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15)
"우선 이걸 손목과 발목에 차십시오."
윈스톤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긴 했는데, 묵직한 무게 탓에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이건 설마···! 그 유명한 모래주머니가 아닙니까! 평상시에 차고 다니다가, 중요한 전투 전에 휙 던지면 쿵! 하고 떨어져서, 갑자기 파워 업 하는 그거잖아요?!"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듣고 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모래주머니라는 건 맞습니다."
그 외의 말은 다 틀렸다는 소리다.
"너무 오래 끼고 있으면 관절에 무리가 갈 테니 추천해 드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해도 신성력으로 치료받···. 치료하실 수 있으니까, 평상시에도 착용하고 싶으시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아뇨! 됐습니다! 신성력을 그런 곳에다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순간의 멋짐을 위해 온종일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고 싶진 않다. 불편한 것도 불편한 거지만, 힘든 건 더욱 질색이다.
'그건 그렇고 치료받는다는 말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로 고치다니, 윈스톤도 제법인데?'
후학을 양성하는 선배의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세르펜스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흐뭇함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모래주머니를 챙겨 들고 다니며 설정 놀이까지 맞춰 주는데, 체력 단련쯤은 얼마든지 응해줄 수 있다.
하물며 그 이유가 내 건강을 위해서였으니. 귀찮음 따위가 대수랴 싶다.
나는 윈스톤이 건네준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차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래, 마침 잘 됐어. 우울할 땐 운동 만한 게 없다잖아?'
운동은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에 비하면 기분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억지로 한다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받아들여야겠다.
원래 좋고 나쁨은 생각하기 나름이라 했던가?
그렇게 마음먹고 났더니 어쩐지 기운이 샘솟았다.
베일에게도 같이 하자고 권하고 싶었으나, 아까 전의 말다툼 때문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억지로 권해 봤자 나를 향한 적대감만 커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왼손목에 모래주머니를 차면서, 베일이 누워있는 침대에 슬쩍 시선을 두었다.
그의 앙상한 몸집 이상으로 이불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갑옷도 벗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탓이다.
성기사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게 앙상히 마른 몸을 가리기 위함이라지만, 어차피 이 칸에 승무원이 들어오는 건 식사를 가져올 때뿐이다.
'그때만 화장실에 숨어 있어도 될 텐데···.'
고집이 완전 황소고집이다.
저러다 밤에 잘 때도 갑옷을 입고 자는 게 아닐지 걱정스럽다.
"다 착용하셨으면,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그런 건 모래주머니를 차기 전에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모래주머니를 차고 스트레칭을 하면 근력 운동 효과도 함께 얻을 수 있습니다."
윈스톤의 입에서 몸을 망치기 딱 좋은 하드 트레이닝 설명이 튀어나왔다. 현대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그딴 짓을 하면 부상의 위험만 커질 뿐 아닌가?
신성력과 오러 같은 게 존재하다 보니, 현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운동 방법이 존재하나 보다.
'그런데 휙, 쿵은 왜 안 되는 거냐고!'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목 근육을 풀기 위해 고개를 이쪽저쪽 돌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히 눈에 들어왔다.
유지스와 세르펜스는 설정에 충실하게 성서를 펼쳐 들었고, 에드나는 운동하는 나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신관님은 뭐 할 거 없어요?"
"평소라면 마법 서적을 읽었을 테지만···. 그래도 돼요?"
에드나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허리를 빙빙 돌리며 고민에 빠졌다.
'같이 운동하자고 권해 볼까?'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체력이 붙으면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되긴 할 거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 실력은 아직 성장 단계다. 벽에 다다라 깨달음이 필요하거나, 지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면 모를까.
지금은 마법 수련을 하는 게 그녀에게도. 그리고 전력상으로도 이롭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며언···, 백번 싸워도오-! 위태롭지 않은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관님께서느은···! 마법을 공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아-!"
"멋진 말이긴 한데···. 아무튼 고마워요."
내가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히길 반복하며 설정을 부여하자, 에드나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어째서일까?
아기를 달래며 자기소개를 했을 때,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분위기 잡지 말라고 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모르는 척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무릎이 직각이 되도록 앉았다. 그 상태로 양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비트는 순간.
- 철그렁.
어디선가 쇠붙이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윈스톤과 베일 뿐이다.
그런데 윈스톤은 팔짱 낀 자세로 가만히 서서 나를 감독 중이었으므로, 소리의 발생지는 베일이라는 뜻이 된다.
죽은 듯이 이불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던 베일이 좀비처럼 부스스 일어났다. 하얗게 뜨다 못해 푸른빛이 돌만치 창백해진 얼굴 탓에 더욱 시체처럼 보였다.
그는 무언가 꾹 참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는 게 힘겨워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방향을 봐서는 화장실 쪽 같은데···.'
