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99화 (399/925)

399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14)

"제 것도 드십시오."

세르펜스가 내 쿠키를 받아먹자, 베일이 자신 몫의 쿠키를 세르펜스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

베일은 내가 주는 간식을 반기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먹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먹기 싫었던 쿠키를 처리하면서, 세르펜스에게 점수까지 딸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생겼으니. 놓치고 싶지 않을 만도 했다.

'내가 베일처럼 굶었다면, 반작용으로 엄청난 폭식을 했을 텐데···. 원래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하나?'

등장인물의 식습관에 관한 건 [성검의 주인]에 언급되지 않아서,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르펜스가 저 쿠키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니까, 베일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기로 했다.

"막내 신관님의 오늘치 간식은 이미 상한선에 다다랐습니다. 방금 제가 준 걸 포함해 열세 개나 된다고요! 아무리 작은 쿠키라지만, 얕잡아보면 안 됩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저녁이 잘 안 넘어갈 뿐만 아니라, 영양 불균형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손을 뻗어 쿠키를 든 베일의 손을 밀어내자, 베일이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마를 대로 말라서 볼이 움푹 꺼진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니 정말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정신이 건강하려면, 먼저 몸이 건강해야 하는 법인데···.'

자고로 속이 든든해야 마음에 평화와 여유가 찾아오는 법이다.

저렇게 말랐는데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별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나처럼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신경질을 내게 되고. 그러고 났더니 힘들어서 기댈 곳을 찾게 되고, 뭐 그런 거지.'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이로써 베일을 살찌워야 할 이유가 늘었다.

몸 건강과 정신 건강,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베일은 더 먹어야 한다.

"그렇게 빼빼 말라서, 지금 누가 누구에게 먹을 걸 양보한다는 겁니까? 아이고, 완전히 뼈만 남아서 사람이 갑옷을 입은 건지, 갑옷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건지. 어느 쪽이 주체인지 모르겠네! 작은 성기사님이나 많이 드시고, 큰 성기사님만큼 무럭무럭 자라나세요!"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다 드세요. 이것까지 다! 무조건 드셔야 합니다, 무조건!"

나는 내 몫으로 남은 쿠키 세 개를 전부 베일의 앞에 가져다 놓으며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이런 내 행동이 강압적으로 느껴졌는지, 베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누가 이런 걸 먹고 싶다 했는가? 제발 좀 내버려 두게!"

베일이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설정조차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쿠키를 집어 던지지 않은 건, 앞서 세르펜스가 쿠키를 좋아한다는 걸 밝혔기 때문이리라.

한 줄기의 인내심이 겨우겨우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베일은 몹시 화가 나 보였다.

'꼰대 설정은 잠깐 제쳐놓고, 상냥하게 말했어야 했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베일의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나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주리라 믿었는데. 실상은 조금도 그렇지 못했다.

세르펜스에게 과자를 주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본인 몸을 챙기라는 게 지나친 간섭으로 느껴졌던 걸까?

"진정하십시오, 렉스 님."

놀라서 입이 붙어버린 나를 대신해서 세르펜스가 베일의 가명을 부르며 그를 진정시켰다.

베일은 차마 세르펜스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어찌나 힘껏 다물었는지 으득, 이 가는 소리마저 들렸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세르펜스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게 밝혀졌으니. 퐁듀 분수의 진실도 밝혀졌고, 오해도 풀린 줄 알았다.

모든 오해가 다 풀린 건 아니겠지만.

'사실 시온 경은 상사를 위해 지갑을 털어 퐁듀 분수를 두 개나 살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구나!'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내가 시온 경에 대해 잘못 생각했나?'라는 의구심 정도는 심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고 나면 차근히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믿음일 뿐이었다.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꼬여있었다.

한 번 싫어진 사람이 의외의 면모를 보인다고 해서, 바로 마음이 풀릴 리가 없다는 걸 간과했다.

"저는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건데···."

나도 모르게 아쉬움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맥이 탁 풀린 탓에, 힘이 없고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 나를 베일이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식으로 나를 악역으로 몰아갈 생각이지? 다 알아!'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다.

'누굴 세르펜스로 아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슬금슬금 차오르던 분노 게이지가 한꺼번에 날아간 듯했다.

나는 입을 열기 전에, 우선 옆에 앉은 세르펜스의 발치를 툭 하고 건드렸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세르펜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여기서 녀석이 화를 내면 상황이 더 꼬여 버린다.

"자꾸 그렇게 안 드시니까, 화가 많아지는 겁니다. 그게 다 당분이 부족해져서 그래요. 저를 싫어하는 건 상관없지만, 간식은 전부 드세요. 그러고 나서, 진정되고 나면 그때 화를 내든 소리를 지르든 하시죠?"

"······."

베일이 나를 노려보다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세르펜스가 미간을 찌푸린 것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고개까지 돌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도 베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유지스는 나와 베일의 불화에 심각성을 느껴 얼굴을 굳힌 채였고, 윈스톤은 베일을 경계하는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에드나는 베일이 왜 화를 낸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베일도 나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데, 한 명 정도는 저쪽 편 좀 들어주지···? 이러면 내가 진짜 흑막 같잖아.'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낸다면, 나는 베일에게 정말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놈으로 각인될 것이다.

