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79화 (379/925)

379회

64. 공작님과 작가님 (2)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동화책을 비판하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이. 밤은 속절없이 깊어져 버렸다.

"이제 착한 어린이는 슬슬 자야 할 시간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내 말에 세르펜스가 시계를 보며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친구들과 떠들고 노는 재미를 알아버린 거다.

그런 녀석을 보며 유지스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아유~, 우리 세르펜스 어린이. 노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어디 당신만 할까."

내가 장난스레 놀려대자 세르펜스가 뾰로통하게 받아쳤다.

"아, 참! 오늘 동화책 독후감은 방금 두 분이 만들어 낸 이야기로 퉁칠 테니까, 안 쓰셔도 됩니다."

"정말로···?"

"싫으면 말고요."

"그럴 리가!"

반신반의하던 세르펜스가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숙제하기가 그렇게 싫었나? 아니면 이번에 사 온 책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들었거나.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세르펜스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는 거다.

"이제 슬슬 일어납시다. 먼저 방에 가 있을 테니, 세르펜스도 빨리 씻고 와요."

"저랑은 내일 봬요!"

내가 먼저 일어나자, 유지스가 따라 일어서며 세르펜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세르펜스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내일 보자는 인사를 건넨 후, 다 같이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자신의 방으로, 나와 유지스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거쳐 건물 밖으로 나오자, 산들바람이 나와 유지스를 맞이해 주었다.

유지스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밤에는 아직 선선하네요."

"아직 5월이잖아요."

"하지만 말일인걸요?"

"그렇죠. 벌써 말일이죠."

교황과 만나기 전.

세르펜스는 갑자기 이상 행동을 보였고, 그 이유를 이번 달 내에 설명해 주기로 나와 약속했다.

그 기한이 이제 고작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요 며칠, 세르펜스는 그 약속을 잊은 듯이 굴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까먹고 넘어갈 거라고 기대했나 보다.

아까 서재에서 착한 어린이는 자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세르펜스를 그냥 재울 생각은 없다.

오늘 한정으로 녀석은 나와의 약속을 어기려고 한, 나쁜 어린이니까.

"방금 한 말,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오늘이 무슨 중요한 날이었나요?"

"세르펜스가 오늘까지 제출하기로 한 숙제가 있었는데,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 같아서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에둘러 설명했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룩스메아 속성 강의를 들었고, 녀석이 강의를 하다 말고 딴 데 정신을 팔더니, 다음 날 혼자 밖에 나갔다 왔다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신의 사자가 어째서 그런 강의를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막막해지니까.

'내가 아닌 유지스가 말이지.'

사실대로 말하려면 [성검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없는 일이 되었다지만, 휴마눈새 같은 거랑 연인 사이. 그것도 네 명 중의 한 명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유지스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분명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겠지.

만약 문제의 결말부를 쏙 빼놓고 말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성검의 주인]에서 유지스는 자신의 은인을. 세르펜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개상 이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유지스가 얼마나 세르펜스에게 미안해하며 죄책감에 시달릴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저런···."

유지스가 안타깝다는 듯 한탄을 흘렸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숙제를 내주었고, 녀석이 숙제를 안 해와서 고민이라는 말에도 저렇게 공감해 주는 사람이다.

'유지스라면 내 얘기를 다 믿어주겠지.'

내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며,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안타까워하고. 안쓰러워하고. 끝내는 눈물을 흘릴 거다.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유지스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지 못할 이유만 산처럼 쌓여간다.

"고마워요. 그러는 시온도 좋은 사람이에요."

"당연한 말씀을!"

나와 유지스는 동쪽 별관까지 천천히 걸으며, 영양가 없는 가벼운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밤바람을 맞으며 유지스와 걷고 있자니, 고등학생 시절 야자를 마치고 친구와 같이 귀가하던 때가 생각난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은 몹시 짧았다.

어느덧 현관을 지나고, 층계를 올라. 유지스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세르펜스가 방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목에 턱 걸친 후, 척하니 팔짱을 꼈다.

"행여나 도망치면 어쩌나 했는데···. 오긴 왔군요?"

"왜 그렇게 말을 의미심장하게 하는 거지?"

"어? 아까 유지스도 제게 똑같이 말했는데! 혹시 둘이 짰어요?"

"두 명이 같은 표현을 썼다면, 그 원인은 본인에게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분하게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만은 비겁한 어른이 되기로 했다.

"그건 됐고. 빨리 얘기나 좀 해 봐요."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지?"

"이번 달 안에 세르펜스가 해준다고 약속할 땐 언제고! 설마 이제 와서 모른 척 발뺌하는 겁니까?"

"아···!"

세르펜스가 짧지만 긴 여운이 담긴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설마했건만. 저 반응으로 보아 진짜로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불안으로 물들었다.

"대체 뭔데 그래요?"

"으, 으음···."

"으음이고 야옹이고. 됐으니까, 얘기나 해 봐요."

나는 녀석이 편히 말할 수 있도록, 방음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찢긴 스크롤만 힐끔대며, 계속 머뭇거렸다.

그날 이후 몇 날 며칠이 흘렀는데도 바뀐 것은 장소뿐인 것 같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말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던가요. 기다려 달라고 말한 건 세르펜스잖아요? 아, 진짜! 말하다 보니 화나네? 세르펜스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려니 생각해서, 믿고 기다려 줬는데. 정작 세르펜스가 까먹고 있었다고 하면, 저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지, 진정해라!"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게···."

"그렇게 생겼느냐고요."

내가 다시 한 번 다그치듯 말하자,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자기가 먼저 약속해 놓고 어물어물 넘어가려 하다니! 제가 세르펜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예?!"

