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20화 (420/925)

420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35)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세르펜스가 허리를 비틂과 동시에, 돌연 넓은 보폭으로 발을 내디뎠다.

세르펜스의 어깨를 끊어낼 듯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졌던 검은 허공을 갈랐고, 적과의 거리는 대폭 줄어들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틈도 주지 않고, 세르펜스는 다친 왼팔을 뻗어 검숭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 행동으로 상처가 벌어져, 다시 한 번 피가 잔뜩 쏟아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검숭이는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그대로 끌려왔다.

세르펜스는 검숭이의 안면에 거침없이 주먹을 꽂아 넣은 후, 줄곧 잡고 있던 검숭이의 손목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겨드랑이 사이로 생겨난 공간을 통해, 쏙 몸을 빼며 빙글 돌았다.

사교댄스의 한 동작을 연상케 하는 몸놀림이었으나, 그 결과물은 절대 사교적이지 않았다.

검숭이의 팔이 관절 반대 방향으로 꺾여버린 것이다.

도적들이 결계를 두드리며 내는 소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득!'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선명하게 들려오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검숭이는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훈련의 효과인지, 광폭화 마법으로 고통이 마비된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검숭이가 놓친 검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세르펜스가 민첩하게 잡아챘다.

검붉은 오러에 휩싸였던 검이 이제는 은빛의 신성력으로 둘러싸였고, 세르펜스는 타인의 검을 능숙하게 휘둘러 가까이 다가온 도적을 베어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붉게 튀어 오르는 피를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저는···!"

고작 한 음절.

TV 속 배우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뮤지컬 배우처럼. 과장된 감정이 담긴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조금만 더 저를 믿어주십시오!"

세르펜스가 분하다는 듯이 외치며, 아까 상처를 감싼 탓에 피가 묻어난 오른손으로 검을 꽈악 움켜잡았다.

존경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고자, 검을 들어 올렸다는 설정인가 보다.

'···기왕이면 프레이 신관이 아니라, 세르펜스가 저런 말을 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에게 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자신감의 첫걸음이다.

아쉬움이 들긴 했으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거와는 별개로 혼낼 거지만.'

모든 놀이에는 안전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이다.

지금 하는 역할극이 단순한 놀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행의 안전보다 우선시 되는 건 없어야 한다.

아무리 계획 때문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이제 어떡하죠···?"

에드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내가 그만두자고 말을 꺼냈으나, 세르펜스가 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세르펜스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검숭이들의 합공을 막아내며, 그 사이사이로 불도저처럼 달려드는 도적들을 피해내며. 반격까지 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아직 괜찮아 보인다.

"녀석이 먼저 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일단 지켜보죠."

아이가 먼저 할 수 있다고 나섰을 때, 무작정 못하게 하면 자신감만 죽이는 꼴이다.

더군다나 세르펜스는 말만 앞선 게 아니라, 능력까지 갖췄다. 나중에 혼낼 땐 혼내더라도 당장은 지켜보는 게 맞겠지.

"상처는 빨리 치료하는 게 좋을 텐데···."

유지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혼잣말을 흘렸다.

그녀의 말대로 세르펜스는 상처를 등한시한 채로,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는 싸우는 녀석의 모습을 힐끔 봤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위태위태해 보이는 결계 너머로, 서서히 푸른 빛이 돌며 밝아 오는 하늘이 보였다.

"결계도 유지해야 하고 적들도 아직 팔팔하니까, 신성력을 아끼려는 거겠죠."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빈정거림이 묻어나왔다.

"그건 저도 알고는 있지만, 신경이 쓰이네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지가 할 수 있다는데."

"······."

대화가 끊겼다.

나는 고개를 내려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듯, 적들과 싸우는 세르펜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눌러쓴 후드 아래로 얼핏 보이는 입술이 떨어졌다가 붙었다가를 반복했다. 무언가 갈등하는 기색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했는지, 유지스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나저나···. 드디어 칼립스 님께서 교단의 행운이라 말씀하시던, 그 검술 실력을 보게 되었군요. 과연, 나무랄 데가 없네요."

유지스가 무협지 조연 같은 대사를 또 입에 담았다.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연기를 이어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나 보다.

나도 세르펜스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봐 주면서, 유지스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뭐, 그렇죠. 그래서 저도 녀석이 성기사가 되길 바랐는데···. 갑자기 신관복을 입고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단 심문관이 아니라, 성기사요?"

"그런 흉흉한 직업을 애한테 어떻게 시킵니까?! 아, 그렇다고 이단 심문관님들을 나쁘게 보는 건 아닙니다. 아주 훌륭하신 분들이죠. 다만, 막내 신관님은 마음이 너무 여리고 수동적인 면이 있어서요.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래도 좀 그렇죠."

"아~,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아요."

유지스가 이단 심문관 역할에 철저하게 이입하며, '맞아. 그래서 나도 힘들었지.'라고 말하는 투로 대답했다.

그런 우리를 에드나가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지금 상황과 끼워 맞추자면, 남들 눈에는 '다친 사람이 저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한가로운 대화나 주고받다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한다.

'아닌가? 그냥 그게 맞나?'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윈스톤은 세르펜스가 어련히 잘 할 거라 믿고 있는지 미동조차 없다.

