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93화 (393/925)

393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8)

"어, 그러니까 그게···. 하, 하긴 했는데···."

"했는데?"

세르펜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끝말을 따라 했다.

마주 본 녹색 눈동자 가득 내 모습이 비쳤다. 오직 부모님만이 세상 전부라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눈빛이다.

이 녀석이 진짜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이런 간절한 눈빛으로 제 부모를 올려다봤겠지.

'깨끗한 백지상태였다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종이를 뒤집었지만, 전대 공작이 남긴 그릇된 교육의 흔적이 고스란히 비쳐서. 내가 써 내려가는 글을 자꾸만 가리고 왜곡했다.

'자꾸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마음이 무겁다.

내가 잘못을 해놓고 세르펜스의 과거를 탓하며, 녀석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선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졌는지 세르펜스가 훌쩍거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녀석의 표정에 불안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흔들리면 세르펜스는 더욱 크게 흔들렸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아직도 서툴고, 세르펜스는 과거로부터 미처 벗어나지 못했어.'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내가 서툴다는 건 이전에도 반성한 적 있지만, 고작 반성 한번 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으면서 '짜잔-!' 하고 각성하는 건, 소설 속 주인공의 무력이 강해질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들조차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는 수없이 부딪히고 좌절한다.

'나 자신의 서투름을 부정하는 순간, 자기 과신에 빠지게 될 테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세르펜스에게 가겠지.'

나는 세르펜스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아이답게 잘 웃고, 잘 울고. 욕심도 부리고, 때로는 토라지면서 불만을 말하기도 하고.

순수한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방심했던 거다.

세르펜스는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과거를 지운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르펜스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혹은 룩스메아가 [성검의 주인]에 해당하는 시간을 날려버린 것처럼, 과거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는 이상.

하지만 그런 과거도 전부 세르펜스의 한 부분이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는 거고, 과거를 부정한다면 결국 세르펜스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세르펜스는 더욱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될 테고, 자존감은 계속해서 곤두박질칠 뿐이다.

내가 아무리 세르펜스에게 '이러면 안 돼요, 하지 마세요.' 말한다 한들. 녀석의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는 것 또한 아니다.

다만, 그 행동이 왜 나쁜지 알게 돼서 하지 않게 될 뿐이다.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부분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바로잡아야 한다.

아무리 아쉽고 안타깝다 하더라도. 전부 품에 안고, 받아들여야 한다.

"후우─."

나는 긴 심호흡을 내뱉었다.

생각의 방향이 잡히고 머리가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자, 세르펜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녀석의 말에 홀려서 넘어갈 뻔했다.

"윈스톤이랑 베일은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뭐가, 훌쩍···.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세르펜스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코를 훌쩍거렸다.

울음은 거의 그친 주제에 눈물을 닦아내려 시도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다. 하지만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리광이기도 했다.

나는 녀석의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거라고는 점을 닦았던 손수건뿐이다.

'···아, 맞다! 내 손수건은 조끼 안주머니랑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놨었지?!'

얼마 전에는 잠옷 차림이라 옷 소매로 대충 닦아준 게 마음에 걸려, 잠옷 주머니에도 손수건을 챙겨 놨더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고 다녀야지 안 되겠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세르펜스의 안주머니를 본격적으로 뒤져보았다. 하지만 잡히는 게 없다.

점을 닦은 것과 유지스가 가져간 게 전부인가 보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옷을 이 정도로 껴입었으면, 손수건도 그만큼 챙겨 들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앞으로는 그리하겠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더 많이 챙기죠, 뭐."

나는 점을 닦았던 손수건을 뒤집어서 곱게 접은 후, 녀석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잉크가 묻어나는 일 없이 깨끗하게 잘 닦였다.

진작 이럴 걸 그랬다.

고작 점 세 개 닦은 게 뭐가 대수라고 헛짓거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윈스톤은 악숭이들 때문에 투기장에서 온갖 고생을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악숭 세력은 원래 윈스톤의 적이자 원수인 겁니다."

"사람 옷을 이렇게 헤쳐 놓고, 그냥 '아무튼'으로 끝내는 건가?"

"세르펜스는 눈물 하나 못 닦는 어린아이지만, 옷은 저보다 잘 입잖아요. 그러니 그 정도는 알아서 하세요. 눈물 닦아줬으면 됐지, 뭘 자꾸 해달라 합니까? 이러다 화장실 갔다 와서 뒤도 닦아 달라 하겠네!"

"······!"

내 말에 세르펜스가 질겁하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스스로 고쳤다.

조금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끝내주게 좋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흐를 둥 말 둥 했던 눈물이 쏙 들어간 데다가, 내게 응석을 부리느라 가련한 척하던 표정까지 싹 사라졌다.

단점이 있다면 단 하나. 녀석이 내 말을 진심이라고 여기는 듯하다는 것이다.

세르펜스가 '선우라면 그러고도 남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의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아도르가 아직 아기로 남고 싶다 한들, 화장실 뒤처리 방법까지 아기의 방식을 따르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비비의 멘탈도 장난이 아닌데?'

시온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정신력도 강해지고, 매우 뻔뻔하게 자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은 그만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라."

세르펜스가 냉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눈가와 코끝이 붉어지지만 않았다면, 방금까지 울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을 얼굴이다.

