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회
64. 공작님과 작가님 (7)
그런 세르펜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르펜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으나 아까처럼 붙잡지는 않았다.
"잠깐 기다려요, 분유···. 우유 타 올게요."
"하필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지?"
"세르펜스 성격에 그거 하나만 덜렁 듣고 왔을 리는 없잖습니까? 얘기가 길어질 테니, 뭐라도 마시면서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따뜻한 우유를 내온다고 하면 누구보다 반길 줄 알았던 세르펜스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마시기 싫어요? 그럼 저 혼자 마실까요?"
"선우도 마시는 건가?"
"네, 뭔가 따뜻한 걸 마시고 싶은 기분이라서요. 아무튼 세르펜스가 안 마실 거라면, 한 잔만···."
"마실 거다."
어차피 마실 거면서 왜 그렇게 튕겼나 모르겠다.
내가 우유를 타는 동안 세르펜스는 오도카니 앉아 말없이 기다렸다. 물 끓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명상이라도 한 듯 마음이 고요해졌다.
"혹시···, 제 가족에 관한 얘기도 들었어요?"
"가족들 걱정이라면 안 해도 괜찮을 거다. 그자의 말에 따르자면, 선우가 이곳에 오게 되었을 당시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했다."
내가 머그컵을 내밀며 넌지시 질문하자, 세르펜스가 컵을 받아들며 말했다.
답변을 마친 녀석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유를 불지도 않고 호록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무덤덤하게 잔에서 입을 뗐다.
분명 입천장과 혀를 다 데었을 텐데도 말이다.
평온함을 가장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동요를 선명하게 내보였다.
'아무튼, 그렇다는 건 저쪽 세상의 시간은 멈춰 있다는 뜻인가?'
솔레르티아가 돌아간 방법도 그렇고. 룩스메아가 날 돌려보낼 생각이 있기는 있었나 보다.
동요를 숨기려 애쓰는 녀석에게는 살짝 미안한 일이나, 본래의 삶으로 탈 없이 돌아갈 수 있다는 확언을 받고 났더니 기분이 꽤 좋아졌다.
나는 내 침대에 걸터앉아, 세르펜스와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저는 제가 식물인간이 되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지 뭡니까?"
"으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데었으면 으음거리지 말고, 치료부터 하세요. 신성력은 뒀다가 뭐 합니까?"
내 말에 세르펜스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가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보면 볼수록 참 편리한 능력이다.
"그리고···, 닮지 않았다더군."
신성력의 유용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세르펜스가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닮지 않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선우의 가족과 내가 닮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자가 그렇게 말하였다."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우유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 우수가 가득하다.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가라앉았고, 눈을 내리깔며 드리워진 긴 속눈썹이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길래 저런 얘기를 듣고 왔는지 모르겠다.
솔레르티아가 세르펜스를 비웃으며, '공작님은 시온 씨의 가족을 대체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지만, 세르펜스가 저토록 우울해하는 걸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였다.
"솔레르티아 씨도 참 웃긴 사람이네! 왜 그딴 얘기를 해서 우리 애 기를 죽인담?"
"나쁜 사람이다."
"네, 진짜 나쁜 사람이네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한다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답답함이 가슴에 얹혀서, 뜨거운 우유를 후욱 불어 식히는 척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런데 솔레르티아 씨는 왜 먼저 그쪽으로 넘어간 거래요? 설마하니 솔레르티아 씨가 먼저 가버려서, 시간 축이 꼬이거나 하진 않겠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리고 그자가 먼저 돌아간 건, 선우에게 원망 받을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체를 당신에게 비밀로 해달라 하였는데, 내가 거절했다. 그래서 도망친 거겠지."
세르펜스의 말은 반쯤 고자질에 가까웠고, 나머지 반절은 '나 잘했지? 칭찬해 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앙큼한 행동 덕분에 부모는 보람과 재미를 느끼나 보다.
괜스레 흘러나온 웃음을 입에 머금고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머뭇거리다가, 내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슬그머니 가져다 댔다.
이젠 정말 무릎냥이가 다 됐다.
이대로라면 발라당 누워서, 제 배를 내게 보여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솔레르티아 씨가 제가 살던 세계로 돌아갔고, 그 몸이 저를 위해 준비된 거였다면···."
"정확히 말하자면 선우의 누님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내가 손을 거두며 말문을 열자, 세르펜스가 정정했다.
"어쨌든요. 그럼 솔레르티아 씨도 원래 제가 살던 세상의 사람이었다는 겁니까?"
"그 반대다. 그자의 말에 따르자면 자신은 원래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 시기'에 있었던 일을 알리려 그쪽 세상에서 환생한 거라 하였다."
그렇다는 건 솔레르티아 또한 그곳에 가족이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가족들을 그리워한 것만큼, 그녀도 가족들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이곳에도 솔레르티아 씨의 가족이 있을···, 있나?'
그러고 보면 그녀로부터 가족에 관한 얘기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또한, 수도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도 했었다.
