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39)
유지스의 말이 떨어지자 윈스톤이 바닥을 나뒹구는 도두역을 주워 왔다.
데려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척척 자기 일을 찾아서 행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윈스톤은 한 손으로 들고 온 도두역을 얌전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두역의 안색은 살아있긴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파리했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희미한 호흡 탓에 더 그렇게 보였다.
윈스톤이 놈을 내던지지 않고 살포시 내려놓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심문하려고 데려왔는데,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아무리 봐도 상사에게 귀염 받을 타입인데···. 전 주군의 아들놈은 대체 얼마나 뒤틀린 사람이길래,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을 구박해댄 거람?'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을 괄시한 아들놈이나, 그것을 내버려 둔 아버지나.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어떻게 깨우죠?"
에드나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축 늘어져 있는 도두역의 모습은 쉽사리 깨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격하게 흔들어 깨우거나 때려서 깨울 수도 없다. 자칫 잘못했다간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찬물을 끼얹었다가 쇼크 증세라도 나타날까 겁난다.
"스프레이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서 찍찍 뿌려볼까요?"
"···아무래도 신성력을 주입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가 내 말을 듣지 못한 척, 한 귀로 흘리며 평화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신성력을 아껴야 한다며 제 상처도 치료하지 않으려 했던 주제에, 나쁜 놈을 깨우는 데에 신성력을 사용하다니.
못마땅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세르펜스의 신성력이 스며들자, 도두역이 으으 소리를 내며 부스스 눈을 떴다.
생명력을 소진하여 쓰러진 것이니만큼. 신성력이 생명력을 북돋워 주니, 정신을 차린 거겠지.
"헉! 대체 무슨 일이···?"
정신을 차린 도두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놈은 한차례 꿈틀하고 움직이긴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이내 축 늘어졌다. 딱 정신을 차리고 말할 수 있는 정도로만 회복시킨 모양이다.
윈스톤이 바닥에 누워있는 도두역을 일으켜 앉혔지만, 대화를 나누기에는 영 각도가 안 나온다.
나는 주변을 슥 둘러보다가, 마침 적당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성기사님, 저기 모닥불 앞에 있는 통나무 좀 가져와 주실래요? 앉아서 대화하게."
"···저 말입니까?"
"그럼 작은 성기사님 말고, 이런 걸 누구에게 시킵니까?"
우선 세르펜스는 혼자 열심히 싸워 줬으니까 패스.
윈스톤은 도두역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느라 통나무를 가지러 갈 수 없고, 유지스는 이단 심문관이라서 에인젤 주교의 부하가 아니니까 못 시킨다.
마지막으로 에드나는 마법을 쓴다면 모를까, 통나무를 옮길 만한 근력이 없다.
베일도 이러한 상황을 이해했는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통나무를 가져왔다.
나는 베일이 가져다준 통나무에 걸터앉아, 도두역에게 광폭화 마법에 대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도두역은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설명이 이어질수록 점차 얼굴을 굳혔다.
특히 '흑마법사가 데려온 부하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다는 말에, 허망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체력이 남아돌았으면 씩씩거리며 분노를 표출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그럴 힘조차 없어, 실실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광폭화 마법은 분명 풀렸을 텐데도 도두역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득였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말하고, 순순히 뒈지라고?"
"뭐어···, 굳이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어쨌거나 악마 숭배자와 협력하여 성직자를 습격했잖습니까? 교단에서 인력을 낭비하면서까지 그런 사람을 신경 써 줄 수는 없죠."
"크큭, 크흐흐흐···."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 준 걸까? 도두역이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이대로 놈이 입을 다물면 어쩌나,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내비친다면 놈에게 끌려다니는 꼴밖에 안 된다.
"그래서 그냥 침묵하려고요? 혹시 착각하실까 봐 말하는 건데, 협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세요. 바로 옆에 이단 심문관님이 계시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정보를 끄집어내는 건 일도 아니죠. 다만, 당신이 그런 수고조차 아까운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렇게 대화를 먼저 시도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아주 하찮고 더러운 것을 다 본다는 시선으로 놈을 깔보았다.
어려운 연기는 아니었다. 아니, 연기조차 아니었다.
도두역은 실제로도 그런 놈이었으니까.
"크흐, 내가 누구 좋으라고 말을 안 하겠어? 해야지, 전부···."
다행히도 원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긴장한 기색 없이 웃으며 말하는 모습으로 보아, 처음부터 순순히 정보를 불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플라가, 그 새끼는 어떻게 됐지?"
"기절시켜서 저쪽에 잘 던져 놨어요."
"흐흐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두역이 불규칙한 치열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정면으로 봤더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물건'을 쓰다가 걸렸나 보지?"
도두역이 쌤통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 물건'이라 함은 분명 송곳이 달린 원통을 말하는 걸 테다.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것에 대해 말문을 여는 게, 전부 말하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송곳이 달린 금속 통을 말하는 거죠?"
"송곳? 혹시 그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날 깨운 건가?"
혹여나 우리가 놓친 것이 있을까 싶어 떠봤더니,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말하는 뉘앙스로 보아 같은 물건을 지칭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하나,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다.
'어차피 자세히 살펴보긴 해야 하는데···.'
