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4)
베일의 시선이 편지지를 빠르게 훑어내려 갔다.
세르펜스가 우아한 자태로 타르트를 세 입째 먹었을 즈음. 베일이 다 읽은 편지를 고이 접었다.
편지를 읽기 전과 비교하여, 베일의 표정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하다.
"감사합니다."
베일이 편지를 본래의 주인인 세르펜스에게 돌려주며 감사를 표했다. 세르펜스는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편지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휴마누스이건만. 어째서인지 세르펜스를 바라보는 베일의 시선에 호감이 가득 묻어났다.
'설마하니,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를 설득해 줬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세르펜스는 휴마누스에게 직접 판단하라며 베일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덧붙인 내용이라고는, 바스툴 왕국에 가보긴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지막 한 줄이 전부였다.
이 사실을 베일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갈등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베일이 진짜로 착각을 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감사하다는 말이 끝이야?'
바스툴 왕국에 가 있으라는 글을 읽었으니,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어볼 만도 하건만. 베일은 감사하다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테라룸 왕국에서는 새파랗게 빛났던 베일의 눈동자가, 지금은 멍하니 초점이 풀려 혼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멍하니 앉아 탁자 위의 타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는데, 그조차도 시야에 닿았으니 그냥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게 느껴졌다.
만약 베일의 앞에 놓인 것이 얼그레이 쇼콜라 타르트가 아닌 다른 것.
이를테면 정어리 파이 같은 게 놓여있더라도, 베일은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을 거다.
제온에게 전해 들었던 대로 의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베일이 타르트와의 눈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맑은 녹색의 눈동자와 흐리멍덩한 파란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베일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다. 심지어는 표정 또한 질문과 맞지 않았다.
베일은 세르펜스가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봐 걱정스럽다기보단,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의 얼굴을 했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르펜스는 베일의 물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연기에 베일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답은 뻔히 나와 있음에도 고민하며 망설이고 있잖습니까."
베일이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정의감이 뛰어난 사람이다. 올바르고 그릇된 것을 분간할 줄 알며 잘못된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저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만약 비겁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겁쟁이일 뿐입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위협당하면서까지 진실을 알리고자 홀로 이곳까지 오신 분을, 그 누가 겁쟁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의기소침해하는 베일에게 세르펜스는 살살 달래는 듯한 어투로 말하였다. 우쭈쭈하는 실력이 제법이다.
"정의를 관철한다는 건 항상 고민하고,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가시밭길의 연속입니다. 저하께서 주저하신다고 해서 그 길을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신다는 증거입니다."
"······."
베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며 동요를 내보였다.
세르펜스는 그런 베일과 눈을 맞추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 닷새간. 앞으로 마주해야 할 고난과 역경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염려하고, 행여나 제 뜻을 오해한 누군가가 자신을 손가락질하지 않을지 근심하며. 그렇게 많은 가정을 떠올리며, 걱정하셨을 겁니다."
세르펜스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다고 동의하듯, 베일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불의를 저지른 자에게 비난이 따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자가 견뎌야 하는 건 비난이 아닌 악의다.
당연한 말이지만, 명백하게 후자가 견디기 힘들고 훨씬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베일은 이미 그러한 일을 자잘하게 겪어봤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 타인을 끌어내리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모두가 더러운 진창을 구르고 있을 때, 혼자서 정의를 외친다는 건 그런 일이다.
'그래도 베일이 마냥 정직하기만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바스툴 왕국에서 탈출하고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불법적인 루트를 역이용한 걸 보면 나름대로 융통성도 있는 것 같다.
비록 그 뒤에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면에서는 휴마누스보다 나았다.
"아무런 각오도, 고민도 없이 경솔한 선택을 하는 사람보다, 저는 저하처럼 수많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리시는 분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르펜스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을 연상케 하는 상냥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모습에 베일이 '아!'하고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하마터면 나 또한 세르펜스의 온화한 얼굴 때문에 그냥 넘어갈 뻔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렇게 감동적인 말은 아니었다.
특히 맨 마지막 문장이 그러하다.
녀석은 베일이 왕이 되는 걸, 이미 결정된 사항처럼 말하고 있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세르펜스가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따사로운 눈빛으로 베일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베일은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빨리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초조해했다.
베일이 올바른 것과 정의감에 집착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건, 바스툴 왕실 사람들. 그중에서도 그의 아버지인 바스툴 국왕 때문이다.
