다.
변장할 필요는 없어도 시늉은 내야 할 것 같아서 써 봤는데, 오늘의 코디와 썩 어울렸다.
'이 자리에 세르펜스만 없었다면, 온갖 포즈를 잡으며 패셔니스타 놀이를 했을 텐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라, 그만두기로 했다.
허리에 세니어를 차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나는 세르펜스를 돌아보았다.
"도중에 솔레르티아 씨 가게도 들를 건데, 괜찮죠?"
"갑자기 그곳에는 왜 가려는 거지?"
당연히 상관없다고 답할 줄 알고 가볍게 물었는데, 돌아온 건 마뜩잖다는 반응이다.
둘이 친하지도 않고 교류도 없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감을 드러낼 만한 관계는 절대 아니다.
그냥 업무상 알고 지내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텐데.
"왜요? 솔레르티아 씨가 이중장부라도 만들었어요?"
"···그자와 나름 친한 사이 아니었나?"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닌가 보다.
"세르펜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내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죠."
"나도 그냥 물어본 거였다."
"퍽이나 그러하겠네."
"그래서 이유는?"
내 빈정거리는 말에도 세르펜스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했다.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어딘지 모르게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어, 꺼림칙하기까지 했다.
"외국에 다녀왔으니, 기념품을 돌리는 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리고 솔레르티아씨도 제가 수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코빼기도 안 비치면 당연히 서운해하겠죠."
"그건 선우, 당신 혼자만의 착각 아닌가?"
내가 무슨 휴마누스도 아니고, 그런 착각을 할까?
다른 얘기는 몰라도 이 말은 결코 농담으로 넘어갈 수 없다.
나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세르펜스를 노려봤다. 세르펜스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시비 거는 겁니까?"
"그,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이른 시각에 찾아가면 폐가 되지 않을까 해서···."
"어차피 가게 열고 장사 중일 텐데. 잠깐 얼굴 보고 선물만 주는 게, 무슨 폐씩이나 된다고···."
"그런 안이한 생각이 관계를 망치는 주범이다."
자기가 언제부터 나와 솔레르티아 사이를 걱정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통 모르겠다.
세르펜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다고 자부했건만. 오늘따라 녀석이 왜 이러나 싶다.
평소에 내 인간관계에 사사건건 관여를 했다면 모를까, 갑자기 이러니 의아함만 커질 뿐이다.
"제가 솔레르티아 씨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그럴 리가."
"그럼 왜 그러는데요?"
"으음···. 아니다, 오늘은 아예 나가지 않는 편이 좋겠군."
세르펜스가 갑자기 외출 불가 선언을 내뱉었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방금 걸쳤던 로브를 도로 벗었다. 그리고는 로브를 곱게 개서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가만히 두고 봤더니, 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 들어 옷걸이에 걸어 놓기까지 했다.
자기만 나가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나도 나가지 말라는 뜻이다.
"얼씨구, 얘가 점점?"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나는 세르펜스를 이런 고집불통으로 키우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렇게 생떼를 부리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입니까?"
"조금 전에 하늘이 어두워졌던 걸, 선우도 보았지 않은가? 오늘은 위험하니 외출을 삼가는 게 좋을 듯하다."
"방금까지 좋다고 외투까지 꺼내 입었던 주제에?"
"···생각이 바뀌었다."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하다못해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했으면, 귀 기울여 듣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나는 옷걸이에 걸린 모자를 다시 내 머리에 얹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모자를 뺏어 또다시 옷걸이에 걸었다.
"굳이 디저트를 밖에서 살 필요가 있는가? 주방 시녀들에게 부탁하면 되잖은가."
"어떻게 사람이 집밥만 먹고 살아요? 가끔 밖에 나가서 외식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그래야지."
그렇게 답하며 모자로 손을 뻗는데, 무언가 눈앞을 휙 하고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자가 사라졌고, 나는 공연히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
옆을 바라보니 세르펜스가 부자연스럽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구태여 뒤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세르펜스가 모자를 감춘 거다.
"아, 됐어요! 그깟 모자, 안 쓰면 그만입니다."
내가 신경질을 내며 홱 돌아 문 쪽으로 향하자, 세르펜스가 허겁지겁 로브를 다시 꺼내 입었다.
나를 힘으로 제압하자니 엄두가 안 나고. 그렇다고 혼자 보내기에는 걱정스러워, 결국 따라오려나 보다.
방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는데 머리 위로 툭, 모자가 얹혔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모자를 고쳐 썼다.
