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7)
호출을 받고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정원에서 낮잠을 즐기던 유지스였다.
그다음은 실험을 안전하게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걸린 에드나. 마지막으로 수련 중 흘린 땀을 씻고 온 윈스톤이 차례로 도착했다.
일행들이 전부 모이고 가벼운 통성명이 끝날 무렵. 한 시녀가 카트를 끌고 왔다.
테이블 위로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한입 크기로 자른 과일과 빵, 크래커 등이 놓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드리워지려는 찰나. 진한 초콜릿 향과 치즈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탈탈탈,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카트가 하나 더 등장했다.
녹은 초콜릿과 치즈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흘러내리는 두 개의 퐁듀 분수를 보고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 모습에 세르펜스가 놀란 고양이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 맞다! 저거 사놨었지, 참?!'
프뤼네 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발주해 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가 모두를 불러 디저트와 차를 준비해 달라고 했더니, 작은 파티라도 여는 줄 알고 퐁듀 세트를 준비한 모양이다.
어쩐지 디저트가 늦게 도착해서 의아한 참이었다. 이제 보니 초콜릿과 치즈를 녹이느라 그랬나 보다.
나는 퐁듀 세트를 가져온 시녀와 시종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치켜세웠다.
"치즈는 저기 윈스톤과 에드나 씨 쪽으로 옮겨주시고요, 초코는 이쪽에 놔 주세요."
내 지시에 따라, 두 명의 시종이 마력으로 구동되는 퐁듀 분수를 양쪽에서 잡고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런 건 대체 언제 사셨어요? 세르펜스의 반응을 보면, 모르시는 일 같은데···."
"프뤼네 왕국 가기 전에 제 돈으로 사서, 도착하면 주방에 전달해 달라고 제온에게 부탁해 놨습니다."
"웬일로 경비가 아니라 직접 사셨어요?"
"가끔은 제 돈으로 살 때도 있어야죠."
나는 유지스의 물음에 별거 아니란 식으로 대답하며, 슬쩍 세르펜스 쪽을 눈짓했다.
그제야 유지스가 '아아~!'하고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펜스는 아직도 입을 가린 자세 그대로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비싼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의 모습이 저러할까?
예기치 못한 선물에 기뻐하는 녀석의 모습에 뿌듯함이 샘솟았다.
"흠, 흠! 무거우셨을 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르펜스가 뒤늦게 손을 내리며 시종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느라, 녀석의 입꼬리가 평소보다 아래로 쳐졌다.
그 때문에 자칫 모르고 보면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공작저 내에 없···.
'···지 않구나?'
프뤼네 왕국에서 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세르펜스에게 단것을 열심히 먹인 결과. 에드나는 어렴풋이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베일은 그러한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설마하니, 베일한테 공작가 사용인들을 멋대로 부리는 놈으로 찍힌 건 아니겠지?'
뒤늦은 걱정이 들었으나, 아무렴 어떠랴 싶다.
초콜릿 분수를 힐끔거리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초콜릿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우리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남의 시선이 대수인가?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
수고해준 사용인들도 세르펜스의 희귀한 표정을 보고 만족하며 물러갔다.
"참! 방금 말씀하신 '제온'이라는 분은 집사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시온 씨의 동생이라던···."
에드나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짝하고 손뼉을 치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 맞아요. 워낙 안 닮아서 못 알아보는 사람도 많던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마가 보낸 편지에 적혀있었거든요.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보좌관이 동생에게 무시당하는 게 고민이라면서, 제 노하우를 궁금해하신다고요."
아니마의 편지가 그렇게 끝났을 리가 없다.
나는 '아니마는 아직 아기', 줄여서 '아.아.아' 선언을 똑똑히 기억한다.
분명 그 뒤로 어떻게 내가 에드나와 같아질 수 있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을 게 뻔하다.
그리고 에드나가 보고 싶다거나, 같은 저택에서 생활하는 나와 제온이 부럽다거나 하는 얘기로 끝맺음 지었겠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굳이 그런 고민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서요. 지나가며 들은 얘기인데, 동생분께서 시온 씨를 굉장히 아낀다고 다들 입 모아 말하더라고요."
"아···, 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온의 소문이 떠올라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사용인들에게 세르펜스에 관한 얘기를 떠들지 못하게 했더니, 꿩 대신 닭으로 나와 제온에 관해 떠들고 다니나 보다.
"시온 씨 앞에서는 툭툭거리나 봐요? 그저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뿐일 테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에드나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어린아이들의 귀여운 형제 싸움이라도 본 듯, 흐뭇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먹는 거 앞에 두고 떠들기만 하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나는 과일과 빵, 크래커 등을 골고루 빈 접시에 덜어서 베일의 앞자리에 놓았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게나."
"알아서 드시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러죠. 적어도 이만큼은 꼭 드세요. 더 드시고 싶으면 더 드셔도 되는데, 덜 드시는 건 안 됩니다."
내 말에 베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먹기 싫은 걸 억지로 권해서,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아차! 내가 너무 어린애 다루듯 말했나?!'
이게 다 세르펜스를 대하던 버릇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어린애 취급한 걸 사과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어째 옆얼굴이 따끔거린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다. 세르펜스가 날 노려보고 있는 걸 테다.
부모님이 자신은 내팽개치고, 놀러 온 친구에게만 간식을 챙겨주며 관심을 보인 셈이니. 녀석이 섭섭해할 만도 하다.
