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29화 (429/925)

429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44)

* * *

몸을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잠에서 깨어보니, 몽롱한 시야 가득 빨간 색채가 어른거렸다.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자, 두 눈에 초점이 잡혔다. 붉은 머리칼로 염색한 세르펜스가 원망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을 왜 그렇게 떠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악몽도 안 꾸고 완전 개운하게 꿀잠을 잤는데, 또 뭐가 불만스러워서 저러는지 모르겠다.

"말을 해요. 노려보지만 말고."

"내가 당신을 기운 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완전히 당했다."

"뭔 소리래?"

"또 휘둘려 버렸어···."

"뭐라는 거야?"

"어제의 대화로 위안을 얻은 사람은 이번에도 나였다. 당신이 아니라···."

내게 둥개둥개 받느라 정신이 팔려서, 소기의 목적을 상실했다가 뒤늦게 떠올리고 후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녀석에게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고민하게 내버려 두자!'

아이가 모처럼 능동적으로 나왔는데 그만두라고 초를 칠 수는 없다.

세르펜스처럼 소심한 아이는 보호자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고 오해하여,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한다거나, 자기 자신을 뜯어고친다거나.

그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 아니라면, 세르펜스가 하고자 하는 양을 지켜봐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 효도해 올지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했더니 기분이 유쾌해졌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힘내 보라는 뜻으로 세르펜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새벽 기도 때문에 깨운 거죠? 저 먼저 씻습니다!"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얼마나 기특한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내 기분이 좋아진 원인을 몰라서 당황스러워서 저러는 거겠지.

그런 녀석을 뒤로한 채, 나는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와서 몸단장을 마친 후. 예배에 참석해 병풍처럼 한참을 앉아있다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이곳 주교로부터 법숭이 심문 결과는 나중에 전달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신전을 떠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어제 점심에 통 드시지 못한 데다가, 저녁까지 방에서 따로 드신다기에 걱정했었는데.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침대로 다이빙한 나를 보며, 유지스가 환히 웃었다.

아침 식사 내내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듯하더니. 정말로 내가 괜찮은 건지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세르펜스도 그렇고 유지스까지 내가 먹는 것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을 줄이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는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지, 안 되겠다.

"그런데 이제부터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기차에 타서 뭘 하겠습니까? 빈둥거려야죠."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유지스가 싱그럽게 웃으며 내게 성서를 내밀었다.

저번에 기도회 어쩌고 했던 게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일 기도회에 쓸 기도문을 준비하라는 의미가 틀림없다.

"생각해보니 제가 아직 마음이 어수선해서,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권해드리는 거랍니다."

이 세계 사람이라면 성서를 읽으며, 희망과 안정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종교에 의지하는 건 체질에 안 맞는다.

'더군다나 그 숭배 대상이 룩스메아임에야.'

성서 한 줄마다 딴지를 걸며, 신성 모독 욕구만 차오를 뿐이다.

차라리 세르펜스나 유지스의 미모, 윈스톤의 근육, 에드나의 찰진 욕설.

그런 것들을 찬양하면 찬양했지, 룩스메아는 내 찬양 리스트에 오르지도 못했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나를 대신하여 유지스가 내민 성서를 대신 받아들며 말했다.

나를 도와줄 좋은 기회라 여겼는지, 녀석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의욕이 가득 차오른 모습이다.

'까짓거, 같이 동화책 읽어준다 생각하면 괜찮겠지!'

그렇게 가볍게 여겨도 될 문제가 아니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나는 침대에 배를 대고 엎드린 상태였는데, 세르펜스가 내 머리 옆에 성서를 펼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막내 신관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함께 성서를 읽으려면 서로 눈높이를 맞춰야 하잖습니까?"

녀석이 너무 태연하게 대답해서, 이 세상에서는 무릎을 꿇는 게 그다지 굴욕적이지 않은 일인 줄 알았다.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은 건, 기함할 듯한 베일과 어처구니없다는 에드나의 표정을 보고 나서였다.

"제가 그동안 막내 신관님을 너무 갈궈서, 한번 당해보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욕먹고 반성 좀 해 보라고?"

"절대 아닙니다."

나는 세르펜스를 관심 병사로 분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곰곰이 고민하다가, 그냥 녀석의 무릎이 가벼울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제 악마 숭배자 앞에서 '막내 신관님은 내가 꿇으라면 꿇는다.'라고 말했던 건, 설정 부여가 아니라 정보를 캐내려고 대충 둘러댄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도도한 막내 신관님이 이렇게 남 앞에서 무릎을 쉽게 꿇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세르펜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나도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세르펜스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성서를 펼쳐 내 눈높이에 맞춰 들었다.

덕분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니, 목이 뻐근할 일도 없어서 좋기야 하다만. 대체 눈높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 녀석은 무슨 눈높이 선생님이라도 될 생각인가 보다.

"저는 그만 보시고, 성서에 집중해 주십시오."

내가 딴 생각에 팔려있자, 세르펜스가 주의하라고 경고하듯이 말했다.