"내가 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답니까? 베일에게 자꾸 수작을 거는 건, 세르펜스가 남을 믿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 왔으니까 이해합니다. 그래서 훼방을 놓을지언정, 막무가내로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진 않았잖아요. 제 말이 어디 틀려요?"

"틀리지 않는다. 선우의 말은 전부 옳다."

따박따박 대답은 참 잘한다.

세르펜스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어 무릎 위에 올린 채,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저는 말입니다. 세르펜스가 제게 비밀을 만든 것보다,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서운합니다. 아이가 자라다 보면 부모님께 말 못 할 비밀이 생기길 수도 있죠.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말 미안하다."

"사과는 그만하고, 왜 그랬는지 이유나 들어 봅시다. 용서할지 말지는 그 이후에 생각해 볼 테니까."

내 말에 세르펜스가 주먹을 더욱 꽉 쥐며, 초조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녀석이 저럴 정도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세르펜스를 너무 몰아가며 윽박지른 건 아닌지, 살짝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친구 같은 보호자도 좋지만, 마냥 풀어줘서는 안 된다. 엄격할 때는 엄격해야 한다.

부모 혹은 선생님이 만만하게 느껴진다면 아이는 끝도 없이 기어오르게 된다. 그 결과 버르장머리 없는 사고뭉치로 전락하고, 끝내는 비행 청소년이 되어 버린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아이를 기를 땐 경계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경계하고 조심하는 게 좋다.

"손에도 힘 빼고! 입술도 깨물지 말고!"

나는 녀석에게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다.

세르펜스는 자신이 입술을 씹고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바닥을 쫙 펴고 턱에 힘을 빼며 입을 살짝 벌렸다.

"정신 차렸어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입을 제대로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디 얘기해 봐요."

"그냥···, 잊은 채 지내고 싶었다."

세르펜스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답변이었지만,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나는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만이라도 모두 잊고···. 이곳에 남겠다던 선우의 말을 새긴 채. 그렇게 현재를 즐기고 싶었다."

"···네?! 그건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냥 듣고만 있을 생각이었다. 하나, 도무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한 탓에 내 입에서는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말 그대로다. 선우는 돌아갈 방법을 찾아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내린 판단임을 알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잠깐만'을 외칠 뻔했다.

세르펜스의 말은 마치, 내가 돌아갈 방법을 알아냈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그런 뜻이었다.

"선우라면 이곳에 남겠다는 약속을 지킬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고, 내게는 아직 그대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면. 당신의 세계와 그곳의 가족들이 그립다 못해 가슴에 사무치는 날이 온다면···."

목이 메어오는지, 녀석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갈라졌다. 부드러운 미성 사이로 드문드문 탁한 목소리가 섞였다.

"선우가···. 당신이 혼란스러울까 걱정되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필시 변명에 불과하겠지. 그래, 내가 혼란스러워서 도망쳤던 거다. 그러면 안 됐던 건데···. 그대에게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르펜스의 말이 꼭, '울지 말아야 하는데.'처럼 들렸다.

따끔하게 혼내 줄 생각이었는데 이유를 알게 되니, 녀석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서 차마 화를 내기 힘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차근히 얘기해 봐요. 지금 앞뒤 사정 다 잘라먹고 핵심 문장만 들어버린 느낌이라, 하나도 이해가 안 되거든요? 무릎도 펴고요."

나는 턱 끝까지 치밀어오른 갑갑함을 숨결에 담아 푸욱 내쉰 후, 세르펜스의 옆에 앉아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무릎을 펴라는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미안한 마음에 그러지 못한 것인지. 녀석은 쉽사리 자세를 풀지 않았다.

결국 내가 녀석의 다리를 검지로 쿡쿡 찔러대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고상하고 기품있는 자세는 아니었다.

허리에서부터 목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여, 나보다 높은 눈높이를 유지했던 세르펜스가. 지금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말고, 나보다 낮은 높이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네, 네. 그러니까?"

"죽으면 된다."

"네?"

"선우의 본래 몸은 멀쩡히 살아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제약'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어감상 죽으면 돌아갈 수 있는 듯하다."

나는 틀림없고 확연하게, 차근차근 말하라고 했건만. 세르펜스는 대뜸 결론부터 꺼내버렸다.

이보다 충격적인 얘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돌아가기 위해서라지만, 죽는 건 좀···. 아니, 많이 무서운데?'

세르펜스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길 주저했는지 알 것 같다.

나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을 테지만, 돌아가는 방법 자체로도 큰 문제가 있었다.

녀석의 시선으로 본 나는 '약해빠진 주제에 겁도 없이 나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여벌 목숨을 가진 셈이니.

얼마나 무모하게 나댈 거라고 생각했을까.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제가 일부러 죽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나야 돌아가면 그만이라 쳐도, 이곳에 남은 세르펜스는 내 시체를 봐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는데.

그건 정말 몹쓸 짓이다.

"그 전에, 그거 정말 신뢰할 만한 정보입니까? 대체 누가 그딴 말을 했어요?"

세르펜스가 나를 집무실에 내팽겨두고 외출했을 때. 그 누군가를 만났던 게 틀림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신의 사자가 한 얘기니, 사실일 거다."

"그건 전데요?"

"당신 말고. 으음···, 그래. 선우에게는 '[성검의 주인]을 쓴 작가'라고 표현하는 쪽이 이해하기 쉽겠지. 그리고 그자는 당신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알고 있으며 세르펜스가 반나절도 안 되어 만나고 올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최근에 녀석이 만나지 말라며 방해했던 사람.

"설마 솔레르티아 씨입니까?"

세르펜스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보다 밑에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긍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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