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2)
머리색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으나 그뿐이었다. 흔한 색은 아니지만, 아주 드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 가다가 비슷한 색을 몇 번 봤거나, 검은색에 가까워서 괜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나는 묘한 기시감인지, 감상(感傷)인지 모를 것을 대충 떨쳐냈다.
그보다 세르펜스가 어떤 의도로 저 사람을 가리켰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낯선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는 녀석이 나를 멈춰 세우면서까지 관심을 보였다.
'설마 악숭이인가?'
그런 것치고는 세르펜스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걸인 또한 우리 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애초에 저자가 악숭이었다면, 세르펜스는 잡았던 내 팔을 놓아주지 않았을 거다.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겠지.
나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틀었다.
'세르펜스가 아닌 대외펜스라면 어땠을까?'
대외펜스는 타인을 가엾이 여길 줄 알았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보좌관인 내가 거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 대외펜스의 이미지에 타격이 생길 거다. 그러니 가서 도우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길에서 마주친 거지를 도와주는 건, 인물의 선량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흔한 클리셰니까.
'그걸 계획적으로 한다는 점이 위선적이긴 해도, 뭐···.'
선행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발견하지 못한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먼저 나서서 돕자고 하는 그 마음이 어여쁘다.
저택에 돌아가는 대로, 세르펜스를 마구 쓰다듬어 줘야겠다. 사탕도 줘야지.
나는 걸인이 서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딘 후, 세르펜스를 돌아봤다.
후드를 눌러쓴 탓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세르펜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가까이 가도 괜찮다는 뜻이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세르펜스가 옆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걸인은 유리창 너머의 빵 진열대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는데, 다행히 빵집 주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유리창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걸인이 흠칫 놀라 뒤돌아섰다.
"저기···."
"넌 그때 그 양아치!"
말을 붙이려고 막 입을 여는데, 돌연 걸인이 나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세르펜스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나는 하늘에 맹세코 양아치 짓을 한 적이 없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걸인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흘렀고, 제대로 못 먹은 탓인지 볼이 움푹 꺼져 광대가 도드라졌다.
머리색을 봤을 때 느껴졌던 익숙함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모르는 사람이라는 확신만 굳어졌다.
이 사람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거나. 내가 빙의되기 전, 시온이 양아치 짓을 했거나.
분명 둘 중 하나일 텐데, 양아치 짓을 하기에 시온은 너무 소심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거, 말을 되게 섭섭하게 하시네. 초면인 사람을 무작정 양아치 취급을 하다니. 그렇게 살면 돼요, 안 돼요?"
"시온 경, 말투가 너무 불량스럽습니다."
다짜고짜 양아치 소리를 들은 게 불만스러워, 조금 서운하다는 티를 냈을 뿐이건만. 느닷없이 세르펜스가 내 말투를 지적했다.
세르펜스만은 항상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믿었는데. 내 편이 남의 편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다.
"아, 미안합니다. 그때 봤던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양아치라고 삿대질하며 반말을 내뱉을 땐 언제고. 걸인이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사과까지 했다.
오해가 풀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때 봤던? 설마 초면이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번 걸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도무지 모르겠다.
혹시 세르펜스라면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녀석을 쳐다봤다.
"테라룸 왕국에서 시온 경이 제 후드를 벗기려 했을 때, 나타났던 자입니다."
"네에?!"
답변이 돌아온 것까지는 좋으나, 믿을 수 없는 얘기에 경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났던 자는 바스툴 왕국의 2왕자, 베일 바스툴이었다. 일국의 왕자가 머나먼 타국에서 거지꼴로 나타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기에 군청색 머리칼을 보고도, 베일을 떠올리지 못했던 거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되셨어요?"
"아는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오는 길에 짐을 잃어버려서···. 이렇게 됐습니다."
내가 기겁하며 질문을 던지자, 베일이 아무것도 없는 애먼 방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가 지금은 이런 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꽤··· 잘 사는 사람입니다. 그때 제 옷차림을 보셨으니,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 예. 그러시겠죠."
베일이 테라룸 왕국에서 입었던 옷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맞장구를 쳤다.
왕실에 돈이 없으면 어찌 나라가 돌아가겠는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 그래서 그런데···. 크흠! 혹시 돈을 좀···,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예?"
"곧 갚겠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근처에 살아서···. 바로 갚을 수 있습니다. 네, 정말로···."
베일이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갑자기 자신이 잘산다는 얘기를 왜 하나 했더니. 돈 빌려달라는 말을 하려고 밑밥을 깐 거였나 보다.
"방금 '경'이라 불리신 걸 보면 귀족이신 것 같은데, 어느 가문의 누구신지만 말씀해주시면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빌려드리는 건 별 상관없지만···. 아는 사람이 근처에 산다면서, 어째서 이러고 계시는 겁니까? 그분을 만나러 가지 않으시고요?"
"그, 그게···. 제가 아는 사람도 귀족이라, 이런 꼴로 찾아가기 좀 그래서···."
