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08화 (408/925)

408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23)

세르펜스가 손을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길고 곧은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살짝 벌어진 입술이 '어떻게 저를 가지고 그런 상상을 하실 수가···?'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아니, 그런 의도로 보이게끔 철저히 계산된 연기였다.

처연한 얼굴과 섬섬한 손가락이 시야에 함께 담기자, 세르펜스의 강한 무력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 가냘파 보이는 모습에, 그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안 된다. 정신 차리자.

'어째 연기가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다···?'

지금 세르펜스가 펼치는 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연기는 이미 많이 봐왔다. 익숙하다 못해 내성이 쌓였다.

내가 녀석의 연기에 홀딱 넘어갈 뻔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건···. 그래, 응석이야!'

세르펜스는 지금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베일은 나쁜 사람이니까 혼내주고, 자신의 상처 난 마음에 '호~' 해달라고 떼쓰고 있는 거였다.

실로 괘씸한 행동이었으나, 부모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는 세르펜스의 연기를 완벽하게 분석하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베일은 그러지 못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친구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시온 경의 행동은 무례함을 넘어 방자했습니다. 아무리 친구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친구 사이니까. 친구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시온 경은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제가 모욕적이라고 느꼈을 정도인데, 그런 걸 두고 '즐겼다.'고 표현하니···."

베일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횡설수설 자기변호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베일의 앞에서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켜 본다면 못 할 말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대놓고 나를 비난하는 듯한 말을 듣고 있자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시온이 저를 편하게 대하는 건 맞으나,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아닙니다.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입니다."

세르펜스가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많이 피곤한가 보다.

"저하의 앞에서 시온이 당돌한 모습을 보인 건, 저의 체면을 깎아내리기 위함도 아니며, 저하를 무시한 처사도 아닙니다. 단지 저하께서 외롭고 힘들어 보여서,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공작은 시온 경을 매우 높이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시온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베일이 무슨 말을 하든 세르펜스가 내 칭찬으로 받아치니, 대화가 진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지간한 칭찬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내가 슬슬 민망함을 느낄 지경이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칭찬의 중요성을 설파하긴 했지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세르펜스가 나를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베일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몹시 억울하다.

나는 그저 세르펜스를 잘 먹이고, 잘 재우면서, 잘 키웠을 뿐인데.

자신에게 애정을 주는 보호자를 아이가 존경하고 따르는 건 당연한 결과거늘.

"그, 그렇다면 출발하기 전날. 시온 경이 저와 공작의 대화에 끼어들어, 공작을 끌고 갔던 건 대체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베일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세르펜스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에 세르펜스는 난처하다는 듯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고는 베일을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잠시 바라봤다가,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한 것을 앞에 두고 애써 외면하는 듯한 모양새에 베일이 안절부절 당황했다.

베일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그러는 와중에 우연찮게 나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도움을 청할 곳은 나뿐이다. 하지만 베일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쯧 하고 혀를 차게 된다.

"그날 세르펜스에게 제 욕을 하려던 거 아닙니까? 교양있는 분이시니, 저속한 표현은 쓰지 않겠지만. 그래도 저를 험담하고, 가까이 지내지 말라며 권고할 생각이었잖아요?"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베일의 어깨가 움찔했다.

"면전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욕을 들으면 세르펜스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 그건···."

베일이 어깨를 움츠렸다.

입고 있는 갑옷과 그 안에 덧댄 패드가 무색하게도. 그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따지고 보면 베일은 현혹펜스의 만행에 놀아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혼냈던 문제로 세르펜스를 또 혼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베일이 내 뒷담화를 하려고 했던 건 사실이잖아?'

내 행동에 화가 났던 거라면, 나를 적이라 간주했다면. 베일은 내게 와서 따졌어야 했다.

당시에는 세르펜스와 베일을 단둘이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가 지금에 이르러 떠올랐다.

나는 표정을 굳히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미안하네. 내가 자네에 대해 크게 오해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세르펜스처럼 순수한 아이에게 뒷담화 같은 나쁜 짓을 가르치려 하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악독한 마음을 먹을 수가 있는 겁니까?!"

베일이 오해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그게 내 언행 때문이라는 건 인정한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이제라도 나에게 먼저 대화를 신청했으니까.

하지만 세르펜스에게 뒷담화 같은 흉한 악습을 가르치려 한 건 용서할 수가 없다.

악숭이가 와서 함께 악숭하자고 권유할 만큼, 몹시 나쁜 행동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당연하죠!"

