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9)
"어쨌든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라니까,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내가 너그러운 체하며 말하자, 세르펜스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에드나 앞에서 자신을 '야옹아'라고 부를 땐 언제고, 자기는 어째서 그걸 인정하면 안 되느냐.
대충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하다.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세르···. 아니, 아도르."
나는 녀석을 이름으로 부르려다 말고, 세례명으로 바꿔서 불렀다.
그러자 녀석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폈다. 불퉁하게 튀어나왔던 입술도 쏙 들어갔으며,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도르가 자기 자신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한들, 자신의 품위를 생각했다면 야옹 했다는 말이 쉽게 나왔겠습니까?"
"내 품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 그래요? 그러면 제가 남들 앞에서 세르펜스에게 반말을 찍찍 날려도 되겠네?"
"그렇게 해서 선우가 만족한다면, 그래도 된다."
세르펜스가 그리 말하며 순종적인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진짜 작정하고 내 기분에 맞추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싫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반말이 친근함의 척도도 아니고. 그냥 익숙하게 존댓말 할래요."
"예전부터 내게 말을 놓고 싶어 했잖은가?"
"그거야 친해지기 전에는 거리를 더 좁혀보려고 그런 거잖습니까? 이후에는 세르펜스가 질색하니까, 놀리느라 그런 거고···."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세르펜스는 내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보고 나서야, 부릅떴던 눈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다행히도 내 말을 믿어준 것 같다.
"으음···, 그래. 잘 생각했다. 내가 선우를 비호하더도, 누군가는 뒤에서 헐뜯으려 할 테니까. 당신을 위해서도 그리하는 게 낫다."
사람들이 세르펜스는 함부로 대할 수 없으니, 상대적으로 만만한 나를 공격할 거라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째서 반말을 해도 된다는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뒤에서 떠드는 놈들을 깡그리 치워버릴 속셈이었나?
"얘기가 좀 샜는데···. 아니지? 방금 세르펜스가 한 얘기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인데, 진짜 그러지 좀 마세요. 제가 남들 앞에서 세르펜스에게 반말하며 얕잡아 보면, 사람들이 저만 욕할 것 같아요? 그런 저를 두둔하는 세르펜스를 더 비웃을 겁니다."
"알고 있다."
"네, 당연히 알고서 한 소리겠죠. 그러니까 제가 더 속상한 거고요."
"그러지 마라."
세르펜스가 청승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되니까, 자기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얼굴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녀석이 알고나 있을까?
"아도르야말로 그러지 마세요. 지금 세르펜스는 제 기분보다 자신의 가치를 아래로 두고 있잖아요?"
"선우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했잖은가. 그러니 나도···."
"그거랑은 달라요. 기분이란 원래 들쑥날쑥해서, 즐거운 일이 있으면 좋았다가도 슬픈 일이 있으면 우울해지고 그렇잖아요? 굳이 세르펜스가 바짝 엎드리지 않아도, 대등하게 친구로서 노는 것만으로도 저는 즐겁습니다!"
예전에 내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둥, 헛소리해댔을 때 즉각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어째 그때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세르펜스가 본인을 낮추는 건 자기 자신에게도 실례지만, 세르펜스를 존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중에는 저도 있고, 유지스도 있고. 뭣보다 세르펜스를 주군으로 모시는 윈스톤은 대체 뭐가 됩니까?"
"으, 음···."
이제야 내 말을 좀 알아먹은 눈치다.
세르펜스가 가책을 느끼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침음을 흘렸다.
"마음이라는 게 내킨다고 바로 고쳐먹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아도르가 귀중한 존재라는 것만큼은 절대 잊지 마세요."
"그···래. 유념해 두도록 하지."
녀석은 고개를 아래로 내린 채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성검의 주인이나 제국의 공작이 아니라, 그냥 세르펜스 자체로 귀중하다는 말이었음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다.
"그럼 앞으로는 저만 챙기지 말고, 아도르도 잘 챙겨주시는 겁니다?"
"노력해 보겠다."
알겠다고 말하고 넘겨도 됐을 일을 굳이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든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제대로 대답하라고 다그쳤겠지만, 세르펜스는 노력했는데 안 돼서 어쩔 수 없었다며 오리발 내미는 녀석이 아니니까.
상황을 빨리 넘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문제를 마주하고 고치려 한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흐뭇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린다.
"아 참. 그리고 에드나 씨가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몰라도, 그냥 다 잊어요. 남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포도도 그만 닦고요."
"부채질은?"
"···제가 너무 더워 보일 때만 허용하겠습니다."
사실 부채질은 조금 만족스러웠던 터라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리 말하니, 세르펜스가 반색하며 좋아했다.
저 표정으로 보아 부채질은 순수하게 세르펜스 혼자 떠올린 효도법인가 보다.
'하기야 프뤼네 왕국은 일 년 내내 춥거나 서늘한 기온이 이어지니까. 아니마가 부채질할 일은 없었겠지.'
그건 그렇고 시간 나는 대로 에드나와 대화를 해봐야 할 성싶다.
"자, 자! 이 문제는 일단락됐으니, 이만 다음 주제로 넘어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 혹시 선우는 '그자'의 이름을 모르는 건가?"
"아, 아하하···."
주제를 넘기자마자 세르펜스가 핵심을 찔렀다.