그런 이유라면야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저택 앞을 서성거려봤자, 집주인에게 소식이 전해지기는커녕 경비병에게 쫓겨날 게 뻔하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타국 수도를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하지만, 곁에 호위가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테라룸 왕국에서도 혼자 나타나긴 했으나, 멀찍이서 기사들이 다가오는 중이라고 세르펜스가 말했었다.
'그때처럼 혼자 나대다가, 결국 기사들과 떨어진 건가?'
하지만 내가 아는 베일은 한눈파느라 일행을 놓칠 만큼, 부주의한 성격이 아니다.
또한, 호위 대상을 놓칠 정도로 무능한 자들을 기사로 뽑았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바스툴 왕국의 왕자가 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냥 귀족도 아닌 왕족이 방문한다는데. 세르펜스가 몰랐을 리가 없다.
'바스툴 왕국이 이번에도 바스툴 왕국 했나?'
그런 거라면 바스툴 왕가 사람 중, 유일하게 '친(親) 성검의 주인' 성향인 2왕자가 여기서 빌빌대는 것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성검의 주인] 때와 달리 제국이 건재하기에 별일 없을 줄 알았더니. 뭔가 일이 터진 게 틀림없다.
'설마 테라룸 왕국에서 만났을 때, 이미 쫓기고 있었다거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아닐 것 같다.
베일은 쫓기는 와중에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어 소란피울 정도로, 생각 없는 인물이 아니다.
세르펜스도 따라오는 자들을 두고 호위 기사라 칭했었다. 그들에게서 적개심이 느껴졌다면, 베일을 모른 척하는 대신 보호 조치에 들어갔을 거다.
"아, 안 되는 겁니까···?"
베일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는 자꾸 시끄럽게 울려대는 꼬르륵 소리가 야속하다는 듯, 주린 배를 두 팔로 감쌌다.
아까는 유리창 너머의 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더니. 정말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샘솟았다.
"아뇨,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그러지 말고 제 집에 가서 일단 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건 어때요?"
"그, 그건···."
지금 같은 꾀죄죄한 행색으로는 돈이 있어도 뭐 하나 제대로 사 먹지 못할 거다. 청결이 중요한 음식점에 거지꼴을 한 사람이 드나들면 매출이 떨어질 테니까, 가게 주인이 쫓아내겠지.
더구나 지금 베일은 옷만 더러운 게 아니라, 이상한 냄새까지 났다.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망정이지. 평소 같았으면 번화가 근처에도 못 오고,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고 쫓겨났으리라.
그렇기에 당연히 내 제안을 수락할 줄 알았다. 하지만 베일은 내 시선을 피하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면 만나기로 한 분에게 제가 대신 연락해 드릴까요? 와서 데려가라고? 그 사람이 누군지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바로···."
"그,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요?"
왜냐는 내 질문에 베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베일의 새파란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헤매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사람이 워낙 유명 인사라 친해지려는 사람도 많아서, 어지간한 이들이 보낸 연락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보내 봐야 소용없습니다."
"와,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사람이 다 있대요? 자기가 유명하면 유명한 거지, 남의 연락을 다 씹어?"
"······."
"그게 대체 누굽니까? 말만 해 봐요. 제가 이래 보여도 수도에서 나름 알아주거든요. 황제 폐하만 아니라면, 제 연락을 씹을 만한 사람은 이 수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고, 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일은 내 말이 믿기지 않는가 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경계심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불신이 가득 차올랐다.
저 눈은 필시 허풍쟁이를 보는 눈이다.
"와, 나, 진짜 어이가 없네. 설마 지금 제 말을 못 믿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서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들어나 봅시다."
"······."
이번에도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베일은 아까 자신이 구경했던 유리창 너머 빵 진열대에 힐끔 눈길을 던졌다. 망설이는 듯했으나, 굶주림 앞에서는 장사 없다.
어떻게든 내 신뢰를 얻어야 돈을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베일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프, 프라시더스 공작님···."
"네? 누구요?!"
그저 아는 사람이라고만 말했다면 모를까. 베일은 분명 만나기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도 몰라서 크게 반문하고 말았지만, 베일이 왜 세르펜스의 이름을 댔는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쉽사리 연락하지 못하고, 포기할 만한 사람 이름을 댄 거다.
내 반문을 그저, '너 따위가 프라시더스 공작님과 알고 지낸다고?'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베일이 자신의 말을 바로 정정했다.
"···의 보좌관입니다!"
"······."
시도는 좋았으나, 상대가 영 좋지 못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베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니, 뭐. 됐어요. 이야, 마침 잘됐네요. 제가 프라시더스 공작님의 보좌관과 동향 사람이라, 아주 잘 아는 사이거든요. 안 그래도 지금 공작저로 가는 길인데, 같이 갑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꼴을 하고 공작저로 찾아간다니! 프라시더스 공작님께 크나큰 폐가 될 겁니다."
베일이 과장된 연기를 하며 말했다. 제 딴에는 잘 둘러댔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만족해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베일에게만 얼굴이 보일 정도로, 세르펜스의 후드를 살짝 들췄을 뿐이다.
"그렇다는데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모쪼록 부담 갖지 마시고, 제 저택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내가 후드를 들추는 타이밍에 맞춰, 세르펜스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