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7)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방음용 스크롤을 손에 든 채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돈 주고 산 거니까 팍팍 쓸 생각이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묘한 패배감이 고개를 들었다.
"안 쓰는 건가?"
"쓸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저는 세르펜스를 혼낼 거니까요! 그리고 혼나는 소리가 밖에 새어 나가면, 우리 애 자존감이 떨어질 테니까!"
"그런 것치고는 남들 앞에서도 자주 혼내지 않았나?"
세르펜스가 예민한 주제를 건드렸다.
하지만 그 주제에 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모든 문제를 이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가 않아요. 애가 밖에서 투정 부리면 어떻게든 타일러야죠. 오냐오냐 받아 줬다가는 버릇만 나빠질 뿐입니다."
"음···."
찔리는 게 있는지 세르펜스가 입을 다물고 공손히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 저 사람은 혼나는 중이구나!'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자세다.
나는 들고 있던 스크롤을 북 찢어버리고,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르펜스도 앉아 봐요."
"꿇으면 되나?"
"아니, 꿇지는 말고요!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무릎은 왜 그렇게 값싼 건데요?!"
"고작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 선우의 기분이 풀린다면 오히려 이득 아닌가?"
세르펜스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으로 녀석의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내 교육 방침에 문제가 있나? 처음부터 무릎 꿇고 손들어 자세를 시키지 말았어야 했나?'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내 '기분'보다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세르펜스는 자존감이 너무 낮은 반면, 나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어디 그뿐인가? 학대하는 부모와 방관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란 탓에 애정 결핍은 기본으로 깔렸다.
'그렇다고 내게 의존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녀석이 얼마나 의지할 곳을 바라왔는지 알고 있기에, 차마 떼어낼 수가 없다.
기대지 못하면 쓰러질 것 같아서. 차라리 옥죄이는 게 낫다며,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춰 살아왔다는 녀석에게.
어떻게 의존하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다른 방법이 있다면, 세르펜스의 자존감이 높아져 나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녀석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 그걸 모르겠다.
장점을 스스로 말하게도 시켜보고, 꾸준히 칭찬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저놈의 자존감은 당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르펜스, 그거 알아요?"
"아느냐고 물을 거라면 '그거'가 무엇인지, 먼저 설명해 주길 바란다."
"거참, 잘나서 좋으시겠수다!"
"···그래서 '그거'는 뭐지?"
"세르펜스가 참 잘났다고요."
세르펜스가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농담조라도 녀석이 '맞다, 나는 매우 잘났다!'라고 말하는 일은 없었다.
"됐고, 그냥 앉기나 해요."
내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마주 보았다.
왠지 심술이 나서 발끝으로 녀석의 신발 앞코를 툭 쳤다. 이게 무슨 놀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세르펜스도 내 발을 툭툭 건드렸다.
"아까 저에게 어떤 걸 물었죠?"
"어째서 자신의 위신을 깎아내리면서까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나서느냐 물었다."
"어째서 그 두 개가 다시 합체한 거죠? 아까는 분리해서 말했잖아요? 각각 뜯어서 설명하려고 오면서 머릿속으로 정리했는데, 갑자기 기출 변형을 내면 어떡합니까?"
"···미안하다?"
세르펜스가 묘하게 말꼬리를 올렸다.
내가 불만을 내비치니 일단 사과를 하긴 했는데, 황당함과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으면 자신에게 질문을 확인할 것 없이, 바로 설명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다는 표정이다.
"문제를 확실하게 다시 짚고 넘어가자는 의도였습니다. 아직도 절 그렇게 몰라요?"
"앞으로는 더욱 잘 알도록 노력해보겠다."
내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는데도, 세르펜스는 저자세로 나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녀석에게 하려던 말은 따로 있는데. 자꾸만 다른 문제들이 눈에 밟힌다.
"혹시 제가 세르펜스에게 권위적으로 굴었습니까?"
"···당신에게 권위가 있었나?"
세르펜스가 불시에 뼈를 때렸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까지 곁들인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어찌 됐건, 나도 모르게 세르펜스를 심리적으로 억압하여 저자세가 된 건 아닌가 보다. 그냥 녀석이 자의로 기어 다니는 거였다.
"세르펜스는 언제쯤 걸음마를 시작하죠?"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쳐야 대화가 이렇게 흘러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울먹거렸다.
이제 고찰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진짜로 울려버릴 것 같다.
"일단 걸음마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둘게요. 지금 얘기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미···."
"이런 일로 미안해하지 마세요. 6개월 된 아기가 못 걸을 수도 있죠."
내 대답을 들은 세르펜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응애 해야 할 타이밍인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다.
"아무튼, 어째서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나선 건지. 그거 먼저 설명할게요."
"으음···, 그래."
