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12)
"네, 알고 있습니다. 재작년 드러난 투기장 사건과 연결된 범죄잖습니까?"
괜스레 책꽂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세르펜스가 몸을 돌려, 우리 쪽을 보며 대답했다.
평소라면 내 옆자리를 선점하듯 냉큼 앉았을 테지만, 어젯밤 일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납치된 사람들은 투기장으로 보내져, 악마 숭배자들이 만든 약물로 고통받다가 사람들의 유희 거리로 소비되었다 들었습니다. 원인을 따지자면 악마 숭배자들에게 있으나, 그곳의 영주가 납치극과 불법 투기장의 존재를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기도 합니다."
세르펜스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더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관 프레이'의 설정값 때문이다.
그런 표정과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세르펜스는 어딘지 모르게 울적해 보였다.
'겉으로는 무심해도 속마음은 따스한 신관님' 같은 복잡한 설정은 아니고, 그냥 세르펜스의 기분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세르펜스와는 반대로, 윈스톤은 분노로 끓어올랐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긴 설명 따위는 없었다.
고작 한 마디에 불과했으나, 그 속에 꾹꾹 눌러 담긴 분노를 전달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굳건히 다져진 전의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런 윈스톤을 보며, 베일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괜한 소리를 꺼냈나?'
그래도 이 정도 충격은 줘야, 베일이 진짜 적을 인식할 수 있을 테다. 세르펜스를 두고 나와 줄다리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윈스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다, 다들 알고 계셨군요. 투기장 사건은 저도 듣긴 했는데, 그 수법까지는···."
어색한 분위기가 날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침체되어 버리자, 에드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웅얼웅얼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런 자세한 얘기까지는 모를 수도 있죠, '일반인'들은 말입니다. 하지만 신관님은 어엿한 신관님이잖아요? 제가 신관님 급이었을 때는 말이죠, 악마 숭배자와 관련된 정보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죄다 머릿속에 때려 박았어요."
"······."
내 딴에는 풍자와 해학을 섞어 농담한 거였는데 에드나가 듣기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난데없이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직도 책꽂이 근처를 서성거리던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그러할 게 에드나가 앉은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니다.
세르펜스를 위해 비워뒀던, 나와 유지스 사이의 빈자리였다. 에드나는 자신도 모르게 세르펜스의 자리를 뺏어버린 셈이다.
그런 놀라운 짓을 저지르고도 모자랐는지, 에드나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나에게 바짝 붙었다.
그 행동에 세르펜스가 더욱 분해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도청당하고 있는 건가요?"
에드나가 소곤거리며 내게 귓속말했다.
귀신이 씻나락 까먹다 말고 사레들려 기침하는 소리가 따로 없다.
"도청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이단 심문관님, 우리 도청당하고 있어요?"
"네에?! 글쎄요, 저는 모르겠어요. 프레이 신관님, 뭔가 감지되는 게 있나요?"
"없습니다."
세르펜스가 나와 유지스의 호들갑을 일축해 버렸다.
"아, 그냥 다들 즐기고 계신 거였구나···."
드디어 에드나가 상황을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참 오래도 걸렸다.
감시가 없다는 걸 깨달은 에드나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 느긋한 모습에 나는 의문이 떠올랐다.
"계속 여기 앉아계시려고요?"
"그러면 안 돼요?"
에드나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하아, 숨을 뱉어본 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필이면 방금 막 귓속말을 한 뒤라서, 입 냄새가 나니 꺼지라는 말을 돌려 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정말 오해였다.
"다른 게 아니라, 그 자리는 막내 신관님 자리라서요."
"지정석 같은 게 있어요?"
"없지만 있습니다."
"없는 건지 있는 건지, 확실하게 해주실래요?"
"원래 막내는 항상 높은 사람 옆자리에 앉아서, 수발을 들어야 하는 법입니다."
"어휴, 꼰대."
에드나가 '정말 저러고 싶을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본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지가 깎여나간 기분이 들었지만 괜찮다. 내가 아닌 에인젤 주교의 이미지가 깎인 거니까.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며, 나는 세르펜스에게 손짓했다.
"막내 신관님, 이리 가까이 좀 와 봐요."
내 부름에 세르펜스가 쪼르르 다가와, 냉큼 자신의 지정석에 앉았다. 앞으로는 결코 그 자리를 뺏기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것처럼.
"네, 하명하십시오."
"입이 심심해서 간식을 먹을까 하는데, 쿠키만 먹기는 좀 그렇네요."
세르펜스의 눈이 커졌다. 내 말이 화해를 청하는 손길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칠쏘냐,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차를 내오겠습니다."
"아 참. 저쪽 신관님은 커피를 좋아하시니, 커피도 한 잔···."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에드나가 내 말을 가로채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녀에게 사양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고로 꼰대라면 짬뽕을 먹고 싶어 하는 부하 직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짜장면으로 통일하는 만행을 저지를 줄 알아야 한다.