처음 만났던 날 지나치듯 스승님을 언급하긴 했으나 그 이후로는 듣지 못했다.
말 그대로 수도에 아는 사람이 없을 뿐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녀는 이 세상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온을 만나 곤욕을 치렀던 것을 돌이켜 보면, 그럴 소지가 다분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많이 원망하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같은 것을 추억하며.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한 아쉬움이 남았고, 얼굴 한 번 안 보고 먼저 떠나버린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선우는 너무 정이 많아서 가끔 걱정스럽다. 그런 당신의 다정함에 기대어 사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타인을 생각하는 만큼, 자기 자신도 돌보았으면 한다."
"제 다정함에 기대어 산다면서, 저를 돌려보내려 한 세르펜스만 할까요?"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닮아가는 모양이군."
세르펜스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서 반짝반짝 광채가 나는 것 같다.
우리 가족과 닮지 않았다는 솔레르티아의 말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솔레르티아 씨가 작가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선우가 아니라, 누님 분께서 이곳에 왔다면 누구의 육체를 얻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레세라투스 씨는 보좌관인 '시온 리벨론'에 비해 나에게 접근하기 어렵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걸 제외해서 어디에다 써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잖은가."
아무래도 룩스메아는 빙의자의 역량에 맡길 생각이었나 보다. 누가 무능메아 아니랄까 봐, 일 처리를 참 개판으로 해 놓았다.
누나가 아닌 내가 이 세계로 오게 되고, 솔레르티아가 아닌 시온의 몸에 빙의되어 천만다행이다.
'하마터면 우리 애 1일 1간식도 못 챙겨줄 뻔했잖아?!'
간식을 못 먹는 세르펜스라니. 가여워서 눈물이 난다.
세르펜스는 내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솔레르티아를 작가라고 추측하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추론 과정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나는 녀석의 설명을 들으며, 마시기 좋게 적당히 식은 우유를 홀짝거렸다.
"답을 알고 나면 이렇게 쉬운 문제인데, 몰랐을 땐 왜 감조차 잡히지 않았던 걸까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한때, 내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세르펜스가 설명하는 동안 거의 식어버린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시 데워줄까요?"
"괜찮다. 식어버렸다고 해서 맛까지 변하는 건 아니잖은가."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잔에 남은 우유를 단번에 마신 후, 빈 잔을 내게 내밀었다.
"한 잔 더?"
내 물음에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 머그컵 두 잔을 탁자 위에 올리고, 내일 설거지 하기 좋게 물을 채워 놓았다.
그리고 다시 내 침대로 돌아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당장 급한 호기심은 해결됐으니, 이제 본격적인 브리핑을 들어보도록 하죠. 가서 무슨 얘기를 들었어요?"
"으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깔끔하게 그냥 순서대로 얘기합시다. 아! 이미 말한 건 빼고요."
내 말에 세르펜스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얘기가 나올지 긴장한 것도 잠시.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힌 이야기였다.
"나에게 당신을 협박한 것이냐고 물었다."
"네?"
"그리고 자신을 죽일 거라면 독살로 부탁한다고 말하였다."
"뭐라고요?!"
"또한, 선우더러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아니, 뭐 그딴 사람이 다 있어?!"
괜히 세르펜스가 나를 걱정한 게 아니었다.
솔레르티아에게 살짝 동질감을 느낄 뻔했었는데, 지금은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낄 뻔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을 수가 없다.
"당신이 힘들어하는 건 전혀 몰랐으며, 적응도 잘하고 괜찮아 보여서, 굳이 자신이 올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괜한 걱정을 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다.
솔레르티아가 작가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 나를 덮쳤다.
"내가 선우를 걱정하는 걸 보며, 당신이 내게 무슨 수를 쓴 거냐며 비아냥거렸다."
"와,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어째서 당신을 돕지 않았느냐는 내 물음에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자신이 의심을 덜 받을 거라 판단했다고 답하며, 유용한 스크롤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냐는 식의 말을 덧붙였다."
인류애가 실시간으로 증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상함이 나를 덮쳤고, 턱에 힘이 빠져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리고 선우는 만날 때마다 놀고먹는 얘기만 하는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자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나에게 따지기까지 했다."
"······."
소름이 다 끼쳤다.
겉으로는 그렇게 친근하게 굴었으면서. 속은 너무나도 차가운 사람이었다.
솔레르티아는 사이코패스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소리를 세르펜스 앞에서 줄줄이 내뱉었을 리가 없다.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이렇게까지 공감하지 못하고, 되려 자신을 변호하며 따지기까지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레르티아가 세르펜스와 가까워지려 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다.
하마터면 녀석에게 큰 악영향을 끼칠 뻔했다.
"괜찮은가···?"
세르펜스가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세르펜스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녀석을 안정시킬 때 내가 자주 했던 방식 그대로, 내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신성력 같은 걸 쓰지 않아도 세르펜스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가 마음까지 다다라 나를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