"이유는 간단합니다. 감사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 겁니다. 누구처럼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그자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알고 말고요. 이용이 아니라 장악하려는 거잖아요?"
별것 아닌 일에는 과하게 저자세로 나가면서, 진짜 잘못한 일에는 인정하지 않는 녀석의 태도에 말이 모나게 나가버렸다.
세르펜스가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려고 입을 여는데, 세르펜스의 말이 좀 더 빨랐다.
"나는 그자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그자는 내가 바라는 일을 행하는 정당한 거래다."
"베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데요?"
"의지할 곳을 찾고 있잖은가."
알면서 뭘 묻느냐는 듯한 대답이다.
세르펜스의 말을 조합해보자면, 의지할 곳 없는 어린애를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다는 뜻이 된다.
'나 방금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어렵게 돌려 말했나?'
녀석의 당당한 태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세르펜스는 마치 문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본인은 그게 거래라는 걸 모르는데, 그게 무슨 거래입니까?! 세간에서는 그런 걸 두고 사기라 부릅니다."
"나중에 잘 설명하면 이해해 줄 거다."
"이해는 개뿔! 배신감에 충격받고 악숭이네로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계획적으로 잘 대해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충격을 받기야 하겠지만, 이용당해도 좋다고 생각하게끔 잘 구슬리면···."
"당연히 안 되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째서인지 세르펜스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내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크게 돌아가긴 해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라 믿었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째서 나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저야말로 세르펜스가 어째서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대가 손을 내밀어주고, 위로해주고, 의지할 수 있도록 옆을 내어주어서 기뻤다. 그리고 지금도 기쁘게 생각한다."
세르펜스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부끄럼 많은 아이가 어버이날에 수줍게 감사 편지를 내미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들은 게 아니라면 감동의 눈물을 줄줄 쏟았을 거다.
"···그래서 베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안심되는 일이고,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갈수록 가관인 녀석의 말에 나는 침대의 헤드보드에 머리를 찧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물리적으로라도 충격을 받아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충동은 미수로 그쳤다.
딱딱한 나무판에 내 이마가 닿기 전에, 세르펜스의 손바닥이 먼저 닿았기 때문이다.
"선우!!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놀람과 화남.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놔 봐요! 제가 세르펜스를 잘못 가르쳐서 이 사달이 난 거 아닙니까!"
"그, 그러지 마라. 내가 잘못했다. 내가 선우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해서···. 그래서 그런 거다."
세르펜스의 애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정신이 되돌아왔다.
진짜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애 앞에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한 건지 모르겠다.
"잠깐 정신 좀 차리려고 그런 겁니다. 그, 왜···. 졸릴 때 찬물로 세수하면 잠이 깨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겁니다."
"결국 나 때문이잖은가."
"그런 거 아닙니다."
"맞잖은가."
"아니래도요?"
"으흑···."
결국 또 울려버리고 말았다.
세르펜스가 자라온 환경이 특수하다는 걸 알면서 너무 크게 동요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침착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세르펜스 일단 진정하고 뚝 해봐요."
"뚜···욱···, 읍···."
'뚝'이 잘 안 되나 보다.
나는 이마에 닿은 세르펜스의 손을 잡아서 떼어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입을 꾹 다문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세르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읍읍 하는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와 더 안쓰럽다.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미안해요, 세르펜스. 내가 잘못했어요."
"아, 아니···다. 내가, 흐끅···!"
세르펜스가 도로 입을 다물며 울음을 삼켰다.
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기자, 세르펜스가 실에 매달린 연처럼 끌려와서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세르펜스. 아니, 아도르? 아도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아니, 사실 '잘'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원인은 알겠습니다."
나는 녀석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애써 침착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눈물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래 봤자 완전히 그친 건 아니고, 뚝뚝 흐르던 눈물이 똑똑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다.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아도르가 그게 좋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좋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세르펜스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운을 뗐으나,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만 오물거렸다.
녀석은 상체를 수그린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올려 내 눈치를 살폈다.
"괜찮으니 말해도 됩니다."
"바스툴 왕국에서 윈스톤 경을 찾았을 때, 선우가 그에게는 충성을 바칠 주군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그의 주군이 되라고 말하였잖은가?"
기사가 충성을 바친다는 건, 결국 주군에게 의탁하는 것과 동일하다.
당시 윈스톤이 원했던 건 기사로서의 명예 같은 게 아니라, 믿고 따를 수 있는 주군의 존재였다.
그가 바랐던 건 결국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 받는 인정이었던 거다.
'잠깐만. 그럼 나는 세르펜스에게 윈스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서, 그가 우리와 함께 싸워 나가도록 구슬리게 시킨 셈인가?'
문제는 세르펜스의 이해력이 아니라, 내 교육 과정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