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71화 (371/925)

371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1)

"좌우간 내가 하려던 말은 바스툴 국왕이 2왕자를 떠보면서까지, 그자에게 악마 숭배 세력과 손잡는 것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세르펜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다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찬밥 얘기는 이제 그만 하고 싶은가 보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됐지, 왜 이렇게 돌려서 설명한 겁니까?"

"선우가 이해하기 쉽도록 배경 지식을 설명한 것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왜냐고 물을 테니, 그걸 먼저 설명했다는 뜻이다.

반론할 여지가 없다.

"아무튼 내가 바스툴 왕이었다면, 2왕자의 의중을 떠보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번거롭기도 하고, 악마 숭배 세력과 결탁한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갈 위험도 있으니까. 식사 중에 독살하든, 자고 있을 때 암살을 했겠지."

"꼭 앞에 '내가 바스툴 왕이었다면' 같은 말을 붙일 필요가 있는 겁니까?"

"주제에서 벗어난 지적은 불허한다."

세르펜스가 이제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에나 집중하라며 근엄한 척 표정을 굳혔다.

계속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면 녀석이 삐질 것 같으니, 육아 모드는 잠시 꺼둬야겠다.

"그러니까 베일이 바스툴 왕궁에 도착했을 땐, 왕실은 이미 악숭이와 결탁한 상태고, 베일을 떠본다거나 시종을 통해 거짓 정보를 흘린 것 등. 그 모든 계획이 악숭이가 짠 거라는 뜻이죠?"

"그러하다."

세르펜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내가 내놓은 풀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지금이 바로 내가 녀석의 얘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듣고 있는지, 보여줄 타이밍이다. 이때를 놓치면 세르펜스 행동 분석 전문가 타이틀을 내려놔야 한다.

"베일의 행동을 유도해서 무언가 얻어내려는 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베일을 섭외하려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엎은 걸까요?"

"기왕이면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게 낫겠지."

녀석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어느 정도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거다.

나는 궁금해 죽겠으니, 빨리 설명해 달라는 표정으로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스툴 왕실에서는 2왕자가 악마 숭배자라는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낼 거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악마 숭배 세력에게 흑마법 관련 물품을 받아, 2왕자의 궁에 가져다 놓기만 해도 될 테니."

"진짜 간단하네···."

"그러니 아예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러지 못하게 한다는 걸 잘못 말한 건 아니죠?"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제대로 말했다는 의미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르펜스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2왕자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면 된다."

"진짜 죽이자는 건 아닐 테고, 그렇게 조작하자는 뜻이죠?"

"그래."

세르펜스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이런 얘기를 할 거라면 당사자인 베일에게 먼저 설명을 한 뒤, 동의를 받는 게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세르펜스의 생각은 나와 많이 다른가 보다.

"이미 죽은 자에게 악마 숭배자라는 혐의를 씌워 봤자,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킬 따름이다. 게다가 교단에서 조사 명목으로 왕궁 곳곳을 파헤칠 텐데. 그 과정에서 어떤 폐단이 드러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치고 얻을 수 있는 건 불명예뿐이니. 바스툴 왕실에서는 2왕자가 사고나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한 뒤, 그대로 묻어 버릴 거다."

세르펜스가 상큼하게 웃으며 흉흉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얘는 갑자기 왜 이렇게 신난 건지 모르겠다.

"아, 예. 서스펜스한 설명 아주 잘 들었습니다."

"듣기만 하지 말고 제대로 기억해라."

"···네?"

불안감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가 오른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뺨을 감싸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꾸며냈다.

"제가 이런 무서운 얘기를 꺼낼 수는 없잖습니까?"

가증펜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초록색의 눈동자가 '어떻게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조작할 수가 있죠?'라고 묻는 듯해서, 더 어이가 없다.

"그럼 방금 얘기를 꺼낸 그 입은 세르펜스의 것이 아닌 제 거라도 됩니까?"

"신체 부위를 떼어 주는 건 좀 그렇지만, 먹다 남은 음식은 드릴 수 있습니다."

"필요 없어!"

나한텐 헛소리하지 말라며 뭐라고 하더니, 이젠 자기가 한술 더 뜬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자, 세르펜스가 푸훗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알겠는가? 선우가 헛소리를 할 때마다,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장난은 이제 끝났는지, 세르펜스의 말투가 반말로 돌아왔다. 그래도 얼굴 가득 짓궂은 미소만은 여전했다.

속으로 내게 한 방 먹였다며 좋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와, 진짜 억울하네! 누가 들으면 제가 세르펜스를 놀리려고 이상한 소리를 해댄 줄 알겠습니다!"

"···그럼 진심으로 내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고 싶다고 말한 건가?"

세르펜스가 질겁하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진심으로, 몹시 억울하다.

내가 헛소리했다는 얘기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다.

내 모든 말은 속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헛소리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 이따위다.

