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45)
"저랑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 거요."
"그런 것 말고 개인적인 소망은 없습니까? 또, 주교님의 기준에서 행복이란 어떤 것입니까?"
대충 넘어갈 만도 한데, 세르펜스가 집요하게 물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묻는 것도. 가벼운 농담으로 묻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욱 곤란하다.
개인적이고 행복한 삶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돈 많은 백수다. 그리고 세르펜스에게는 이것을 진짜로 들어주고도 남을 능력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보좌관이 아니게 된다면, 녀석과 항상 같이 있을 수 없게 된다는 거다.
즉, 우스개로 말했다가 세르펜스를 울리기 딱 좋은 답변이다.
"어···, 풍족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대답해주십시오."
어째 취조라도 당하는 듯하다.
효도하고자 하는 의욕은 높이 사줄 만하나, 이렇게 억지로 캐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막내 신관님. 행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애초에 막내 신관님의 기도문도 곁에서 잘 보살펴 달라는 것뿐이었지, 별거 없었잖아요?"
"별거 없지 않습니다."
세르펜스가 정색했다.
녀석의 보호자로서 장담하건대, 저건 연기도 뭣도 아닌 진심으로 짓는 표정이었다.
이 말인즉. 세르펜스의 기도문은 룩스메아에게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 맞았던 거다.
'잔망스럽기는···.'
저번에 술까지 먹여가며 털어놓으라고 할 때조차,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더니.
이제는 기도문 형식을 빌려, 룩스메아에게 기원하는 척하며 내게 간원하기에 이르렀다.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고, 선물을 사주는 건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 할아버지가 값비싼 장난감을 사줬으면 좋겠다며, 일주일 전부터 편지를 써놓고 기대하는 어린이가 따로 없다.
"대충 요령은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우니까 좀 떨어져요."
"···예?"
"요컨대 신 룩스메아를 찬양해서 기분을 띄워 놓고, 그 틈을 타서 이것저것 부탁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입 밖으로 내뱉고 났더니, 룩스메아가 굉장히 하찮게 느껴진다.
절대자라기보다는 뭐랄까. 입에 발린 칭찬을 받고 우쭐해져서, 이것저것 퍼주는 호구의 이미지가 강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괜히 찔려서,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룩스메아 님더러 칭찬에 너무 약한 거 아니냐고 따지는 건 절대 아닙니다!"
"룩스메아 님께서 뭔가 신호를 주신 건가요?!"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었는데, 유지스는 다르게 해석했나 보다.
세르펜스의 손에서 시야를 가리는 성서를 뺏어 들자,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하는 유지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요, 나중에 혼날까 봐 미리 선수 친 것뿐입니다. 실시간 연결은 안 된다고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알고 있지만,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라던가, 예의 주사기 건도 있고 해서···. 특별히 계시를 내리신 건가 했죠."
유지스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정도 잊은 채 말하는 거로 봐서, 적잖이 실망했나 보다.
악숭이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신성력을 억제하는 물건이 튀어나왔으니. 이 대륙 출신의 사람이라면 큰 충격을 받고, 신의 계시를 간절하게 바랄 만도 하다.
'플라가가 계속 신성력을 소모하라고 종용했던 걸 보면, 남은 신성력이 많으면 효과가 덜한 것 같기는 한데···. 두 방, 세 방 연달아 맞게 되면 세르펜스도 좀 위험한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불안해졌다.
세르펜스가 적의 공격에 쉽게 당할 리는 없지만, 지친 상태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은가.
교단 측에서 해결법을 찾아주면 좋으련만.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설정을 깜박하고 말해버렸네요."
유지스가 뒤늦게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사람이 간절해지면 그럴 수도 있죠. 나중에라도 추가로 계시를 받으면 말씀드릴 테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나는 유지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옆에 앉은 세르펜스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꾹꾹 밀어냈다.
떨어지라고 말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붙어있다. 자기는 안 덥다, 이건가?
신체 감각은 예민하면서 더위와 추위에는 강하다니. 뭐 이딴 이상한 밸런스가 다 있나 싶다.
내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세르펜스가 크게 충격받은 표정으로 에드나를 쳐다보았다.
'···에드나는 왜?'
그 의문을 입에 올리려는 찰나.
"잠깐, 지금 설정을 깜박하고 말했다고 하셨습니까?"
베일이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기라도 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모습에 유지스가 아차 하며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입을 가렸다.
"···제가 또 말실수한 건가요?"
"굳이 따지자면 말실수는 주교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기운 빠진 유지스의 말에 윈스톤이 대답했다.
덤덤하기 짝이 없는 말투 때문에 위로가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먼저 오해하게끔 말을 한 탓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둘의 대화에 베일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해갔다.
진도가 빠르기로 유명한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도중, 졸다가 강의 종료 10분 전에 깨어난 학생 같다.
쉽게 표현하자면, 이해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은 이야기에 정신을 아예 놓아 버린 표정이다.
아무래도 내 의문은 잠시 미뤄두고, 베일의 의문을 먼저 풀어주어야 할 성싶다.
"제가 신의 사자라는 건 악숭이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모르시는 걸 보면 그놈들 편은 확실히 아니신 모양입니다? 좋아요, 인정합니다. 이로써 모든 의심은 풀렸어요. 기뻐하셔도 됩니다."
