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26)
* * *
하늘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기도 전에 클라라가 찾아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는데도 일어나기가 힘들다.
이런 걸 보면 몇 시에 일어나느냐가 중요하지, 몇 시간 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반면에 세르펜스는 잠기운 하나 없이 눈동자가 똘망똘망했다. 그 모습이 살짝 얄밉다고 느껴졌다.
나는 예복을 갖춰 입고, 점도 잊지 않고 찍어준 후 세르펜스를 대동하고 본당으로 향했다.
예고를 듣긴 했지만, 단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를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다 나온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자리가 거의 텅텅 비어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그것이 지켜질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로 시작해서, 대뜸 '단상에 선 김에 좋은 말씀 한마디 부탁합니다.' 같은 소리를 할지 누가 아는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기도하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상 위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서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보는데, 정면에 세르펜스가 앉는 모습이 보였다.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시,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리라.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평상시와 똑같은 행동이다.
'잠깐. 훌륭한 교본이 바로 눈앞에 있잖아?'
내가 세르펜스에게 눈짓하자, 세르펜스는 곧장 기도 자세를 취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서 양손을 맞잡아 쇄골 어름까지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왼손 약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마무리로 눈을 내리깔고 발끝에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폼을 잡고 있으니, 사람들이 들어오며 생겨난 발걸음 소리와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도 자세를 잡고 있어서 그런가, 어쩐지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정신이 몽롱하게 풀어질 즈음, 하얀색 무언가가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내가 본 것은 필시 이 신전의 책임자라던 류드밀라 주교의 옷자락일 거다. 여기서 고개를 든 순간, 수렁에 빠지게 될 거다.
'나는 기도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본 거야. 그 누구도 나의 기도를 방해할 수 없어!'
이런 내 노력이 통했는지, 류드밀라 주교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겨우 한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진정한 고난은 이제부터다.
주교가 기도문 읊는 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한 귀로 흘리며, 잠들지 않도록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마침 생각할 거리도 있고···.'
나는 오랜만에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어째서 그 누구도 [판타지 소설 속 최종 보스를 양육할 때의 주의점]을 주제로 논문을 쓰지 않은 거지?'
아무리 이론과 실전은 큰 차이가 있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차이를 넘어 괴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속으로 한탄을 흘리며, 배운 이론과 세르펜스의 현 상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애썼다.
'지금 당장 문제 되는 건 뭐지?'
요즘 들어 세르펜스의 독점욕과 질투심이 부쩍 심해졌다.
이는 나를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건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분리 불안'이라는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을 잘라내더라도 새로운 가지가 다시 자라날 거다.
'우선 분리 불안을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독립성을 키워야 하고, 독립성을 기르려면 세르펜스를 내게서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세르펜스에게 잠깐 떨어져 있자고 제안한다고 해서, 녀석이 순순히 떨어져 줄 리가 없다.
애초에 그게 가능하면 분리 불안이라고 할 수 없다.
'내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일단 알겠다고 대답해 놓고, 몰래 숨어서 감시하려나?'
아니,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내가 떨어져 있자고 말한 순간 세르펜스는 엄청난 박탈감을 느끼게 될 거다. 자신이 싫어진 거냐며, 잘못했으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게 뻔하다.
무릎을 꿇고 울면서 매달리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상상했더니, 마음이 무겁다.
"후우···."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르펜스가 나에게 의지하길 바라긴 했다. 하지만 의지가 의존이 되고, 점차 의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고 보면 항상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만 했지, 녀석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한 번도 해본 적 없구나?'
누가 알았겠는가.
생명을 생명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심지어는 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끝끝내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었던.
그런 소설 속 최종 보스가 이렇게 변할 줄을.
'어차피 이미 엎어진 물이야. 지나간 일을 붙잡고 끙끙대는 건 이제 그만하고, 해결할 방법이나 생각해 보자.'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듯 생각하며, 사고를 이어나갔다.
어쨌거나 세르펜스를 강제로 떼어 놓는 건 절대 안 된다.
'때로는 아이의 행동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독립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는 하는데···.'
그 방법 또한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르펜스는 방치와 무관심 속에서 외로움을 뼈에 새겼던 시절이 있으니까.
그 당시의 기억만 떠올리게 할 뿐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질 때까지, 귀찮게 굴어볼까?'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내 발목을 내가 붙잡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세르펜스가 귀찮아지는 것보다 내가 먼저 지치면, 그땐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을 거다.
그러니 이 방법은 최후 수단으로 두는 게 좋겠다.
'안정된 애착이란 대체 뭘까? 어떻게 해야 그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거지? 진짜 애착 인형을 만들어 줘야 하나?'
아이의 욕구를 맞춰주며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또, 그렇게 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이미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맞춰주고, 무슨 상호 작용을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나 싶기도 하고···.
'소꿉놀이를 해 볼까? 그렇게 한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어릴 때 받았어야 할 관심과 애정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역할극은 다 큰 성인의 심리 치료에도 종종 이용되니만큼, 나쁘지 않은 방법 같다.
