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78화 (378/925)

378회

64. 공작님과 작가님 (1)

다 함께 퐁듀를 먹던 그 날.

베일은 초콜릿도 치즈도 찍지 않은 채 맨빵과 과일만 먹었다. 보고 있으면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정말 맛없게 먹었다.

그마저도 세르펜스가 '혹, 준비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며, 서글픈 표정을 연기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먹은 거였다.

세르펜스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베일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제온의 말을 들어보면, 평상시 식사할 때도 억지로 먹는다는 것 같고···.'

그렇게 먹어서 소화는 제대로 될까 의문이다.

나는 베일에게 앞으로 함께 식사할 것을 권했고, 베일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제안을 수락했다.

베일이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서 신경 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거라고 믿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흐른 지금. 나는 그 믿음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실로 안이한 생각이었다.

"어째 왕녀님을 납치한, 동화 속 마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데···."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인가요?"

오늘도 서재에 놀러 온 유지스가 유자를 까다 말고 의문을 내비쳤다.

내가 유지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 깐 유자를 한 알 떼어서 내게 내밀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나에게 내밀어졌던 유자가 유지스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시지도 않은지, 유지스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유자를 맛있게도 먹었다.

지금 내 입안에 고인 침의 절반은 유자의 시큼한 향 때문이고, 다른 절반은 그녀의 맛깔나는 유자 먹방 때문이다.

하마터면 거절을 취소하고 다시 달라고 부탁할 뻔했다.

"와···, 유자를 생으로 먹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런가요? 이상한 일이네요. 유자가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데···."

"너무 시어서 위장 건강에는 좋지 못할 것 같은데요?"

"유자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라면, 그 사람의 위가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그렇게까지 건강하다면 유자를 먹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내 반문에 유지스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자신은 유자를 그저 맛으로 먹고 있음을 시인했다.

"그보다, 방금 마왕이 어쩌고 했던 건 무슨 얘기지?"

나와 유지스가 유자 논쟁을 벌이자 세르펜스가 불쑥 끼어들어 질문했다.

녀석은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서 동화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그에게 사 준 네 번째 동화책이다.

성검의 주인이 왕녀를 납치한 마왕을 해치우고, 왕녀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흔해빠진 내용이었다.

세르펜스가 읽기에는 유치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요즘 가장 잘나가는 동화책이라고 서점 주인이 강력 추천하길래 사 봤다.

'현 성검의 주인은 황위가 예정된 황태자고, 이미 약혼녀도 있지만···.'

어쨌든 [눈물들의 담론]을 포함한 세 권의 동화책은 이미 독후감을 받았고 저것도 받을 예정이다.

"베일 말이에요. 자꾸 저를 경계하면서, 제게서 세르펜스를 구하고 말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잖아요."

"그건 당신이 내게 하는 짓이겠지."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볼멘소리를 했다.

자신이 베일을 꼬드기려는데 내가 자꾸 방해하자, 불만이 쌓였나 보다.

'참나! 그거랑 이거랑 같나?'

녀석은 진짜로 베일을 쥐락펴락하려 하고, 나는 세르펜스의 성장을 돕고 있었다.

둘을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를 넘어 우주와 내핵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툭하면 아무나 이름으로 불러대는데, 그 버릇은 이제 좀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는 변하지 말고 있어 달라더니, 이제 와서 고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자꾸 실수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

"예전에는 실수해도 알아서 수습해 줬는데. 변했어요, 세르펜스. 실망입니다."

"그···, 내가 미안하다. 사과하마."

내가 짐짓 화난 척 말하자, 세르펜스가 꼬리를 내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거는지 모르겠다.

"또 그럴 겁니까?"

"안 그러겠다."

"좋아요, 용서해 드리죠."

"고맙다."

반 장난으로 화난 척했던 건데,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안도하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베일이 이 장면을 봤다면 나를 완전히 적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동화 속의 마왕은 어째서 허구한 날 왕녀들을 납치하는 걸까요?"

유자 하나를 즉석에서 뚝딱 해치운 유지스가 중얼거렸다.

역사 속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다. 그런 납치극이 동화에서는 흔하디흔한 소재로 쓰인다는 게 의아한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마왕과 악마는 나쁜 놈들인 걸 알리고,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기 위함이겠죠."

"하지만 동화 속 마왕은 왕녀를 납치한 것 외에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잖은가?"

유지스의 물음에 내가 답하자, 세르펜스가 반박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세르펜스의 개인 서재는 삼자 토론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아니, 사람을 납치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나쁜 놈이죠!"

"그렇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구색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마왕이 인간 왕녀 따위를 납치해서 어디에다 쓰지?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제대로 된 공감을 해치며, 교훈 또한 끌어내지 못한다."

세르펜스가 읽던 동화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동화책이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는 말을 어쩜 저렇게 유식해 보이면서도 심오하게 느껴지게끔 말할 수 있는 걸까?

참으로 놀라운 언변이다.

"하지만 애들 보는 동화에 유혈이 낭자한 얘기는 쓸 수 없잖아요."

내가 동화책 작가의 고충을 대변해 보았지만, 세르펜스는 수긍이 가지 않는 듯한 눈치다.

녀석이 동화책을 옆으로 밀어서 치워 버렸다.