내 확언에도 불구하고. 베일은 여전히 내 진심을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로,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다.

"세르펜스! 세르펜스는 보면 알죠? 제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으, 으음···. 네에···. 맞습니다. 시온은 항상 솔직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어째서인지 세르펜스가 몸을 비비 꼬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왜 그래요?"

"뭐, 뭐가 말입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굴길래···."

"아닙니다, 착각하신 겁니다."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언제 저 없는 곳에서 몰래 누구 뒷담화 한 적 있어요?"

"단언하건대, 그런 적은 없습니다."

세르펜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답했다.

녀석의 눈동자는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맑고 투명했다. 거짓말을 하는 눈이 아니다.

"이상하네···? 내가 착각했나?"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그런가 보네요. 아까 세르펜스가 저를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도, 뭔가 좀···. 그런 기분이 들었거든요."

"빨리 대화를 끝내고, 일찍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세르펜스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기운을 내라는 듯, 옆에 앉은 내게 손을 뻗어 한 손으로 뒷목을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가···. 아니, 어떻게 친구가 된 겁니까?"

사이 좋은 우리의 모습이 부러웠는지, 베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나이도 얼추 비슷하겠다, 제가 그냥 친구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좌관이 되기 전에···?"

"아니, 세르펜스를 대체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세르펜스와 친구가 된 건 보좌관이 된 이후입니다! 세르펜스는 사사로운 친분으로 보좌관을 고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집사는 낙하산으로 고용했지만.

아무튼 거짓말은 안 했다.

"즉, 시온 경은 상사에게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친구 하자는 소릴 했다는 건가?"

"네. 세르펜스가 친구도 없이, 맨날 일만 하는 게 안타까워서요."

"······."

베일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장담하건대 베일은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게 분명하다. 그 사실을 꼬집어 주고 싶었으나, 상처로 남을까 염려스러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시온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말 사실입니다. 시온은 순수한 마음으로 저에게 다가와 주었고, 항상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저에 대해 알려고 애썼고, 제가 외롭다는 사실을 저보다도 먼저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와 친구가 되기로 한 겁니다."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기쁘다는 미소를 만면에 띠며 말했다. 참으로 눈부신 미소였다.

그러나.

"슬슬 민망해지니까, 진짜 그 정도만 해요. 자꾸 세르펜스가 그러니까 얘기 진행이 안 되잖습니까?!"

"하지만 저하의 오해를 풀려면···."

"다른 오해가 깊어질 것 같으니까, 그만하라는 겁니다. 저하께서 저를 '순진한 세르펜스를 속여서, 제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음험한 사람'을 보듯이 쳐다보고 있잖아요!"

"······."

내 말에 세르펜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왠지 받아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본능적으로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우리 애 응석이 가면 갈수록 심해져서 진짜 정말 큰일이다.

"어···, 그러니까 대화를 어디까지 했더라? 아무튼 대충 넘어가고···. 저하께서 얼마든지 무례하게 대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지난 일에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아차! 죄송합니다. 한심하게 여기며 무시해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잠깐 착각했습니다."

"······."

베일이 건틀렛을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냉정하지 못한 정신으로 경솔하게 내뱉었던 과거의 발언을 후회하는 모습이다.

"그러게 왜 그딴 소리를 하셨습니까? 아무리 자기 자신이 미워도 그렇지. 저하께서 스스로를 존중하길 포기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남이 대신 욕해주면 마음이 편해지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자기 자신을 무시당해도 싸다고 생각한 겁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말을 다다다 쏟아내자, 베일이 손을 내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나는 그가 바라던 대로, 그의 의문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계속 쏟아냈다.

"원래 사람은 누구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죠. 문제가 나오자마자 남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는 건, 정의로운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겁니다."

"잠깐만, 얘기 진행이 너무 두서없이···."

"제가 원래 이런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원래 아까 하려던 얘긴데, 저하께서 저더러 불경하고 무례하다며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옆길로 샌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그냥 들어요."

내 억지스러운 말에 베일이 황당무계한 일을 다 겪는다는 듯한 얼굴로, 헛웃음인지 헛숨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저하는 바스툴 왕국을 싫어하시죠? 그도 그러할 게, 그쪽 귀족들이 워낙 막장이잖아요. 그런 놈들을 이끌고 나라를 고쳐나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고. 그곳에서 겪었던 수모를 떠올리니 진저리가 나고."

"······."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동안, 베일의 의지와 무관하게 조금씩 풀어졌던 얼굴 근육이 단박에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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