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회
64. 공작님과 작가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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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스메아가 무능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어휴, 아무튼 확실한 건 [성검의 주인] 작가는 룩스메아가 아니라는 것뿐이네요?"
선우가 오늘도 이단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지적해 봤자 원래 부하 직원은 상사를 욕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궤변이 돌아올 뿐이다.
그에게 주의를 주는 것보다, 내가 주위를 경계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으음···. 그렇게 되겠지. 굳이 단서를 덧붙이자면, 신학에 문외한이라는 것 정도···."
"누나가 '어쩌다 친해진 애'라고 말했으니. 제가 살던 세계의 사람이겠죠, 뭐."
선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일 텐데도 말이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느니.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그 태도를 누군가는 경망스럽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선우가 얼마나 생각이 깊고 자상한 사람인지 몰라서, 제멋대로 떠드는 소리에 불과하다.
'또 나를 신경 써 주는 건가···?'
선우에게는 항상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책감에 짓눌리는 대신, 편하게 웃으며 장난칠 수 있는 것 또한 그의 배려 덕분이다.
간혹 그에게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으나, 그로 인해 부담감이 덜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혼자서 결정을 내리고, 일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책임진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외로움의 연장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선우에게 끌려다님으로써 안정감을 얻었다. 언제까지고 그가 나를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생각을 멈추고, 모든 것을 그에게 내맡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그런 건 선우가 바라는 게 아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보여줄 뿐. 끊임없이 생각하고 옳은 답을 찾아내며 스스로 나아가길 바랐다.
나는 생각하고 고민해야 했다.
선우가 나를 배려하여 자신의 문제를 덮어두었으니. 나는 그를 위해 그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어째서 신은 신학에 무지한 자를 대리인으로 삼은 것인가.'
선우는 자신이 살던 세계의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린 듯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 직접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면, 소설 같은 번잡한 수단을 취할 필요가 없다.
'어째서 선우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그 어떤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 이 낯선 세계로 보내지게 되었나.'
그는 말하였다. 자신은 '누나' 대신이라고.
원래 이 세계로 보내질 예정이었던 사람과 그 '작가'의 성별이 동일하다는 걸,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해 버려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그동안 답을 내릴 수 없어 보류해 두었던 의혹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찬찬히 돌이켜 보면 단서는 이미 충분했다.
확정 지을 수는 없어도, 확인해 볼 만한 근거는 진작에 주어졌다.
일찍이 알아챘으면서, 욕심으로 눈을 가리고 외면했던 것은 아닐지.
나 자신이 의심스러워졌다. 그 이기심에 신물이 났다.
"왜 그래요?"
선우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쳐 버렸다.
평소에는 가볍게 둥둥 뜨던 억양이 이럴 때만큼은 나직하게 가라앉아, 성숙한 어른임을 깨닫게 했다.
그와 내가 고작 한 살 차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음···. 설명을 어디까지 했지?"
"룩스메아가 형체 없는 신이라는 얘기밖에 안 했습니다."
"으음, 그래. 그랬지···."
선우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가 떠올린 추측을 선뜻 그에게 알릴 수 없었다.
* * *
"어서 오세요, 손님! 어떤 스크롤을 찾으시나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이 응접했다.
나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패를 꺼내어 그자에게 보여주었다.
"레세라투스 씨께 의뢰할 일이 있습니다."
"항상 뵙던 분이 아니신데···. 최근에 새로 오셨나 봐요?"
작년의 사건 때문인지 경계가 상당하다. 직원이 슬쩍 상체를 낮추며, 눌러 쓴 후드 안쪽을 엿보려 들었다.
'창문에 걸린 방범용 마법만 없었더라면. 하다못해 건물이 대로변에 자리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러한 가정은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후드를 살짝 걷어 올렸다. 얼굴을 확인한 직원은 경계를 지우고, 사장을 불러오겠다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쿵탕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사장 언니가 올라오시래요!"
"감사합니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예의를 내보인 후, 직원의 뒤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이변을 느낀 것은 계단의 중반에 다다랐을 때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심장 박동이 급작스레 빨라졌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붙잡은 손잡이가 미끄럽다. 계단을 오르고 있음에도, 계단을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확인해서 대체 어쩔 생각이지?'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지금 내가 만나려는 자가 정말로 선우가 말한 그 존재라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두려워졌다. 도망치고 싶다.