세르펜스가 자신을 내려놓고 아기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갑자기 소꿉놀이를 제안할 수도 없다.
유지스는 이해해 줄 테고 윈스톤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에드나와 베일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닌가? 아니마도 끼워주겠다고 하면 에드나는 찬성하려나?'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다 떨어졌나 보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한 중년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기도 끝났습니다."
류드밀라 주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육아 방법에 관한 고찰을 하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정면을 바라보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졸지 않고 무사히 기도 시간을 넘긴 것이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내가 졸았던 건 기도문을 귀담아들으려 했기 때문인가 보다.
역시 지루한 시간을 넘기는 데는 딴생각을 하는 게 제일이다.
"이런! 기도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원래 좀 이렇습니다. 신 룩스메아께 기도를 올리는 건 제 삶의 기쁨이자, 살아가는 원동력인지라. 한번 기도를 시작하면, 주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하게 돼서···. 하하하!"
"룩스메아 님께서도 에인젤 주교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을 겁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너스레를 떨자, 류드밀라 주교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되는대로 떠든 답변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주 흡족한 표정이다.
"괜찮으시다면 식사를 마치신 후,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으나, 아직 갈 길이 멀어서요.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교단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겁니다."
"아···, 정말 아쉽습니다. 에인젤 주교님께서 어떤 기도를 올리셨을지, 참 궁금했는데···."
류드밀라 주교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기도를 왜 이렇게까지 궁금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별똥별이 떨어지면 자신의 소원은 뒷전이고, 옆 사람이 무슨 소원을 빌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타입인가?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가시는 길에 룩스메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네에···, 류드밀라 주교님의 앞날에도 신 룩스메아의 축복과 은총과 이것저것 좋은 것들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나는 기도 수집광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활동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세르펜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왔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과 함께 조금 부실한 식사를 마쳤다.
소화가 잘되면서 배가 든든하고, 혀에 자극적이되 위에는 부담 가지 않는 음식은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재작년 바스툴 왕국에 방문했을 땐, 선택의 날 때문에 타임어택을 하느라 서둘렀지만···.'
지금은 일행 중에 환자가 있기도 하고. 나중에 따라올 휴마누스 일행을 생각하면,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괜찮지 않은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말 타고 가는 동안 먹을 수 있는 요깃거리로는 무엇이 있을까, 머릿속으로 다양한 후보군을 떠올리고 지우길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놀려, 신전을 빠져나왔다.
"표정이 심각해 보이시던데,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이 하신 겁니까?"
갑자기 세르펜스가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라고 표현한 이유는 녀석이 새벽부터 나를 졸졸 쫓아다니면서도, 묘하게 말이 없었던 탓이다.
"지금 육포를 파는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 보존용으로 만든 딱딱하고 맛없는 거 말고요. 적당히 쫄깃하면서 부드럽고, 간도 팍팍 되어 있는 거로."
"···기도 시간에 육포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내 대답을 들은 녀석이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고 나서야, 세르펜스의 질문이 과거형을 띄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인 줄 알았죠! 기도를 마친 지가 언젠데, 그때 일을 왜 지금 묻고 있습니까?"
"······."
세르펜스가 갑자기 시크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다물었다. 딴청을 부리고 있는 거다.
질문할 타이밍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묻는 의도가 너무나도 투명해서,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 속마음을 알고 싶기는 한데,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렀을 때 질문했어야 했다.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는 적기를 그냥 놓아주고,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질문한 걸 테다.
그 소심하고도 한심한 행동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는 막내 신관님이야말로, 기도 시간에 하라는 기도는 안 하고 뭘 하신 겁니까? 한눈이나 팔고 말이야! 에잉~, 쯧쯧! 제가 막 교단에 들어왔을 때는요, 기도 중에 딴생각을 한다는 건 꿈도 못 꾸는 일이었습니다. 기도 중에는 오로지 룩스메아 님만을 떠올리며! 대륙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집중하겠습니다."
세르펜스가 걸음까지 멈춰가며, 정중하게 허리 굽혀 사과했다.
나는 아직 회사생활을 해본 적 없어 직접 보진 못했지만, 드라마에서 보았던. 꼰대 부장에게 괜한 꼬투리를 잡혀 혼나는 신입 사원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상대가 저자세로 나왔다고 그냥 물러나면 꼰대가 아니다. 속을 뒤집어 놓을 마침표가 필요했다.
"막내 신관님께서는 앞으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세요. 이게 다~ 제가 막내 신관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
"그렇다면 아예 에인젤 주교님께서 기도회를 매일 주관하시는 건 어때요?"
신관펜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데, 유지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들뜬 목소리로.
아차 싶었다. 설정에 환장하는 유지스에게 이렇게 빌미를 주다니.
"한 신전의 책임자가 되실 예정이시잖아요? 기도회뿐만이 아니라 성제(聖祭)도 주관하셔야 하니, 그 예행연습도 할 겸요."
"에인젤 주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면, 저도 열심히 따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세르펜스가 말을 더했다.
망했다. 완벽한 외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