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3)
"식사를 마친 후에는 함께 터를 보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이 영주는 우리를 이대로 네퀴테 령에 정착시킬 생각인가 보다.
신전이 없는 영지 중에는 이곳보다 넓고 부유한 영지도 있으니까. 다른 곳을 둘러보기 전에 계약서 도장을 땅땅 찍어놓고 싶은 거겠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마차를 타고 성으로 오는 동안 적당히 둘러보기도 했고, 앞으로 방문해야 할 영지가 많아서···."
나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가볍게 튕겼다.
이곳의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 자세히 알아볼 것도 없이, 가뿐한 마음으로 거르면 되는 놈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가 영주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야지, 앞으로가 편해질 테니까.'
또한, 조금 전에 영주가 여차하면 밀어버려도 된다고 말했던 건물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지 마시고, 오늘 하루는 제 성에서 푹 쉬었다가 내일 출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국에서부터 먼 바스툴 왕국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하루쯤은 신 룩스메아께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흐음, 어쩔까나~?"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없어 보이는 놈이 룩스메아의 이름을 거론하는 꼴이 기가 찼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민하는 체했다.
"더군다나 아예 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신전터를 알아보려고 영지를 둘러보는 매우 중대한 업무를 하면서 바람도 쐬고. 그러고 나면 시간이 늦어질 테니 성에 돌아와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좋은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습니까?"
영주가 알랑방귀를 뀌어댔다.
제 딴에는 내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한다고 한 것 같으나, 그냥 자신의 계획을 주절주절 떠들어댄 꼴이었다.
터를 보러 가자는 것은 수단에 불과했고, 진짜 목적은 우리를 붙잡아 두는 거였다.
'그러면서 내게 술과 음식을 베풀어 점수를 따고. 술에 취해 흥이 오를 대로 오를 무렵, 은근슬쩍 정착 얘기를 꺼낼 작정이겠지. 아니면 만취하도록 술을 먹여놓고, 계약까지 쓱싹 해치워 버리거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영주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하핫, 영주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잘 생각하신 겁니다! 제가 오늘 하루 완벽하게 모실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내가 자신의 말에 혹해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지, 영주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 티끌만치도 기대가 안 된다.
지금 먹고 있는 음식 수준만 봐도 그렇다. 이 정도 실력이면 공작저의 주방장까지 갈 것도 없이, 주방 시녀 선에서 정리되는 수준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음식 맛도 제대로 모르는 놈이 와인 맛이라고 제대로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비싼 마차를 꺼내와 봤자, 공작저에 세워진 그저 그런 마차보다 불편할 게 뻔하다.
'게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또 어떻고?'
프라시더스 공작령에 비하면 도로도 제대로 안 닦여 있고, 거리의 청결 상태는 말할 것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안색까지 좋지 않다면, 오히려 기분만 잡치게 될 테다.
얼굴에 티 나지 않도록 표정 관리에 특별히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벌써 그만 드시는 겁니까?"
영주가 어리둥절하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얼마 먹지도 않고 식사를 중단하겠다는 행동을 취했으니 의아해하는 거겠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배가 완전히 찬 건 아니다. 하지만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원재료가 가진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주방장의 음식 솜씨도 문제였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영주의 존재 자체가 입맛을 떨어뜨린 탓이다.
식욕이 돋지 않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유지스는 샐러드 풀떼기만 우물거렸고, 세르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깨작거렸다.
유일하게 에드나만이 버려질 음식이 아까워, 꾸역꾸역 새끼 멧돼지 다리를 뜯고 있었다.
"저녁에는 이런 식으로 상에 한꺼번에 올리지 말고, 코스 식으로 준비해 주실래요? 식으니까 맛이 별로네요."
"아···, 네. 그러도록 하죠."
영주가 무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영주님은 더 드시려면 드세요. 그동안 저는 과일이나 좀 먹고 있죠, 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던지듯 식탁에 내려놓으며, 상 끄트머리 쪽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턱짓했다.
벽에 붙어서 대기하던 시녀가 다가와 내 앞에 놓은 음식 그릇을 치우고, 깨끗한 접시 하나를 그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자리로 과일 바구니가 옮겨졌다.
그 속에 담긴 포도가 참 탐스럽다고 생각하는 찰나, 세르펜스의 손이 뻗어졌다.
녀석은 포도를 알알이 따서 자신의 냅킨으로 닦기 시작했고, 반들반들해진 포도 알갱이가 내 접시 위에 쌓여갔다.
'얘가 대체 왜 이런데?'
농약도 없는 세상에서 이게 무슨 노동력 낭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얘가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에 먼저 의문이 들었다.
부채질까지는 내가 더위를 먹을까 걱정돼서 그러나 보다 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다.
'참나. 생선 요리가 나왔으면, 가시까지 발라줬겠네.'
나는 포도를 한 움큼 집어서 입안에 털어놓고, 우걱우걱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세르펜스가 나에게 미안해하며, 최대한 내 편의를 봐주려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편의의 영역으로 봐도 되는 걸까? 포도를 안 닦고 먹는다고 건강에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오죽했으면 영주까지 나를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볼까.