"그럼 세르펜스가 생각해 볼래요?"

"마왕이 왕녀를 납치할 만한 이유를 말인가?"

"그럼 제가 세르펜스에게 동화책을 새로 써보라고 말했겠어요?"

"으음···."

내 제안에 세르펜스가 팔꿈치를 책상에 올려 턱을 괴며, 고민에 빠졌다.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여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립시킨 후. 왕녀가 제 뜻에 동조하도록 현혹하여, 악마 숭배자가 된 왕녀를 돌려보내어 왕국을 자신에게 바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건 어떤가?"

순수한 감상을 말하자면 그냥 자수하는 거로 들린다.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여 정신적으로 고립시키고, 현혹하고. 왕국으로 돌려보내는 것까지, 전부 세르펜스가 베일에게 하고 있는 짓이었다.

세르펜스는 바스툴 왕국을 꿀꺽할 생각이 없으며 마왕도 아니지만. 그 점만 제외하면 아주 빼닮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런 거라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비록 동화 속에서는 마왕이 죽었다고는 하나, 주입된 사상이 쉽게 바뀔 리는 없을 텐데···. 동화책의 완결 너머에서는 왕녀가 방심한 성검의 주인을 죽이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 할지도 모르겠네요."

왕녀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만으로도 이미 잔혹 동화이거늘. 이제는 권선징악의 구조까지 뒤틀려 버렸다.

앞으로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순수한 마음으로 읽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부분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어떤 부분이요?"

"왕의 핏줄은 왕녀인데, 어째서 생판 남인 성검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고 왕녀는 왕비가 되는 겁니까?"

"아! 그러게요? 그 동화는 근본부터가 잘못됐어요!"

유지스와 세르펜스가 동화책 내용을 근본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동화책을 새로 써 보라고 한 말은 그냥 우스갯소리였는데, 정말로 새로 쓸 기세다.

'일단 흥미진진하니까 놔둬 볼까?'

나는 대화에서 슬그머니 빠지며, 두 작가님이 어떤 동화책을 쓸지 지켜보기로 했다.

"왕은 왜 왕녀를 구해낸 자에게 왕녀와의 결혼을 약속하고, 왕위까지 넘긴다는 약속을 한 걸까요?"

"제왕학도 익히지 않았을 자에게 나라를 맡기다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왕이라면 그런 약속을 할 리가 없습니다."

"흑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요?"

"그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볼만한 인물이라면···."

세르펜스가 동화책의 주인공을 배후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용사가 성검의 주인일 수는 없겠네요. 그 설정은 빼는 게 좋겠어요."

유지스는 과감하게 설정을 뜯어고쳤다.

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어긋난 설정을 바로잡거나, 빼거나. 간혹 새로운 설정을 덧붙여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동화는 더 이상 동화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왕을 세뇌하는 데 성공했으나, 흑마력의 기운이 남아있기에 언젠가는 들키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왕은 세간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공작원을 파견했는데, 그자가 바로 용사였다는 설정이다.

이런 임무를 맡기려고, 악숭이들이 흑마력과 접촉을 배제하여 키운 거라나?

하지만 용사는 사람들의 응원과 칭송을 들으며, 어둠이 아닌 빛 아래에서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악숭이들을 배신하고 마왕을 죽였다.

'즉, 신분 세탁을 한 거지.'

왕 또한 암살로 죽여버리고, 왕이 생전에 했던 말을 운운하며 왕녀와 결혼을 성사시킨다.

용사는 그렇게 왕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용사 왕이라 불리며 찬사를 만끽했다.

그러나 용사가 한 가지 간과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왕녀의 존재였다.

왕녀는 영민한 자였다. 그녀는 용사가 악숭이들의 손에서 키워진 공작원이었다는 것과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나, 그녀에게는 힘이 없었다.

사실을 말한다고 한들, 마왕과 오래 지내며 현혹된 거라는 누명을 쓰게 될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왕녀는 용사가 자신에게 연민과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용사는 나라 운영은 쥐뿔도 몰랐고, 왕녀는 그를 가르치고 때로는 다독이며 진심으로 응원하는 체했다.

그녀의 현명함과 자애로운 마음씨에 용사는 점차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죄책감과 연민, 애정이 뒤섞인 감정은 매일 밤 그를 괴롭혔다.

왕녀가 고대하고 고대했던 그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용사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왕녀의 검이 용사의 심장을 파고들었고, 거짓된 용사는 그제야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깨지 않을 기나긴 잠을.

"그리고 왕녀는 피 묻은 단검을 든 채, 한줄기 눈물을 흘리는 거죠."

"어째서입니까?"

"용사와 이런저런 추억을 쌓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탓이죠."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한 유지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비록 권선징악의 교훈은 돌아왔으나, 서로 죽고 죽이며 유혈이 낭자했고, 왕녀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면치 못하였다.

"개연성도 이만하면 충분하고 반전과 애정 전선까지 갖춰진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긴 한데, 카테고리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요?"

"아! 이거 동화였죠?!"

아무래도 유지스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심취하여, 그 사실을 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세르펜스는 분명 자각하고 있었을 텐데.

우리 아이는 언제쯤 박탈당한 동심을 되찾을 수 있을지, 정말로 걱정이다.

'···당장은 권선징악으로 끝난 것에 의의를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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