내가 어색하게 웃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녀석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쩔 수 없잖아요! 처음 등장해서 자기소개할 때만 잠깐 나왔을 뿐, 이후에는 세라투 후작이나 바스툴 왕국의 재상이라고만 불렸고, 출현 빈도도 무진장 낮았고, 베일이 죽고 난 뒤에는 등장 자체를 안 하는데! 성이라도 기억하는 게 무지무지 대단한 거거든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렇지만 할 예정이었잖아요."
"모르는 척 넘어갈 생각이었다."
세르펜스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이미 표정으로 다 드러내 놓고 퍽 잘도 넘어가겠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세르펜스가 멋쩍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아공간 주머니를 발견했던 장소도 그렇고···. 사건은 잘만 기억하면서, 유독 지명과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군."
"세르펜스는 머리가 좋아서 뭐든 잘 기억하지만, 일반인은 달라요. 사건이나 대사처럼 '흐름'을 기억하는 것과 단어를 기억하는 건 별개입니다."
"그런 건가?"
세르펜스가 가슴을 활짝 펴고 대답했다.
내 말속에서 자신을 향한 칭찬을 뽑아내서 들은 거다. 예전에 장점 말하기 시간에 '머리가 좋다.'를 알려줬던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네, 그렇습니다! '많이 괴로운가? 그쪽이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다 기쁩니다.' 따위의 오글거리는 대사는 기억나도, 악숭 세력의 끄나풀 이름 같은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고요!"
"그게 '오글거리는 대사'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인가?"
"지금의 세르펜스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밖에 안 느껴지는데요?"
"···내가 한 말이었군."
세르펜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많이 부끄러운가? 녀석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쁘다.
"아무튼 문제는 두 개입니다. 세라투 후작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고, 현재 악숭이와 접촉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불확실해요."
"어쩌면 그자가 누구인지, 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르펜스가 무슨 수로요?"
"그자를 바스툴 2왕자에게 붙인 건 나라고 하였잖은가?"
간신히 부끄러움을 이겨낸 세르펜스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표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자기가 이용해 먹기 편해 보이는 놈을 골라 보겠다는 소리다.
"가장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길은 세라투 가문을 이단으로 몰아서 전부 없애 버리는 거지만, 당신은 안 된다고 하겠지."
"아무래도 그렇죠. '그자'에게 접근해서 베일을 부추기게 하고, 뒤에서 조종한 건 세르펜스였으니까요. 악숭 세력이 이번에도 그 사람에게 접근했는지는 미지수라서···."
"선우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하지 않으면 될 텐데 왜 저러나 모르겠다.
기회를 얻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러는 건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수습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 두 가지가 합쳐진 복합적인 이유에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르펜스는 순순히 의견을 접었다.
"하지만 그자가 악숭이와 관련 없다는 게 판명이 나더라도, 베일 근처에는 못 가게 할 겁니다."
"선우는 그 왕자가 왕위에 오를 거라고 생각하지?"
"그렇긴 한데, 그건 왜요?"
"현재 세라투 가문이 자작가라고는 하나,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세르펜스가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말을 했다.
물론 그렇게 들린다는 거지, 매우 중요하고 확실한 연결점을 가진 얘기였다.
[성검의 주인]에서 '그자'가 베일에게 신임을 얻었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재상 자리와 후작 작위가 굴러들어오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혼란스러운 정세와 자작의 수완을 생각해 봤을 때, 세라투 가문은 머지않아 중앙으로 진출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 교두보로 준비한 것이 20여 년 전, 영지 확장이겠지."
"예? 그게 중앙 진출을 위한 준비였다고요?"
"혹은, 바스툴 왕국이 혼란 속에서 무너지게 됐을 때. 기회를 노려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 위한 발판일 수도 있다.”
성검이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이니까, 얼추 비슷한 시기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일개 자작가가 백작령보다 넓은 영지를 보유한다면 주변에서 고운 눈으로 바라볼 턱이 없다.
돈이 많은 것쯤은 뇌물을 찔러주면 좋게좋게 넘어가겠지만, 땅은 그렇지가 않다.
자존심이 구겨진 고위 귀족들이 그들을 물어뜯으려 들 테다.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로 나라에 큰 혼란이 생길 예정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면 사정이 다르지.'
땅을 사들여서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넓히고, 폭풍전야의 평화 속에서 내실을 다진다면 확실하게 기반을 쌓을 수 있다.
주변의 방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놈은 없을 테니까.
혼란이 닥치기 전. 병력과 물자를 최대한 끌어모아야 할 시기에, 자존심 때문에 큰 피해가 예정된 싸움판에 뛰어드는 머저리는 매우 드물다.
있어도 머리가 나쁘니 손쉽게 치워버릴 수 있을 테고.
"와···! 저는 그냥 그냥 땅을 샀는가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정치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역시 우리 애는 똑똑해! 아도르 천재! 완전 최고야!"
내가 박수를 짝짝짝 치면서 칭찬을 쏟아붓자, 세르펜스가 으쓱으쓱 올라가는 어깨를 숨기지 않으며 배시시 웃었다.
누가 봐도 우쭐거리는 모습인데 얄밉기는커녕 뿌듯하기만 하다.
"반역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실패했을 때의 위험도 크니, 아직은 양쪽에 발을 담그고 기다리는 중일 거다."
"아, 그래서 중앙 진출을 먼저 말한 거로군요? 베일이 왕위에 오른다면 중앙에 진출할 테니까···."
"그래. 하지만 반역에 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2왕자가 왕위에 오르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내분이 생기게 될 테고, 이는 곧 왕국의 혼란을 뜻하니까. 그 틈을 노리고 세라투 자작가가 반역을 일으킨다면 피해가 상당할 거다."
일이 골치 아프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