평소에도 내가 세르펜스에게 이런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게 했다고 오인한 것이리라.
그 정도로 세르펜스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무표정한 얼굴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무조건 극진히 모신다고 다 효도가 아닌데···.'
지금 세르펜스가 하는 짓은 정원을 관리하는 부모님이 힘들어 보인다며,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원사를 고용해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정원 관리가 부모님의 유일한 취미일 수도 있는데. 그냥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녀석의 이런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비유 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눈앞에 놓인 상황만 봐도 이건 아니올시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남의 포도나 닦아주고 있다니.
그 대상이 나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영 마뜩잖다.
'그렇다고 애써 닦아준 걸 안 먹을 수도 없고!'
나중에 한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세르펜스가 닦아 놓은 포도를 또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세르펜스가 안 그런 척하면서 자랑스럽게 가슴을 활짝 폈다. 매우 뿌듯한가 보다.
에드나는 그런 녀석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 * *
다행히도 포도가 물리기 전에 영주의 식사가 끝났다.
"어차피 묵어가실 예정인데, 짐은 그냥 두고 나가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제외한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발밑에 두었던 짐가방을 손에 들자, 영주가 그것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어차피 중요한 물건들은 아공간 주머니에 담았으니 두고 가도 큰 상관은 없지만, 내키지 않는다.
사용인들에게 뒤져보라고 시킬 게 분명하니까.
"이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십니까?"
"뭔가 중요한 게 들어있는 겁니까?"
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질문하자, 영주가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 훔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가령 예를 들면 신전 설립과 관련된 서류라던가.'
내 개인적인 감정을 보탠 해석이었지만, 실제로도 틀리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이 안에는 신관복이 들어있습니다."
"네, 그렇겠죠."
영주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갈아입을 옷이 끝이냐는 듯, 멀뚱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매우 살살, 주먹으로 토닥거렸다.
"제복이란 그 집단을 상징하며, 하나로 묶어주는 아주 신성한 것입니다! 그런 물건을 낯선 곳에 두고 다닌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갓 신관이 됐을 때는요, 신관복을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아, 물론 입고 있는 거 말고 예비용을 포함해서요."
"예? 그게 무슨···?"
내 꼰대 발언에 영주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진짜로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니, 해석을 부탁하는 건 아니고 그냥 저도 모르게 흘린 말일 테다.
그러니 무시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요즘 것들은 그냥 교단에서 무료로 나눠준다고, 조심성 없게 옷을 막 굴린단 말이죠. 특히 막내 신관님! 막내 신관님이 제일 요주의 인물입니다! 정식 신관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옷을 하나 찢어먹고 말이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처음 신관이 되었을 때, 그게 너무 감격스러워 신관복을 모시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좋아요, 지켜보겠습니다. 옷 간수 잘하세요."
나는 세르펜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준 후, 뒷짐을 지고 식사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앞장서세요."
식사실까지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왔을 뿐. 나가는 길은 외워두지 않았기에, 잠시 걸음을 멈춰서 영주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영주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그리고 한참 뒤,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 표정이 마치 '내가 왜 이런 걸 직접 하고 있지?'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나더러 어쩌라고?'
떠오른 생각을 여과 없이 표정에 담아 표현하자, 영주가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묵묵히 앞장서 걸었다.
작게 이가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냥 넘어갔다.
'신전이 자리 잡고 나면 부려 먹어 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헛된 꿈일 테니까.'
성 밖으로 나온 우리는 마차에 올라탔다. 아니, 마차에 탄 건 나와 세르펜스와 에드나. 그리고 영주뿐이다.
유지스와 윈스톤과 베일은 주변 경계를 핑계로 마차 주변을 호위하며 말을 몰았다.
윈스톤과 베일은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고, 유지스는 자리 때문에 적당히 핑계를 둘러댄 게 아닐까 한다.
마차는 6인승이었고, 5명이 타려면 누군가 한 명은 영주의 옆에 앉아야 하니까.
높은 확률로 그 한 명은 에드나가 될 테지만, 유지스는 자진해서 말을 선택했다. 현명한 선택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맞은 편이라고 기분이 썩 상쾌한 것은 아니니까.
"신전 입지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입니까?"
자신이 기피 대상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영주는 속 편하게 질문을 던졌다.
성기사와 이단 심문관이 호위해 주는 이 상황이 흡족했는지, 한껏 구겨졌던 표정도 활짝 펴졌다.
"뭐니 뭐니 해도 접근성이겠죠? 신자분들께서 많이 찾아와 주셔야, 룩스메아 님께서도 기뻐하실 테니까 말입니다."
"호오, 역시나 주교님께서는 머리가 좋으십니다."
신앙심이 깊다는 답변이 돌아오겠거니 예상했는데, 영주는 생뚱맞게도 머리가 좋다는 아부를 했다.
'설마 내가 헌금 때문에 접근성을 운운했다고 생각하나?'
굳이 아니라고 정정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냥 오해하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내가 돈을 밝힌다고 소문이 퍼지면 영주들이 뇌물을 찌를 테고, 그런 놈들은 바로 거르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