자꾸 베일의 손이 위로 올라가려는 듯 움찔움찔 거리다가, 도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돌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허겁지겁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그러려 했지만 세 걸음도 채 못 가서 무릎이라도 꿇는 듯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웩-.' 하고 속을 게워냈다.
"헉!"
나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켜며, 쓰러진 베일에게로 향했다.
무거운 모래주머니 탓에 걸음이 더뎌졌다. 차라리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괜찮으세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장 먼저 베일의 곁에 도착한 사람은 유지스였는데, 베일은 자신의 등을 토닥여 주는 유지스의 손을 반사적으로 쳐내려 했다.
유지스가 다가가서 저 정도인데, 내가 가까이 갔으면 더 했겠지.
단단한 금속을 두른 채 휘둘러지는 베일의 팔을 막아낸 건 세르펜스였다.
자신의 팔을 붙잡은 세르펜스의 손을 보고 나서야, 베일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했던 모양이다.
세르펜스는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버릇처럼 다정한 걱정과 위로 섞인 말을 하려다가, 더는 베일을 현혹하지 말라던 내 경고를 떠올린 것이다.
그 탓에 베일은 입을 꽉 다문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르펜스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베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설정극은 중단입니다."
내가 거치적거리는 모래주머니들을 풀어 던지며 말하자, 에드나가 소매에서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신속하게 그려진 마법진은 바람이 되어 베일을 휘감고 바닥까지 쓸고 난 후, 더러운 토사물과 함께 사라졌다.
암흑가에서 아니마가 나와 윈스톤에게 써줬던 것과 똑같은 마법이다.
"후우···."
세르펜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베일을 부축하여 침대에 도로 눕혔고, 두 사람의 뒤를 유지스가 종종걸음으로 바짝 쫓았다.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유지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나다 못해 뚝뚝 흘러넘쳤다.
베일이 혼란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베일의 침대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누군가 내 옆에 서는 기척이 느껴졌는데, 곁눈질로 확인해 보니 에드나였다. 이제 스태프는 치워도 될 텐데도, 그녀는 양손으로 그것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까 베일에게 눈치를 줬던 게 미안해진 걸 테다.
"···그냥 쿠키를 급하게 먹어서 체한 것뿐입니다."
유지스가 질문을 마치고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야 베일의 입이 열렸다.
오래 뜸을 들이다가 흘러나온 목소리는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듯했다.
목소리가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레일 소리에도 묻힐 뻔했다.
"일단 저 갑옷부터 어떻게 하죠."
"그 전에 속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베일의 갑옷을 벗기자는 내 말에 세르펜스가 이견을 내놓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사람을 이리저리 뒤집으면 다시 토할 수도 있으니, 먼저 신성력으로 치료하겠다는 말이다.
베일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 없이 질려 있었다. 한 번 게워 낸 뒤라서 안색이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아, 안 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허둥지둥 베일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자신의 건재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에서 설득력을 찾는 것보다, 세르펜스가 잃어버린 나이를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강건한 갑옷을 둘렀다고 해서 베일의 앙상한 팔에 살과 근육이 붙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갑옷 무게만큼 부담만 늘어났다. 베일은 상체와 갑옷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휘청거렸다.
세르펜스가 그의 어깨를 잡고 다시 눕히지 않았더라면, 침대에서 떨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세르펜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 가지 묘한 점이 있다면, 신성력을 거부하는 베일의 행동에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력을 안 쓸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세르펜스는 베일의 동의도 받지 않고, 붙잡은 어깨를 통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잠시 후 세르펜스는 손을 거뒀다.
완전히 나았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베일의 상태가 확연하게 좋아진 것을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그랬던 거래요?"
"식도 내부에 손상이 있었습니다."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여전히 얼굴을 굳힌 채로 대답했다.
걱정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몸 상태를 알리지 않아 화가 난 설정으로 갈 생각인 듯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베일··· 저하께서 음식을 먹고 토한 게, 처음이 아니란 뜻입니까?"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여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예상했던 대로 세르펜스의 고개는 위아래로 움직였다.
"진작 알았으면 강제로 음식을 권하지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본관까지 와서 같이 식사하자고 말을 하지 않았을···. 아니, 우리 쪽에서 동쪽 별관에 가서 먹었어야 했나?"
환자를 몰아붙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냥 잘 먹이면 괜찮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한동안 못 먹고 지내다가, 갑자기 영양가 높은 음식들이 들어가서 그런 건가?"
"내장 기관의 문제라면 처음 저택에 오셨을 때 제가 치료해 뒀습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며 주절거린 혼잣말에, 세르펜스가 침대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알아요.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것저것 먹으라고 권한 겁니다. 그냥 답답해서 한 소리였어요."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답하자, 세르펜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