반면에 베일은 검을 콱 움켜쥔 채로,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세르펜스가 쳐둔 결계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는 신세지만.

투구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저렇게 투명하게 속이 보이는 것도 능력이다.

나는 시선을 도로 정면에 두었다.

세르펜스가 검을 들어 올린 만큼, 싸움이 점차 잔인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고, 외면해서는 안 되니까.

대신에 유지스와 주절거리며 '조연의 주인공 띄워주기 대사'를 계속 교환했다.

입을 나불거리며 대화에 집중했더니, 속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 든다.

'그나저나 슬슬 반응이 오고도 남았는데···.'

우리가 적과 싸우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지켜보며 방심하는 사이, 상단 사람들이 움직여주지 않을까 했건만.

어째 아직도 반응이 없다.

슬슬 우리가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작 한 명을 상대로 이렇게 힘을 빼게 될 줄이야···! 교단이 이런 괴물을 숨겨두고 있는 줄은 몰랐군."

법숭이가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세르펜스를 괴물이라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닐 거다. 그냥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테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조각 같다는 말을 무생물 같다는 말로 오역했던 전적이 있다. 그런 녀석에게 '괴물' 따위의 단어를 들먹거리다니.

심지어 세르펜스는 현재 검을 든 채로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목숨을 하나둘, 천천히 거둬가고 있었다.

검숭이들은 세르펜스를 지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적당히 몸을 사렸다.

하다못해 세르펜스에게 검을 조달해준 검숭이조차도, 목숨을 부지했다. 놈은 적당히 빠졌다가, 죽은 도적의 무기를 손에 들었다.

즉, 죽은 놈들은 도적뿐이었다. 그렇기에 법숭이가 느긋하게 저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거다.

도적 중 태반은 이미 절명했거나,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을 입었다.

놈들이 치명상을 입고도 움직일 수 있는 건, 광폭화 마법으로 인해 날뛰는 생명력과 한껏 고조된 흥분감 덕택이리라.

아무튼 그러한 이유까지 더해진 탓에 세르펜스가 주춤하며 멈춰 섰다.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건지, 녀석의 고개가 숙어졌다. 왼팔에 묻은 피야 본인의 것이라 치더라도, 이외의 곳에 덕지덕지 묻은 피는 전부 타인의 것이었다.

이곳저곳 붉지 않은 곳이 더 드물었다. 거기에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까지 더해지자, 피를 흠뻑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살기가 담긴 도적의 공격에 세르펜스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이 복잡할 거다.

세르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나 또한 소스라치게 놀랐을 테니까.

이리저리 튀는 피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애초에 적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저렇게까지 옷이 더럽혀질 수는 없다.

광기에 찌든 도적놈들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 덤벼들고, 시야를 방해한답시고 녀석을 향해 피를 흩뿌리는 등.

온갖 치사한 짓을 다 해댄 결과물이다.

포위된 채로 싸우다 보니 피할 수 있는 범위도 제한되었고, 그러다 보니 옷에 피가 잔뜩 묻을 수밖에.

사람들을 그런 광기에 밀어 넣은 주제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감히 누구에게 괴물 따위의 단어를 들먹거리는 겁니까?! 애먼 사람 잡고 그딴 소리 하지 마시고, 괴물이 보고 싶으면 거울을 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존재가 거울 속에서 안녕하며 반겨줄 테니까!"

"뭐···?"

반문하는 법숭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스태프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흑마력이 줄기줄기 피어오르기까지 했다.

"설마하니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냐?"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그쪽 편으로 가겠다는 말이라도 한 줄 알겠네!"

"아까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빛으로 신호를 줘놓고 이렇게 발뺌을 하다니!"

"어허, 이간질하지 맙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딴 기억은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도 아닌 마왕을 신처럼 떠받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망령이 들어도 아주 단단히 들었다.

"저자를 홀로 싸우게 한 것도 공물로 바치려던 것 아닌가? 적당히 제압해서 인질로 삼으라고···."

"그게 대체 뭔 소리입니까?! 악마 숭배자와 도적놈들 따위는 막내 신관님 혼자서도 충분히 맞대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거든요?"

"···그럼 조금 전에. 포기하고 잡히라고 한 건 뭐지?"

"우리가 나설 테니까 그냥 빠져있으라는 뜻이었죠!"

"······."

나를 바라보는 법숭이의 눈빛에 배신감이 짙게 서렸다.

진심으로 내가 마왕의 밑으로 들어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그 모습에, 당황인지 황당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해야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씩이나 되는 인물이 룩스메아를 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발상의 근원이 궁금할 지경이다.

"악마를 숭배하다가 결국 머리까지 회까닥 해버린 건가?"

"전후 관계가 좀 잘못되지 않았어요? 머리가 회까닥 했으니까, 악마를 숭배하는 거겠죠. 그러니 미친놈이 미친놈들이 모인 집단 속에서 미친 짓을 하다 보니, 세상 모든 이들이 미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에드나도 법숭이의 말이 허황스럽다고 생각했는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닭과 달걀의 관계는 어느 쪽이 먼저라고 답을 내릴 수 없지만, 악숭과 회까닥의 순서는 그녀의 말이 정답이라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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