나는 성서를 잠시 무릎에 올려놓고, 짝짝짝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이제는 베일이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정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는 말입니까?"
"와, 이 사람 아주 큰일 날 사람이네! 설정이고 뭐고, 신의 사자를 함부로 사칭하면 안 되죠! 그거 신성 모독입니다, 신성 모독!"
내가 짐짓 호들갑 떨며 말하자, 베일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이라던가, 큼직하게 뜨여진 눈이라던가.
그런 요소들을 살펴봤을 때, 의식해서 고개를 흔들었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베일은 본인이 고개를 내젓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을 거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저와 막내 신관님. 아니, 세르펜스가 친구 사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국의 공작인데, 고작 설정 때문에 군말 없이 보좌관의 심부름을 하고, 눈높이를 맞추겠다며 무릎까지 꿇고 그랬을까요?"
나는 말을 멈춘 후, 두 뼘 정도 떨어져 앉은 세르펜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기운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녀석이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시온은 저에게 그러한 대우를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세르펜스가 신관 프레이 설정은 잠시 미뤄두고, 대외펜스의 미소를 만면에 머금으며 말했다.
직전에 무릎 꿇은 얘기를 했는데,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는 표현을 꼭 붙여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신관복을 입고서 그리 말하니, 괜히 내가 숭배의 대상이라도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얘가 좀···, 과하긴 한데. 평소에도 이러는 건 아니거든요?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지금 신관 놀이에 빠져서···. 아니, 저하께서 제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고 계시니까, 얘가 좀 과장해서 말하는 겁니다. 네, 그렇고 말고요."
"안 듣고 계신 것 같은데요?"
내가 주절주절 떠들어대자, 유지스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째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이더라니. 베일은 초점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큰 충격을 받고 현실을 부정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보고 있노라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초콜릿을 두 개 꺼내서, 하나는 세르펜스에게. 또 하나는 유지스에게 던졌다.
세르펜스는 초콜릿을 자신의 입에 넣었고, 유지스는 베일의 입안에 쏙 넣어주었다.
"자, 그럼 각자 하던 거나 마저 합시다!"
"네, 주교님!"
다시 설정 놀이를 시작하자는 내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유지스가 '주교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대답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서 기도문 작성을 시작했다.
'세르펜스처럼 기도문을 즉석에서 지어내고 줄줄 읊는 건 못 하니까, 미리 써둬야지.'
빈 종이를 노려보다가, 가장 먼저 떠올라 적은 내용은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로 시작하는 문구였다.
역시 기도문에 이 문장이 빠질 수는 없다.
'그런데 이거 말고도,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았나?'
잘 기억이 안 나는 거로 봐서, 별로 중요한 건 아닌가 보다.
* * *
다음 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기도회를 열려고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았다.
그때 베일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주교님께서 신의 사자라고요?"
그 얘기가 나왔던 게 어제 오전이건만. 참 빨리도 되묻는다.
"제가 아니라,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보좌관이 신의 사자입니다. 그러니 만나게 된다면 언행에 주의하며, 예를 갖추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난 정말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었는데, 베일에게는 농담 따먹기처럼 들렸나 보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하는 모양새가 자못 심각하다.
"참고로 이 사실은 교단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거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는 마세요."
"악마 숭배자들은 다들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베일이 미간을 좁히며, 따지듯 물었다.
확실히 정황을 모르고 들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만도 하다.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보좌관이 신의 사자라고 밝히지 않는 건, 귀찮아지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안전을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안전보다 귀찮음이 우선이라고?"
"잘 생각해 봐요. 악숭이들 다 물리치고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나서도, 신의 사자라는 단어는 저를···이 아니라. 시온 님을 따라다닐 거 아닙니까? 그리고 신의 사자로서 알맞은 격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멋대로 재단하고 간섭하려 들겠죠."
내 대답을 들은 베일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평상시 내 자유분방한 모습을 익히 알고 있기에 저러는 걸 테다.
"교단은 신의 사자에게 협조적이니까, 비밀로 해 달라고 하니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거죠. 하지만 악마 숭배자 쪽은 마왕이 멋대로 떠들고 다닌 거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제가 마왕의 입을 막을 수 있으면, 입만 막았게요? 아무것도 못 하게 꽁꽁 묶어서, 마계 깊은 곳에 처박아 버렸지."
"···마왕이 뭔가 잘못 알고 말한 거 아닙니까?"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믿을 수 없었던 베일은 기어코 마왕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렸다.
악숭이들이 들으면 발작할만한 소리다.
"공교롭게도 그렇지가 않아요. 딴에 반 쪼가리나마 신이랍시고, 이래저래···.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왕 놈이 선택의 날 이후에 세르펜스 님을 이렇게 저렇게 하려 했는데, 시온 님께서 여차여차해서 구해내셨고. 그로 인해 마왕이 '신의 사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여기저기 들쑤셔서 들킨 겁니다."
"······."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시죠?"
'그런 부류'가 이 세상에서는 기본 상식인지, 베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만은 떫은 감이라도 베어 문 것처럼 일그러졌다.
대충대충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못마땅하기도 하고, 뭉뚱그려 표현한 것 때문에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수긍할 수밖에 없어서 저렇게 구린 표정을 짓는 걸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