국왕의 폭정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다.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이 가족인 탓에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래서 베일은 [성검의 주인]에서, 타락펜스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자에게 의지해 버렸다.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도 한몫했으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을 동경하고, 믿고, 의지하며. 계속 곁에 둔 거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세르펜스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게, 아주 큰 문제였지···.'
한 다리 건너서도 베일을 쥐락펴락했던 세르펜스다.
지금처럼 직접 대면하면 베일은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다.
나도 베일이라면 고민하고 방황하더라도 결국에는 대의를 선택하리라고 믿는다.
비겁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올바름을 관철하려 한, 곧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걸 저렇게 교묘한 말로 현혹하는 건 옳지 못하다.
지금 세르펜스가 하는 짓은 일종의 세뇌나 다름없다. 자립심을 깎아 먹는 짓이다.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서 바스툴 왕국까지는 꽤 먼 거리잖습니까? 천천히 고민하셔도 괜찮습니다."
세르펜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베일이 바스툴 왕국까지 동행할 것을 확정 짓고,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답을 내놓으라고 말하였다.
심지어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스툴 왕국까지 가서, 왕을 안 하겠다고 말하긴 힘들지···.'
베일이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기회는 사실상 지금뿐이다.
지금이라면 교단에 요청하여 바스툴 왕실의 눈을 피해,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바스툴 왕국행(行)이 결정된다면, 더는 선택의 기회가 없다.
또한, 세르펜스가 베일이 혼자서 차분히 고민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지금처럼 기대하고 있다며 은근하게 압박하는 한편. 베일이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유도할 게 분명하다.
'그래야 악숭이들이 [성검의 주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베일에게 접근하더라도, 자신이 베일의 행동을 좌우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베일은 자신의 선택도 아니요, 대의를 위함도 아니요.
오로지 세르펜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왕위에 오르길 결심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위로를 하라고 데리고 왔더니···!'
하지만 세르펜스가 한 말의 표면적인 의미만 놓고 보면, 당장 대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베일은 안도한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고, 세르펜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님! 그래서 언제 출발하실 생각인데요?"
나는 손을 뻗어 세르펜스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며 질문했다. 세르펜스와 베일의 눈빛 교환을 끊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둘의 시선이 곧바로 나를 향했다.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면, 베일이 나를 무척이나 무례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는 거다.
내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걸 모르니 어쩔 수 없다. 내가 이해해 줄 수밖에.
"신분증을 새로 발급해야 하니, 다음 주쯤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세르펜스가 자신의 얼굴 앞에서 휘적거리는 내 손을 치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장 내일 출발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국이 아니라, 교단에 부탁해 볼 생각입니다."
"신분증 얘기죠?"
"네. 신분증 한 장쯤이야,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일이지만···. 제국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차후 왕자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하셨을 때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좋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패륜 왕'에서 그치지 않고, '매국 왕'이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붙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받고 더블로 갈 게 따로 있지. 그딴 불명예 2종 세트는 필요 없다.
"그런데 교단에서도 신분증 발급이 가능해요?"
"아시다시피 제국에는 신성력을 가진 자들이 특히나 많잖습니까? 그 탓에 제국 출신의 성직자가 외국으로 발령 나는 일도 많고, 이단 심문관도 종종 일반 성직자 행세를 할 때가 많아서···."
"잠깐만요!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한데요?"
내가 이의를 제기하자, 세르펜스는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단에서 발급 가능한 신분증이 '성직자'로 한정된 것처럼 들리는데, 제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제대로 이해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신성력이 있는 사람은 세르펜스 뿐이잖아요!"
"괜찮습니다. 신성력을 쓸 일이 생기면, 제가 나서면 됩니다."
나는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의심해야만 했다.
"시온 경께서 신앙심이 뛰어나시어, 성직자를 사칭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세르펜스가 헛소리를 내뱉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틀려먹은 문장이다.
나에게는 신앙심이 없으며, 성직자를 사칭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한 세르펜스는 이런 나를 쥐뿔도 이해하지 않았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송되는 죄인이라는 설정은···."
"제가 이래 봬도 직업 적성 테스트 결과, 성직자가 나올 정도로 성직자가 천직인 사람입니다! 제게 신성력이 있었다면 바로 교단에 들어갔을 텐데! 그 아쉬움을 여기서 해소하게 될 줄이야! 이야, 신난다!"
내가 말을 하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