그 말속에서 얼굴에 대한 자신감이 슬쩍 엿보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여겨지던 일이었으나, 헛된 노력이 아니었던 거다. 반복된 칭찬은 마침내 녀석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면 어제저녁, 시간만 주어진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슬슬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 것 같아 뿌듯해···지다가 말았다.

'아니, 그래도 그건 너무 심했어. 타락펜스도 아니고, 혼자서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는 건 너무 그렇잖아?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게 목표라지만. 그거 완전 소설 속에 나오는 신념 있는 악역 보스나 하는 짓이잖아. 그나마 걔들은 신념이라도 있지, 넌 뭔데? 생각할수록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세르펜스를 찌릿 노려봐 준 후, 녀석이 다시 나를 쳐다보기 전에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같은 행동을 다시 반복한 게 아니라면, 한 번 혼냈던 거로 두 번 혼내서는 안 되니까.

내가 집중하기 시작하자, 세르펜스는 성서에 쓰인 문장 중에 기도문에 응용할 수 있을 만한 글귀를 골라서 읊었다.

그 목소리가 참으로 낭랑하고 청아하여,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시를 낭독하는 것처럼 들렸다. 덕분에 지루하기는커녕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하다.

룩스메아 교단의 예배는 성서를 한두 페이지가량 읽는 것으로 시작하여,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이 준비한 기도문을 읊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할 것은 약식이라서, 나는 후반부에 해당하는 기도문만 읊으면 된다.

'차라리 전반부를 시켜주지.'

이런 내 난감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세르펜스는 몸소 자신이 고른 구절의 응용 예시까지 선보였다.

"어둠을 물리친 찬란한 빛이여, 우리의 구원자이시여. 당신의 존재로 두 눈이 트여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손길로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가 녹아들었고, 생명이 움트는 봄이 찾아올 수 있었나이다."

프뤼네 왕국에서 처음으로 신전 예배에 참여했을 때. 그곳의 주교가 읊었던 구절의 응용이다.

유일하게 귀 기울여 들은 부분이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를 가없이 여겨, 늘 곁에 머물러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당신의 따스함을 나누어 주시옵소서. 가엾고도 불쌍한 우리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서두는 끝이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기도문인가 보다.

그런데 내용이 어딘가 모르게 구질구질하다. 세르펜스의 고결한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구걸이라도 하는 줄 알 뻔했다.

"부디 당신의 뜻에 따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세르펜스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뜻에 따라와 주면 신이 신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뭐라고 허락 씩이나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악숭이들은 마왕을 숭배해달라고 열심히 영업하던데. 유일신쯤 되면 신도를 골라서 받으면서 배짱 장사도 가능한가 보다.

"그리고 당신께서 비추는 길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건 그렇고 세르펜스의 입에서 나오는 '당신'이라는 호칭 때문인가, 듣다 보니 어째 기분이 좀 묘하다.

"그리하여 당신의 곁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저기, 막내 신관님?"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세르펜스의 기도문을 끊었다.

룩스메아의 열렬한 신자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면, 엄숙하게 기도문을 읊는 데 무슨 짓이냐며 화를 냈을 거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룩스메아를 향한 기도를 곧장 때려치웠다.

"말씀하십시오."

"···뭔가 좀 그런데요?"

"그러하다니, 무엇이 어떻게 말입니까?"

괜히 나를 찬양하는 것 같아서 낯간지럽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거야말로 낯부끄러워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신격화해도 정도가 있지.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을 붙잡고, '그거 너희 신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소리 아냐?' 같은 말을 한다면.

'미친놈을 넘어서, 그건 그냥 이단이지.'

교황이 와도 보호를 해주기는커녕, 반란을 준비하는 거냐며 심판을 내리려 할 거다.

유지스라면 내 심정을 이해해 줄 테지만, 이 자리에는 유지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세상이 이렇게나 혼란스러운데. 신에게 잘 돌봐달라는 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도 있지!'

그냥 요즘 시기에 흔히 쓰는 표현이겠거니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세르펜스의 기도문 낭독은 이미 멈췄고, 이제 됐으니까 계속하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서 나는 괜한 꼬투리를 잡았다.

"거···, 내용이 대체 왜 그 모양입니까? 동냥하는 것도 아니고, 순 뭐 해달라는 얘기뿐이네."

"원래 기도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존재가 염원을 이루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삶이 괴롭다면 구원을, 현재가 만족스럽다면 보전을. 기도는 그것을 신께 간청하는 의식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문에는 항상 소망이 담겨있고, 그저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세르펜스가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듯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언뜻 들으면 자신의 목소리가 신에게 닿길 바란다며 기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리 들으면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기다리는 행위라며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그렇게라도 기댈 곳이 필요하다며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에인젤 주교님,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떠한 삶을 바라십니까?"

느닷없이 세르펜스가 기습 질문을 던졌다.

대화의 흐름에 따라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라기엔, 세르펜스의 두 눈에 탐구심이 가득했다.

유지스와 합동해서 준비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지는 물음이다.

'네가 몸···은 이미 다 큰 것 같고. 그만큼 마음도 무럭무럭 자라서 신체 나이를 따라잡고, 정신 건강한 어른이 되는 거!'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관중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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