"커피는 됐고, 직원에게 부탁해서 각설탕이랑 우유도 같이 준비해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인 후 부지런히 움직여 차를 탔다.
직원에게 부탁하는 김에, 차를 내어달라는 부탁도 같이하면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그만두란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세르펜스는 각설탕과 우유를 받으러 뒤 칸으로 넘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윈스톤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냥 이런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에게 묻는 말임에도 평소에 쓰던 하오체가 아닌 극존칭이었다. 성기사 오르덴의 설정에 맞춘 것이다.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알아서 설정값을 준수하는 모습이 일루미나티의 단원으로서 손색이 없다.
유지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뭐가요?"
"어젯밤, 주교님께서 제게 물으셨던 '좋은 방법' 없느냐는 질문의 답이었습니다."
내가 자꾸 세르펜스를 함부로 대하니까 베일이 오해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반박할 여지 없는 예리한 지적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이럴수록 베일이 나를 더 이상하게 볼 거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베일의 오해를 푸는 것보다, 세르펜스와의 관계를 복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
세르펜스를 지금 상태로 가만히 놔두면 끊임없이 자책하다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최악에는 자고 일어났더니 본래 세계에서 눈을 뜨는 어이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막내 신관님은 저에게 부려지는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 설정입니다."
"···상호 합의가 된 사항입니까?"
"암묵적으로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께서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거라고 믿···겠습니다."
윈스톤이 감정이 메마른 듯한 표정으로, 믿겠다는 말을 믿고 싶다는 말처럼 했다.
공작이 보좌관에게 부려질 리 없다는 고정관념이 어쩌고 하며 변명 같은 설명하려는 찰나. 세르펜스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윈스톤에게는 합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실은 즉석에서 떠올린 설정이기 때문이다.
세르펜스가 다 우러난 차를 찻잔에 따랐고, 그동안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냈다.
오늘 꺼내든 쿠키는 '랑그 드 샤'로 고양이 혀 모양을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들었다.
실제로 닮은 건 쥐뿔도 모르겠고, 그냥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사봤다.
박스를 열어보니 쿠키는 무려 개별 포장이 되어있었다.
개별 포장의 속뜻은 '비싸고 부서지기 쉬우며, 달아서 한 번에 많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곧, 세르펜스의 입맛에 아주 잘 맞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디 보자~. 쿠키가 서른 개인데 사람이 여섯이니, 다섯 개씩 나누면 딱 맞긴 한데. 큰 성기사님은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제 몫은 고생한 프레이 님께 주십시오."
세 개만 가로챌 생각이었는데, 윈스톤이 알아서 다섯 개를 전부 세르펜스에게 양보했다.
과연 그는 충성심이 뛰어난 기사였다. 나라면 맛이 궁금해서라도, 하나는 남겨달라 했을 텐데.
"크으~, 역시 우리 큰 성기사님은 가슴이 참 넓으십니다!"
"주교님. 그런 말투는 꼰대라기보다는 뒷골목 무뢰배 같으니, 고쳐주십시오."
"······."
살다 살다 윈스톤에게 설정 오류를 지적당할 줄은 몰랐다.
분했지만 일리가 있는 충언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쿠키를 분배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막내 신관님은 오늘부터 단것에 환장한다는 거로 합시다. 쿨하고 도도하지만, 사실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의외의 면이 있다는 설정이죠."
세르펜스 몫으로 쿠키 10개를 세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전적으로 세르펜스의 편의를 위한 설정이다.
나 자신의 뛰어난 지략에 속으로 감탄하는데, 에드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용···, 아니. 프레이 님은 원래 단 걸 좋아하시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제까지는 좀 긴가민가했는데, 저번에 퐁듀 먹을 때 보고 알았죠. 초콜릿을 그렇게 무식하게···. 아, 죄송해요. 아무튼 그렇게 묻혀 먹는데, 모르는 사람이 바보죠."
에드나의 말은 매우 타당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세르펜스의 얼굴을 보았다. 새하얀 피부가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민망한가 보다.
이런 세르펜스의 모습을 베일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그는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세르펜스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모양이다.
에드나가 말한 바보는 멀리 있지 않았다.
"···이거 비밀이었어요?"
확인사살을 가하는 에드나의 말에 세르펜스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에드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자신 몫의 쿠키 중 두 개를 세르펜스의 앞에 놓았다.
세르펜스는 무식하게 초콜릿을 묻혀 먹었다는 표현이 부끄러워, 늘어난 자신의 몫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붉게 물들인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세르펜스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녀석이 저렇게 부끄러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흐뭇한 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소하다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나는 최근 세르펜스의 행동에 유감스러운 감정을 품고 있었나 보다.
"우리 막내 신관님은 과자를 나눠주는 착한 형, 누나가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나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세르펜스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