이미 90퍼센트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지만, 100퍼센트까지 채우고 싶진 않다.

사방이 막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베일은 싸늘한 시선들을 받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울음과 울분이 마구 뒤섞인 듯한 감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베일은 쿠키 여덟 개를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구석진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 * *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다과회가 끝나고 시간이 꽤 흘렀다.

침대로 기어들어간 베일은 그대로 잠든 건지 조용했다.

'베일을 챙기자니, 세르펜스가 서운해하고. 세르펜스를 챙기고 있으면 베일이 나를 간사한 사람 보듯 하고···. 진짜 미치겠네!'

갑갑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럴 땐 몸이라도 편해야, 머리가 굴러가는 법이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눕힐 장소를 찾았다.

특실에 기본 배치된 침대의 수는 네 개였으나, 교단 측에서 미리 얘기해둔 것인지 여섯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저 끄트머리에는 베일이 누워있으니까···. 이쪽부터 에드나, 유지스, 세르펜스, 나, 윈스톤 순으로 누우면 되려나?'

베일과 내 자리가 너무 가까운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윈스톤이라면 훌륭한 장벽이 되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계산을 마친 후, 나는 내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때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주교님, 일어나십시오. 체력 단련할 시간입니다."

윈스톤이 가당찮은 소리를 해댔다.

말이 좋아 체력 단련 시간이지, 내게 근력 운동을 시키겠다는 말이었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저는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입니다! 그런데 체력 단련이 웬 말입니까?!"

내 대답에 윈스톤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주교님께서는 그러니까···. 교단 내에서 촉망받는 유망주로 꽤 중요한 인물인 데다가, 요즘에는 악마 숭배 세력 때문에 여러모로 위험한 시기라, 호신을 위해 수련을 시작했다는 거로 합시다."

남들이 짠 설정값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던 윈스톤이 스스로 설정을 짜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렇게 짠 설정을 나에게 주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윈스톤 또한 유자 과즙에 물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에드나는 윈스톤을 바라보며,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격하게 공감하는 바다.

'대체 얼마나 나를 운동시키고 싶은 거야?'

구석에서 혼자 근력 운동을 하기 부끄러워서, 나를 핑계로 삼는 건 아닐지 의심스럽다.

만일 앞에 거울이 있었다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는 내 얼굴을 마주했을 거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바스툴 왕국으로 좌천시킬 리 없잖습니까?"

"그건···."

내 반박에 윈스톤이 말을 잃었다. 설정을 짜보는 게 처음인지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설정 꿈나무의 싹을 짓밟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탄탄하지 못한 설정은 언젠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법이다.

결단코 내가 빈둥거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슬그머니 입가에 떠오른 승리의 미소를 감추려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는 바로 그때.

누군가가 이불을 걷어냈다.

"그건 교황 성하께서 에인젤 주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르펜스가 침대 위에 드러누운 나를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

아차 싶었다. 세르펜스 또한 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 중 하나였음을 간과했다.

"오르덴 님의 말씀대로 이런 시기에 새로운 신전을 세우는 건 위험합니다. 신전 설립 계획이 차차 진행되어가면, 어떤 식으로든 악마 숭배 세력의 견제가 들어올 겁니다. 하지만 대륙과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성하께서는 그 시작을 주교님께 맡기신 겁니다."

아부성이 짙게 배어든 발언을 세르펜스는 무표정한 얼굴과 담백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나는 내가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이라도 듣고 있는 줄 알았다.

콧대 높고 도도한 설정의 막내 신관님이 무덤덤하게 아부를 하다니.

이런 건 캐릭터 붕괴라 해야 하나, 설정 붕괴라 해야 하나? 어쩌면 사회생활의 쓴맛을 제대로 겪은 막내의 고충을 반영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가 차서 '하핫!' 하고 헛웃음이 다 나왔다.

"에인젤 주교님도 참, 가만 보면 시니컬하신 면이 있다니까요? 에인젤 주교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주교님께서 뛰어나신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유지스까지 설정 보태기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멘트로 인해, 세르펜스의 말은 아첨이 아닌 진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남들은 다 인정하는 사실인데, 자신만 본인이 뛰어남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모처럼 멋들어진 검도 생겼는데, 제대로 활용할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유지스가 내 허리춤에 걸린 세니어를 보며 말했다.

중2스러운 설정에 오그라들어, 주먹을 꽉 쥔 내 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가 보다.

"이건 그냥 예식용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장신구라고도 하죠!"

"주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검에 박힌 신성석을 제공한 누군가가 몹시 슬퍼할 거랍니다."

설정 놀이에 갑자기 실정(實情)을 들고 오다니. 입에서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짜로 내가 세니어를 예식용이나 장신구라 생각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 또한 설정에 묶인 몸이었으니까.

그 대신 잔뜩 긴장하며 세르펜스의 표정을 살폈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런 담담한 행동이 오히려 괜찮지 않아 보였다.

"주교님께서 제 성의를 무시한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면, 앞의 말은 붙이지 말았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심정으로 윈스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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