이미 사용된 것과 새것 중에서 어느 쪽이 안전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이러한 내 고민을 알아챈 듯 유지스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통 자체는 금속이니까 재활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효과는 일회성일 거예요. 저쪽 악마 숭배자들의 품에서도 똑같은 걸 몇 개 더 발견했거든요.
일회용이라서 많이 챙겨다닌 거라는 추측이었다. 아니면 뽑았다가 다시 꽂으면 되니까.
즉, 한 번 사용된 걸 뽑아와서 살펴보자는 의견이다.
"···막내 신관님?"
나는 뒤를 돌아보며 세르펜스를 호명했다.
어지간하면 오늘은 더 이상 심부름을 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가는 정체불명의 물질에 노출되었을 때. 그것을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세르펜스뿐이었으니까.
"호기심이 동한다고 함부로 이것저것 건드리지 말고, 고스란히. 안전하게 가져오세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 알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정중하게 대답한 후, 새까맣게 변한 시체로 다가갔다.
나는 녀석의 행동을 끝까지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세르펜스가 위험한 행동을 하려고 하면 바로 저지할 수 있도록.
자잘한 심부름이라면 많이 시켰는데.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집 밖에 나갔다 와야 하는 심부름을 처음 시키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조마조마하다.
시체에 다가간 세르펜스는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거무튀튀한 원통을 잡고 뽑아냈다. 그 끝에 돋친 송곳 같은 금속이 예리하게 빛났다.
허리를 펴고 바로 선 녀석이 원통을 든 채로 손목을 꺾어, 그 끝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눈을 찌를 것 같아 보여서 하마터면 '안돼!'하고 소리칠 뻔했다.
내 불안한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지.
세르펜스는 호기심 강한 고양이처럼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뭐합니까? 빨리 안 가져오고."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녀석을 불러들였다.
당장 이리로 오라고 손짓까지 했는데도, 세르펜스는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시체와 제 손에 들린 원통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들고 있던 원통으로 바닥을 쿡 찍었다.
'지금 뭐 하는 건데? 본인을 찌른 게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세르펜스에게 위험한 물건을 가져오라고 시키면 안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쉬고 나서야,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르르 달려왔다.
"송곳이 아니라, 주삿바늘이었습니다. 끝부분에 압력이 가해지면 바늘이 살짝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통 안의 액체를 흘려보내는 구조입니다."
알아낸 것을 설명해 준다고 해서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나는 녀석을 찌릿 노려봤고, 세르펜스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보고는 그게 끝입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계속해요."
화가 나는 건 나는 거고, 그렇다고 기껏 알아낸 정보를 듣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저자가 사망한 건, 흑마력 때문입니다."
"흑마법으로 만든 시약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흑마력이요?"
"자세히 살펴볼 시간이 없어서, 부가적인 원인이 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흑마력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흑마력에 노출됐다고 사람이 다 저 지경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농도 높은 흑마력이 한순간에 주입된 탓에, 몸이 감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시간 대비 많은 양의 흑마력에 노출된 게 진짜 사인이라는 뜻이다.
급성 흑마력 중독으로 인한 쇼크사, 뭐 그런 이름이라도 붙여줘야 하려나?
"그리고 저 시신은 조속히 정화해야만 합니다. 아직은 괜찮지만, 흑마력이 흩어지기 시작하면 이 주변 일대에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어···, 그 정도예요?"
"집중해서 느껴보십시오."
세르펜스가 주교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듯 말했다.
설명에 집중하다 보니, 도두역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잠시 깜박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는 척하며, 느껴지지 않는 흑마력이 느껴지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네. 그러네요. 저 시신 내부에서 막대한 흑마력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집니다."
"과연 에인젤 주교님이십니다. 지금은 흑마력이 시신에 묶여 있어, 멀리서는 그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았을 텐데. 개인적인 추측이나, 흑마력을 농축시키는 처리 과정 탓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게 아닐까 합니다."
"······."
느껴보래서 느껴지는 척했더니, 사실은 느껴지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하다니.
어쩐지 녀석에게 농락당한 기분이다.
"그럼 정화하고 와야지, 그냥 오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오라고 녀석을 불러들인 건 나였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을 시켜놓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불러서 별거 아닌 일을 시킨 후. 어째서 먼젓번 시킨 일을 아직 못 끝냈느냐고 따지는 건, 꼰대의 기본 패시브니까.
"그게···."
군말 없이 시체를 정화하고 올 줄 알았던 세르펜스가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제가 신성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현재 남아있는 양으로는 부족합니다."
각성 설정 같은 걸 잡고, 신성력을 허공에 뿌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나는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고, 세르펜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 어쩔 수 없습니다. 주교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농축된 흑마력의 양이 꽤 되어서···. 보통 제 나이 또래의 신성력 수준이라면, 만전의 상태로도 정화하기 버거워할 겁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변명은 꼬박꼬박 잘한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이 제법 심각했다.
세르펜스가 말한 나이 또래가 스물일곱 언저리인지, 프레이의 설정 나이인 스물둘 즈음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로 큰 문제다.
"그 작은 통에, 그렇게나 많은 흑마력이 응축되어 담겼다고요?!"
내가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줘서 많이 기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