"왜 그러고 계세요?"
계단 아래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내가 멈춰 서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여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변한 후,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계단을 세 칸가량 남겨 두었을 때, 2층에서 복도로 나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옅은 보랏빛의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작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
"아! 의뢰할 일이 있다고 하셨죠? 나도 참 정신이 없네. 그런데 웬일로 직접 오셨나요? 사람을 시켜도 됐을 텐데···."
눈을 크게 뜨며 묻는 모습이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제가 개인적으로 레세라투스 씨에게 질문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아까 엘라는···. 으응, 뭐 그래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저리 행동한 것인지, 비밀 이야기라고 판단했을 뿐인지. 그 태도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다른 이가 들어서 좋은 얘기는 아니니, 일단은 그자의 제안에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그래서 제게 묻고 싶다는 건 어떤 건가요?"
"레세라투스 씨께서는 혹시···."
속이 울렁거렸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자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에 찾아온 건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이 후회스럽고 내가 원망스럽다.
"혹시,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내뱉은 질문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스크롤 상점 주인의 표정이 황당으로 물들었다.
"스크롤에 들어가는 문자도 문맥을 형성해야 하니, 글이라면 글이죠. 그런 의미에서는 매일 글을 쓰고 있는 셈이네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소설을 쓰신 적이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내가 다시금 질문하자, 그자는 '어어···.'하는 소리를 흘리며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곧장 아니라는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나는 불길함과 간절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가 부정을 듣고 싶어 이곳에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느닷없이 찾아와서 이상한 질문을 하고 간, 별난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
내 추측이 틀리길 바랐다. 선우를 돌려보낼 수 있거나,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가 주위에 없기를 바랐다.
'나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리석은가.'
시온 리벨론의 친동생을 부집사로 들인 후. 선우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을 후회하는 나 자신이 소름 끼쳤다.
"그 소설 제목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성검의 주인]입니다."
"아~, 진짜! 그걸 다 말했어요? 거침이 없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맞은편에 앉은 자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예의 그 소설을 쓴 사람이 자신이라고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 그런데 왜 혼자 오셨어요?"
상대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으나, 나에게 도달한 순간 묵직한 쇳덩이가 되어 가슴에 얹혔다.
억지로 입을 열어 생각나는 바를 말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짓말을 일삼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거짓말을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날은 없었다.
"만약 제 추측이 틀렸다면, 그가 크게 실망하게 될 테니까···. 그래서 그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왔습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마치 심판을 목전에 둔 사형수라도 된 것만 같다.
'어차피 선우는 돌아갈 방법을 알게 되어도, 이곳에 남겠다고 말했잖아? 그렇다면 미련 따위 남지 않도록. 아예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못된 생각이 들었다.
선우가 알게 된다면 분명 회개하라며 혼냈을 거다.
그래서일까? 눈앞의 자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여유를 가장하며 대답했으나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건 상대방도 크게 다를 바 없는지, 그자는 보라색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세워 넣고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그런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선택의 날에 일어난 일부터, 제가 그···. 시온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종 보스'가 되어 '주인공'의 손에 죽었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듣는 귀는 없었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바꿨다.
눈앞의 자는 이러한 내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 제가 실수했네요. 본인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아무래도 그렇죠?"
나는 상대가 계속 오해하도록 입을 다문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걸 정말 다 말했어요? 설마하니···."
"제가 협박한 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아하하,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정말로 이자는 대외적인 내가 아닌, 그 뒤에 가려진 '나'를 알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동자가 그 사실을 입증했다.
"저기, 이제 어쩌실 건가요?"
"고민 중입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저는 '그런 부류'라 아무것도 발설할 수 없어요! 하지만 반드시 죽여야 직성이 풀리신다면, 독살 같은 거로 고통 없이 보내주세요!"
"그쪽을 죽이겠다는 고민이 아닙니다."
"아! 아니셨구나···."
'작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어색하게 실실 웃었다. 말의 내용과 반응이 정상은 아니다.
이자는 분명 선우가 살던 세상을 경험하고 온 사람일 터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선우가 그 세상의 평균인 것일까?'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건만.
어쩐지 어지럼증이 조금 가라앉은 듯해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