나는 딸기와 바나나 같은 달달한 과일 위주로 접시에 담아, 세르펜스의 앞에 놓았다.
녀석은 철저하게 연기로 무장된 미소로 감사를 표하고는 포크로 딸기를 푹 찔렀다. 다른 딸기보다 유난히 크고 실한 딸기였다.
'삐졌네, 삐졌어! 그리고 삐진 와중에도 큰 딸기를 골랐어!'
나는 녀석의 좀스런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크래커의 귀퉁이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초콜릿 분수에 쓱 갖다 댔다.
"그냥 먹지 말고 찍어 드시면 더 맛있어요."
녀석에게 시범을 보이듯, 초콜릿이 묻은 비스킷을 입에 넣었다.
담백하고 바삭한 크래커에 진득한 달콤한 초콜릿이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맛있는 걸 먹었더니 행복한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세르펜스가 내 얼굴을 힐긋 쳐다본 뒤, 흐르는 초콜릿에 딸기를 살며시 가져갔다.
그리고 초콜릿이 뚝뚝 떨어지는 딸기를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저거 너무 욕심부렸네!'
깔끔하게 음식을 먹기로 정평이 난 세르펜스라 해도, 초콜릿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범벅된 딸기는 깔끔하게 먹기 어려웠나 보다.
세르펜스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왼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녀석은 체면과 초콜릿 퐁듀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뚝뚝 떨어지는 초콜릿을 다른 과일에 옮겨 바른 뒤, 먹던 딸기를 한입에 넣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다.
바스툴 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퐁듀를 한 번 더 먹어야겠다. 그땐 마카롱도 같이 준비해 달라고 해야지.
"시온 경은 보통 유능한 게 아닌가 보오?"
세르펜스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베일이 느닷없는 물음을 던졌다.
왠지 모르게 비꼬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저 내 착각일까?
"제가 원래 많이 유능하긴 하죠. 저번에 공작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맞아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시온이 대단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유지스가 내 말에 맞장구쳤다.
"그럼요, 그럼요! 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시면, 저하께서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도 그러할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세르펜스가 베일을 꼬드기지 못하도록, 녀석을 자제시키는 거니까.
깜짝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그런 것도 모르고, 베일은 내 말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허세꾼을 보듯 눈에 의심이 가득 꼈다.
"그래서 그 대단한 일이라는 건 어떤 일을 말하는 겁니까?"
"앗!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베일의 질문에 유지스가 양손 검지를 X자로 교차 시켜 입술에 갖다 대며 답했다.
그녀가 저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르펜스가 하는 칭찬이 '우쭈쭈를 잘해준다.'로 귀결된다면, 유지스의 칭찬은 '일루미나티의 수장 겸 신의 사자'로서의 업적에 관련되어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베일에게 설정을 어디까지 풀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말을 아끼는 거다.
현명한 판단이다. 실제로 나는 베일에게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세꾼으로 보이는 건 좀 그렇다.
나는 유지스 다음으로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윈스톤에게 시선을 옮겼다.
"윈스톤도 뭐라고 얘기 좀 해 봐요."
"시온 선배는 괴짜긴 해도, 주군께 있어서는 최고의 보좌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부추김에 윈스톤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먹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먹고 있던 거로 보아, 이제 나에게 완벽하게 적응한 모양이다.
'그런데 괴짜라는 건 뭐야?!'
세상에 나처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반인이 또 어디 있다고.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얘기다.
나는 다른 평가를 듣고자 에드나를 바라봤다.
"시온 씨는 아기를 잘 돌보고, 애들과도 잘 놀아주는 상냥한 사람이에요."
에드나는 내 주요 업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나 지금 내가 듣고 싶던 얘기는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베일의 표정이 갈수록 아리송하게 변했다.
"제가 공작가의 업무 시스템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개편해 놨는지, 그런 얘기는 못 들어 보셨어요?"
"글쎄요? 저는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에드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얘기는 생전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다.
그때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입에 뭔가가 들어있는 탓에, '음! 음!'하는 소리만 내며 손을 흔들어 댔다.
"아! 비슷한 얘기라면 들어봤어요! 시온이 오기 전에는 세르펜스가 밤늦게까지 일을 했는데, 시온이 오고 나서 행정관을 대거 등용하면서 휴식 시간이 늘어났다고요."
유지스가 입속에 든 것을 꿀꺽 삼킨 후에 말했다.
역시 믿을 사람은 유지스 뿐이다.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거 보란 표정으로 베일을 쳐다봤다.
"그건 그냥 새로 뽑은 행정관들이 일을 잘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
유지스가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는가 보다.
나는 최후의 보루로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녀석은 베일이 내게 정신이 팔린 사이, 열심히 초콜릿 퐁듀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새 내가 접시에 덜어준 과일을 다 먹고, 빵을 초콜릿에 찍어 먹고 있었다.
'그래, 넌 열심히 먹어라. 그게 돕는 거다.'
녀석이 나를 칭찬해 봤자, 우쭈쭈로 귀결될 뿐이다.
나를 향한 베일의 신뢰도가 바닥을 찍고 있는 이 시점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가 어떤 오해를 할지는 뻔하디 뻔했다.
내가 세르펜스를 구슬려, 녀석을 멋대로 휘두르려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세르펜스가 베일에게 하는 짓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