"아, 예···. 그게 그러니까, 우리가 윈스톤을 구하기만 하고 내버려 뒀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혼자 악숭이들과 싸운다고 난리를 치다가, 놈들에게 잡혀서 악마의 그릇이 됐든 흑마법으로 세뇌를 당하든. 분명 몹쓸 짓을 당했겠죠."

"그렇게 따지자면 바스툴 2왕자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가만히 뒀으면, 악마 숭배자들에게 이용당했을 거다."

"그럴 가능성은 우리가 베일을 데려왔을 때 이미 사라졌죠."

"음···."

세르펜스가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녀석도 알고 있었던 거다. 베일이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길을 자신이 가려버렸다는 것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공동의 적과 함께 싸우는 것. 그리고 도망이라는 선택이 남아있는 사람의 눈을 가려, 외길만 보게 한 것. 그게 정말로 똑같다고 생각하세요?"

"······."

"뭐, 대륙을 위해서라면 베일이 왕위에 오르는 게 좋긴 하죠. 베일도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죄책과 후회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고요."

"그렇다면 문제없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걸 다행이라 여길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베일이 직접 왕위에 오른다는 선택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훗날 과거를 돌이켜 보며, '그때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사람은 자신이 직접 판단하여 선택한 일에 너그러워지기 쉬우니까.

심지어 본인이 고른 길이 '옳은' 길이라면 더더욱.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지워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남에 의해 강요된 길이라면, 조금만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도 쉽게 짜증이 나고 후회가 몰려드는 법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길을 강요한 자에게 얽매이게 될 거다. 오로지 그 사람의 인정만이 유일한 보상이 될 테니까.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떠밀려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세르펜스는 잘 알잖아요."

"아···."

세르펜스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흘렸다.

살짝 벌어진 입과 크게 뜬 두 눈이. 세르펜스가 지금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여줬다.

정말로 녀석은 자각 없이 베일을 몰아갔던 거다.

베일이 느낄 부담감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느꼈던 안정감만을 떠올리며.

그렇게 그를 위로하고 보듬는 말을 해주며, 자신이 바라는 길을 명시하여, 그 길을 향해 나아가라 부추겼던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르펜스는 베일을 걱정하고 있긴 합니까? 진심으로 그가 잘 되길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베일에게 잘 대해주고 있을 뿐 아닙니까?"

내 물음에도 세르펜스의 입술은 열릴 줄 몰랐다.

"몰아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한데, 한 가지만 확실히 해 둡시다. 베일이 이용당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해 놓고. 그 이후에는 어쩔 생각이셨습니까? 제국으로 돌아올 거잖습니까? 끽해봐야 관리 차원에서 가끔 편지 몇 통 보내면서, 나중에 찾아가겠다 하는 게 다겠죠."

"······."

"한낱 짐승을 거둬다 길들여도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멀쩡한 사람의 자유 의지를 꺾어놓고.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냥 내버릴 생각이었잖아요."

"으, 으읏···."

기껏 멈춰놨던 울음이 다시 터졌다.

다시 개소리해서 그치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녀석의 손에 손수건만 쥐여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자신의 눈물을 스스로 닦지 않았다.

"지금 세르펜스는 왜 울고 있는 겁니까?"

"내가···, 흐윽···. 잘못해서···."

"미리 말해두겠는데, 저는 지금 화난 게 아닙니다. 세르펜스에게 실망···은 잠깐 했지만. 그건 제가 세르펜스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 괴리감에서 온 실망이지, 세르펜스의 탓이 아닙니다."

"내가···. 그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흡···! 실망했나?"

"아뇨, 아뇨. 그냥 저 자신을 너무 맹신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짧게 반성했습니다."

"선우는 잘못이···, 흐읏! 없는데···."

허구한 날 나에게 옆길로 샌다고 뭐라고 하더니. 얘도 묘하게 옆길로 잘 샌다.

"저도 잘 압니다. 저도 잘못이 없고, 세르펜스도 잘못한 게 없···진 않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의 엇갈림으로 인한 사고라고 치죠."

"정말···. 그렇게 넘어가 주는, 흑! 건가?"

"일단은요. 하지만 똑같은 행동을 또 한다면, 그땐 정말로 화낼 겁니다."

내 말에 세르펜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넘어가 주겠다는 말이 어지간히도 믿기지 않는가 보다.

"세르펜스가 베일에게 협박한 것도 아니고, 강압적으로 군 것도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회유라면 회유에 가까웠죠. 하지만 저는 세르펜스가 남에게 그런 식으로 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이유를 제가 아니라, 세르펜스의 안에서 찾았으면 합니다."

"그게···, 흣, 무스은···?"

"세르펜스가 지금 우는 이유 말입니다. 어째서 제 말에 세르펜스가 놀랐고, 울음까지 터트린 것인지. 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잘 모르겠다. 흐읍···. 그냥 선우가, 알려주면 안 되는··· 건가?"

세르펜스가 생각에 잠기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내게 매달리듯 물었다.

내 가르침을 멋대로 곡해하여 베일을 구슬린 것처럼. 자신이 내린 결론이 틀린 답안일까 봐. 그래서 지레 겁을 먹은 듯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