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22)
미안하다는 말은 결코 부끄럽거나 창피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으면서 자존심만 센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부끄러운 일처럼 여기곤 한다.
상대방의 신분이나 직책이 자기보다 낮거나, 언행 수준이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친다면 더더욱.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고, 용서를 구하는 건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
'바로 지금의 베일처럼.'
베일은 씩씩거리며 가만히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푹 숙여 투구 위에 이마를 얹었다.
금속 투구의 서늘한 온도가 머리에 오른 열을 식혀 주기라도 한 걸까?
"후우···, 또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네."
그가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다시금 사과했다.
비꼬거나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닌,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이었다.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처음부터 내게 사과할 요량으로 방을 같이 쓰자는 얘기를 꺼냈던 모양이다.
기차에 올랐던 첫째 날, 내게 짜증을 부리고 소리까지 질러댔으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과하기 민망할 만도 하다.
건강이 차츰 회복되면서 한껏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리고.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며, 부끄러워졌나 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베일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자꾸만 날을 세우는 베일의 태도에. 그리고 다른 문제들이 겹쳐서 점차 지쳐갔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며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벽을 세우고,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개선할 수 없을 거라고 땅땅 못 박아 버렸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댈 땐 언제고. 왜 갑자기 말이 없지?"
베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내게 물었다.
많이 뭉툭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모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셨으니, 이제는 '너도 나에게 사과해라.' 따위의 말이 나올 차례잖아요. 그걸 기다리고 있었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경도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나를 후안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실감이 잘 안 나서 그렇습니다!"
다시 2차전이 시작될 새라, 나는 손을 내저어가며 베일을 진정시켰다.
베일은 이런 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네. 나는 먼 타국의 왕자인 데다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사람이니···. 한심하게 여겨지고 무시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네만···."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고민하는 것과 회피하는 건 다르고, 회피한다 하더라도 그게 저하의 '잘못'은 아니죠!"
"말 끊지 말게나."
다정한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베일은 지지리도 단호하게 말했다.
세르펜스만큼 자존감이 바닥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막상막하다.
"아무튼. 나를 대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네. 다만 자네의 상관인 프라시더스 공작은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지 않나?"
상관없어서는 안 될 문제를 상관없다 말하는 베일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바스툴 왕국에서는 그랬나 봐요? 저하께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목소리를 내면, 다들 비웃고 무시하고."
"그런 건 지금 얘기와 상관이 없···."
"없긴 왜 없습니까? 그런 경험들 때문에, 제가 공작님을 친근하게 대하는 걸 불편해하시는 거면서."
왕의 눈 밖에 난 거로도 모자라, 배경조차 없는 왕자는 귀족들에게 조롱거리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고이다 못해 썩고, 온갖 폐단이 들끓는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 왔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러다 보니 세르펜스에게 함부로 대하는 내가 더 꼴 보기 싫었던 걸 테다.
'그런 나라에서 베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자긍심 덕분이려나? 지금은 그게 무너져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거고?'
바스툴 왕국에도 베일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긴 있을 거다. 예를 들어, 그가 도망갈 수 있도록 길을 뚫어준 기사들처럼.
그리고 그런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죄의식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허어···."
내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설을 이어나가는 동안. 할 말을 잃어버린 얼굴로 넋을 놓고 있던 베일이 끄집어내듯 헛숨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생각해온 거지만···. 자네,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제가요? 뭐가요?"
"공작을 대하는 자네의 태도는 친근한 게 아니라, 불경하고 무례한 것이네."
베일이 제 딴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가르치듯 말했다.
내가 세르펜스와 친구 먹었다는 걸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본인 입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건 상관없다고 말한 만큼. 베일과 나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진 건, 내가 세르펜스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리라.
그동안 베일의 오해가 더욱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았던 건데, 슬슬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상관을 대하는 예절로는 부족한 감이 있지만, 친구를 대하는 태도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친구?!"
친구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감히'의 대체어로 변해버린 걸까?
기겁하다시피 한껏 올라간 말꼬리와 불신 가득한 베일의 목소리가 친구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흐리고, 그 뜻을 새로 썼다.
어차피 단박에 내 말을 믿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나는 세르펜스와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줄줄이 풀어놓는 대신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시온은 저의 보좌관이긴 하지만, 그 전에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세르펜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숫접게 말했다.
이런 용도로 데려온 건 아니었건만. 유용하게 써먹을 데가 생겼다.