지금도 세르펜스는 내 말의 진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아, 됐어요! 헛소리하는 걸 보니 중요한 얘기는 다 끝났나 본데, 집무실 가서 일이나 합시다."

나는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통하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런데 어째 세르펜스가 따라오질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녀석이 입을 떡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선우 입에서 일하자는 얘기가 나올 줄이야···."

괜히 물어봤다. 나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세르펜스는 내가 책상 앞에 앉고 나서야, 뒤늦게 제정신을 찾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나와 세르펜스 둘 다 업무에 집중한 탓에, 집무실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펜소리로 가득 찼다.

슬슬 일이 지겨워져서 세르펜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똑똑똑, 묵직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베일이 벌써 돌아온 건가 하는 의문도 잠시. 들어온 사람은 제온이었다.

"어제 지시하셨던 일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조사가 벌써 끝났어요?"

"수도로 들어온 상단 조사는 끝났고, 나머지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제온이 내 질문에 대답하며 가져온 서류를 세르펜스의 책상 위에 올렸다.

내가 하도 세르펜스와 맞먹었더니, 이제는 보고 중간에 끼어들어도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말씀하셨던 상단은 플로라 상단으로 잠입한 조사원이 말하길, 마차에 실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비료 포대 중 하나가 완전히 뜯어진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큰 피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누가 봐도 일부러 찢은 것이 분명한 흔적이 남아서 직원들 간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나 봅니다."

아마도 베일은 비료 포대를 하나 찢어, 그 안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동이 한 상단에 불화를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런데 이런 얘기에 굳이 서류가 필요한 걸까?'

내가 결재 서류의 필요성에 회의를 느끼는 동안에도 제온은 물러나지 않았다.

더 보고할 사항이 남았나 보다.

"어제 보좌관님께서 데리고 오셨던 손님은 조금 전, 저택을 나간 것으로 위조해 두었습니다."

"엥? 제가 데려온 거로 된 겁니까?"

"함께 외출하셨던 공작님께서는 얼굴을 감추고 계셨잖습니까."

제온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듣고 보니 몹시 그러했다.

더군다나 그날 우리가 갔던 곳은 제과점이다.

제국의 공작이 정체를 숨기고 수도의 유명 제과점에서 쿠키를 사고 왔다는 건, 듣고도 믿지 못할 일이다.

'차라리 정체를 드러내고 당당히 다녀왔다면, 사람들도 그냥 단 걸 좋아하나 보다 했을 텐데···.'

단것을 좋아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긴다면, 놀림거리가 되기에 십상이다.

세르펜스처럼 똑똑한 녀석이 이 간단한 것을 왜 모르는 걸까?

"손님은 지방에서 올라온 여행객으로, 강도를 만나 짐을 모두 뺏겨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곤란해하던 차에, 우연히 만난 보좌관 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설정입니다."

"너도 설정이냐?"

"예?"

그놈의 설정 소리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고, 보고하던 제온이 그게 뭔 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설명하세요."

"손님과 비슷한 체구의 정보원 머리칼을 군청색으로 염색하여, 정문을 통해 저택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근처 술집에서 보좌관님의 선행을 퍼트린 뒤 여관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수도를 떠나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거, 사람 민망하게···."

한 적도 없는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칭찬이 퍼져나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 편이 거북하고 켕겼다.

여론을 조작하여 이미지 메이킹 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보좌관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민망하기로 따지자면 어디 저만 하겠습니까? 친형의 없는 미담을 만들어서 퍼트리라고 지시를 내린, 제 처지도 생각해 주십시오."

제온이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민망할 수는 있지만, 저렇게까지 우울할 일인가 의문이다.

"남들은 집사님을 형의 소심한 성격을 걱정해 주고, 이미지도 챙겨주는 착한 동생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때 소심하다는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딴에는 위로한다고 꺼낸 말이었는데, 그게 제온의 흑역사를 건드린 모양이다.

제온이 중2 때 쓴 자작시를 발견해 버린 사람처럼 괴로워했다.

"이 몸에 제가 들어와 있는 걸, 모르고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죠."

"보좌관님은 저택에 퍼진 제 소문을 몰라서 그렇게 태평하실 수 있는 겁니다."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요?"

"···보고는 끝났으니, 이만 물러나 봐도 되겠습니까?"

나와 대화하던 제온이 부자연스럽게 세르펜스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던 세르펜스가 안면을 몰수하고, 흐뭇한 미소를 꾸며내며 따스한 눈길로 제온을 바라보았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제온이 세르펜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내가 듣지 못한 소문일지라도, 세르펜스라면 분명 주워들었을 테다.

"집사가 자신의 형을 몹시 좋아하다 못해 애지중지한 나머지 직장까지 따라왔으며, 형의 행동 하나하나를 미화시켜 흐뭇하게 바라보는 변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어쩌다 그렇게까지 되어버린 거죠?"

"선우에게서 소심함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문이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그만큼 당신이 소심하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세르펜스가 그런 소문이 퍼진 것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나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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