아직 후드를 쓰지 않은 세르펜스의 옆얼굴도 유리창에 함께 비쳤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콧대 아래로, 아랫입술이 생뚱맞게 튀어나와 있었다. 완전히 토라졌나 보다.
'얘가 이유 없이 이럴 녀석은 아닌데···.'
울컥하는 마음에 방을 나서긴 했으나, 솔레르티아의 가게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세르펜스가 가지 말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다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 조금 화가 났을 뿐이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그의 모습을 힘껏 노려봐준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주말인데도 번화가에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러게 내가 나오지 말자고 하였잖은가."
"사람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악마 때문이지만, 세르펜스가 나오지 말자고 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거. 다 알거든요?"
"······."
세르펜스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반항기라도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내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는 모습이 무척 조심스럽다.
우선 뭐라도 사 먹여서, 녀석의 기분이 좋아지면 다시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문 닫은 가게는 별로 없어서 참 다행이네요. 그렇죠?"
이미 만들어 둔 걸 버릴 수도 없으니, 가게를 그냥 열어 둔 게 아닐까 한다. 악마가 수도에 나타났으면 벌써 난리가 났을 텐데, 잠잠한 것도 한몫했을 거다.
오후쯤 되면 사람들도 안전하다는 걸 깨닫고, 하나둘 거리로 나오겠지.
나는 삐져서 대답 없는 세르펜스를 데리고 내 단골 제과점, <달콤한 나날>로 향했다.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덮을 만큼 선명한 방울 소리가 뒤따랐다.
"아저씨, 저 왔어요!"
"오, 리벨론 자작님 아니십니까?!"
카운터에 앉아 무언가 끄적거리던 주인아저씨가 황급히 종이를 덮으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반겨주었다.
보란 듯이 활짝 펼쳐 놓은 종이에는 다양한 모양으로 크림을 올린, 아기자기한 컵케이크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신작 구상 중이셨나 봐요?"
"네. 다양한 꽃 모양으로 크림을 올려서, 세트로 팔까 하는데···. 자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맛은요?"
"당연히 맛도 다양하게 해야죠."
"이야~! 골라 먹는 재미를 아시네요! 언제부터 판매하실 예정입니까?"
주인아저씨와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세르펜스는 다소곳하게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관심 없는 척 굴고 있지만, 집중해서 듣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이 썩을 놈의 악마 숭배자들 때문에 참 걱정입니다."
내가 구매한 쿠키들을 포장하며, 주인아저씨가 한탄을 내뱉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어련히 잘 물리쳐 주시겠죠. 제가 얼마 전에 그분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는데, 와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볼타 산맥에 갔다가 돌아왔잖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검을 한 번 휘두르니까, 금빛 신성력이 번쩍하더니! 마물들 목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괜히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을 받은 게 아니구나, 싶더라니까요?"
"오···!"
"어디 황태자 전하뿐이겠습니까? 다른 일행들도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실제로 휴마누스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건 이 아저씨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냥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실전 경험도 착실히 쌓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내 얘기처럼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프라시더스 공작님께서는 요즘 어떠십니까?"
주인아저씨가 세르펜스의 근황을 물었다.
세르펜스의 최신 행적은, '<달콤한 나날>에 들러, 골라 먹는 컵케이크에 관한 얘기를 듣고 군침을 삼키는 중'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공작님이야 잘 계시죠. 항상 반짝반짝합니다."
내가 공작저 시녀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맞아요! 우리 공작님은 제가 한 시간 넘게 공들여 닦은 유리창보다도 투명하고 반짝반짝해요!'라는 답변이 돌아오곤 했는데.
제과점 아저씨는 반짝반짝함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
떨떠름한 웃음과 '네에···. 그러시군요.'라는 흐리멍덩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세르펜스를 달짝지근하다 표현할 수도 없고···.'
여기서 살 건 다 샀으니, 다른 가게나 들러봐야겠다.
나는 포장된 쿠키를 받아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또 오라는 주인아저씨의 인사말이 들렸다.
"지금 좀 먹을래요?"
거리에 나와 포장된 쿠키 박스를 가리키며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당장 먹고 싶은 게 분명할진대,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라도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걱정하는 거다.
'어쩔 수 없나···. 적당히 가게 몇 군데 들려서 살 거 사고, 바로 돌아가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세르펜스가 나를 붙잡았다.
"왜요?"
"저쪽을 봐라."
세르펜스가 내 팔을 놓아주며 어딘가를 턱짓했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제국의 수도답게 깔끔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꾀죄죄한 행색의 걸인이 눈에 띄었다.
분명 처음 본 사람일 텐데. 떡진 군청색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데자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