"저는 시온의 행동이 익숙하고 편해서, 이런 오해가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미리 말씀드렸을 텐데···. 으음···, 죄송합니다."
곤란하다는 듯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세르펜스는 무척이나 순진해 보였다.
오해가 생길 줄 뻔히 알면서. 그것을 부추기다 못해, 꼬아 놓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 녀석을 보며 베일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쩌다가···."
"제가 공작···, 아니. 세르펜스랑 친구라는데, '어쩌다가'라는 말이 왜 나옵니까?!"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소리에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잠시 출타했던 넋이 돌아왔는지, 베일이 '큼, 커흠! 으흠!' 하고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시온은 제가 가장 의지하고 존경하는 분입니다. 언행이 다소 가볍긴 해도, 그 내면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입니다. 저하께서도 이제는···, 아시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이라는 말은 붙일 수 없는 미소였다.
맛있는 음식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실수로 그것을 감싼 알루미늄 포일까지 먹어버린 듯한.
녀석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미묘한 거슬림을 눈치채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내 안전은 그냥 핑계고, 견제하러 온 거였구나?'
애정 결핍 성향이 있는 아이는 독점욕 또한 강한 법이다. 독점욕이 강하니 질투도 심해질 수밖에.
고쳐 나가야 할 문제였으나 무작정 그러지 말라고 혼낼 수도 없다.
세르펜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누군가를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기혐하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질투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다.
녀석의 정신은 아직도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렀지만, 머리는 다 큰 어른이다.
본인도 뭐가 문제인지 알고 있을 거다. 어디까지가 허용선인지, 그 경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을 터···.
'설마 그게 문제인가?'
이제는 욕구를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어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이 존재하기에.
그 존재를 모른다면 하나를 쥐고도 만족할 수 있을 텐데.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둘, 셋이 있다는 걸 알아서.
한껏 응석을 부리고 욕심을 내며 채워나가야 할 갈증을 채울 수가 없어서.
그래서 세르펜스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온은 한낱 예법 따위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하께서는 왕족이시니, 이런 시온의 행동이 적응되지 않고, 불편하실 만도 합니다. 하지만 정중한 말투로 타인을 헐뜯고, 기품있게 행동하며 뒤에서는 저속한 짓을 벌이는 자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시온은 선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런 솔직한 면이 시온의 장점이며···."
내가 자신을 보며 착잡한 생각을 이어나가는 중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르펜스는 나를 반쯤 기리다시피 하며, 내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베일에게 설명해 나갔다.
'얘는 대체 왜 1절에서 끝나지가 않아?!'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듯. 자신만 알고 싶었던 건데, 마지못해 알려준다는 듯.
말하는 사이사이. 잠깐씩 숨을 돌리며 입이 다물릴 때마다, 세르펜스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모였다.
이간질할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거 완전 어떻게 세르펜스를 구워삶은 거냐는 눈빛인데?'
세르펜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를 바라보는 베일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베일이 나를 빤히 노려볼수록, 세르펜스의 얼굴에 울적함이 더해졌다.
"세르펜스도 참, 너무 과대 포장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시온은 정말로···."
"제가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잖아요? 이제 그쯤 하면 됐습니다."
내가 훠이 훠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 나서야, 세르펜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바라보는 베일의 눈빛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원래 세르펜스가 칭찬에 후해요."
"그런···건가?"
어째서인지 '그런'이라는 말 뒤로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마치 그런 수준이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바꾼 것처럼.
"아무튼 저는 세르펜스에게 무례하게 군 게 아니라, 친구로서 장난치고 놀았을 뿐입니다. 제가 세르펜스와 맞먹는다고, 얘가 화내거나 불편해하는 거 봤어요? 이 녀석도 다 즐기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검지로 세르펜스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런 내 손가락을 따라, 베일의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옮겨졌다.
시선과 손가락질을 독차지한 세르펜스는 내 말이 다 맞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베일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아연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남 앞에서···. 보좌관에게 함부로 대해지는 걸···, 즐겨···?"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라,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휴마누스도 세르펜스에게 이상한 취향을 가르치더니만. 원래 이 세계의 왕족과 황족들은 다들 이 모양인가 싶다.
"친구랑 장난치고 노는 얘기 중이었잖아요?! 대체 머리에 뭐가 들면 그걸 그딴 식으로 해석합니까?"
"점잖으신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기가 막혀 소리를 지르자, 세르펜스가 이때다 하며 베일을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