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53화 (453/925)

453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3)

[ 나 원래 머리 좋거든? 잘 안 써서 그렇지. ]

[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글로도 작성하지 않았다. ]

[ 표정으로 말했어. ]

내 단호한 문장에 세르펜스는 그 어떤 글도 적지 못했다.

녀석은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괜스레 딴청을 피웠다. 물을 찰방거리는 데 집중하는 그 모습이 물장난치는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나는 그런 세르펜스를 잠시 흘겨보다가, 종이에 글을 써서 녀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 아무튼 그건 됐고, 이제 설명이나 해 줘. ]

[ 그게 중요한 일인가? ]

언제나 그러했듯, 이번에도 당연히 설명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르펜스가 펜을 들어 적은 글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모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일이냐고 되묻다니···.'

너무 예상 밖의 일이라 당황한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내 표정을 확인한 세르펜스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 '세라투 후작'의 정체처럼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하는 내용이라면 몰라도, 세라투 자작에 관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은가. 그래서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건지 물어보았다. ]

이는 곧,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설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 내게 알려주기 싫어? ]

[ 치사하다. ]

[ 뭐가? ]

[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설명해 줄 수밖에 없잖은가. ]

평소와 똑같은 정갈한 필체인데도 투덜거림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그냥 알려주기 싫으냐고만 물어봤을 뿐인데, 대체 뭘 어떻게 해석했길래 저런 반응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성검의 주인] 속 타락펜스가 어째서 현 세라투 자작 대신 그의 자식을 이용했는지, 그에 관한 세르펜스의 견해를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세르펜스에게서 설명을 강요한 꼴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무언가 적으려는 세르펜스의 손을 치워낸 후 글을 적었다.

[ 설명하기 싫은 이유부터 제대로 알려 줘. ]

세르펜스의 물음대로.

[성검의 주인]에 등장한 타락펜스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런 건 이제 와서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세르펜스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그게 더 중요하다.

나는 세르펜스를 노려보듯 빤히 쳐다봤고, 세르펜스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마주 응시하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펜을 들어 종이에 글을 끼적거렸다.

[ 그자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다. ]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 속의 자신을 타인처럼 지칭했다.

설명하기 싫은 이유에 대한 답변으로 보이지 않는 글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따지지 않았다.

아직 녀석의 대답은 끝난 게 아니니까.

세르펜스는 제 생각을 어떻게 글로 풀어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물에 담근 손을 성의 없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만이 욕실 안에 메아리쳤고, 그 때문에 1초가 마치 1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시간을 죽 잡아당겨서 길게 늘인 것 같다.

[ 그럴 때마다 그자와 내가 동일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

마침표로 찍힌 점이 점차 크게 번져 나갔다. 세르펜스가 점을 콕 찍은 상태로 손을 멈춘 까닭이다.

'그럴 때마다'라는 표현으로 보아, 오늘 갑자기 떠오른 고민이 아닌 듯하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리다가. 볼타 산맥에서 성검과 접촉하고 난 뒤 꿈을 꾼 것이 기폭제가 되어.

말이 아닌 글로 대화를 나누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심리를 드러낸 것이다.

'뭐라고 적어야 하지?'

녀석이 바라는 대답은 알고 있다.

'그자'와 세르펜스는 별개의 사람이고, 세르펜스는 머리가 좋아서 '그자'의 행동을 추측할 수 있는 거다.

그렇게 글을 써서 보여주면 세르펜스는 만족할 거다. 그리고 녀석이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정말로 녀석에게 좋은 일일까?'

나도 지금의 세르펜스와 '그때'의 세르펜스를 구분하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한 구분일 뿐이다.

그때의 세르펜스 또한 세르펜스라는 사실은 결단코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실수했다면, 지금의 세르펜스 또한 같은 절차를 밟았을 테니까.

'그리고 좀···. 아니, 많이 불쌍하잖아.'

[성검의 주인] 속의 그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다.

많은 이들을 고통에 빠트렸고, 그중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기의 세르펜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채로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한 내정자로서 살았고, 성검에게 선택을 받지 못함으로써 살아온 삶을 부정당했다.

그리고 끝끝내, 휴마누스에게 부정당하며 생을 끝마쳤다.

'[성검의 주인] 작가인 솔레르티아가 진짜 결말은 따로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부정당한 셈이고···.'

그리고 이제 실재하지 않는 시간 속의 존재가 되어버린 지금.

현재의 세르펜스에게까지 부정당하는 건 너무 비극적이다.

그렇다고 동정심만으로 세르펜스에게 '그 시기의 자신'을 부정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그냥 녀석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누구나 살다 보면 나쁜 생각을 한두 번쯤은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든, 주변의 상황에 떠밀려서 그렇게 된 것이든.

'그럴 때마다 자책하면서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는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서 살아온 삶과 달라지는 게 없다.

그를 제약하던 틀이 크고 넓어졌을 뿐. 당장은 그것만으로 숨통이 트일지 몰라도, 익숙해지면 또다시 갑갑함을 느끼게 될 거다.

[ 나는 아도르가 그 시기의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되, 그 세르펜스가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계까지 내몰렸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

[ 그래서 그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내가 고민해 보길 바라서 그런 질문을 한 건가? ]

[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 커. 그 시기의 세르펜스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궁금해서. ]

[ 나는 하나도 안 궁금하다. ]

세르펜스는 그렇게 적으며, 심통 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면 욕실 밖으로 나가버리면 될 텐데.

녀석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물을 참방거렸다.

[ 내가 에일리히 님을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은 보고받아서 알고 있지? ]

[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나오지? ]

[ 아무튼. ]

[ 그래. <선우>가 쓴 건 반성문이었지만, 유지스가 당시의 대화 내용을 간추려 보고한 덕에 잘 알고 있다. ]

보고서를 가장 먼저 제출한 사람은 제온이었을 텐데.

그 점을 지적하려다가, 논점에서 너무 멀어질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 그때 에일리히 님께서 제온의 귀를 잘라 보내며, 내게 약속 장소에 나오라고 협박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얘기도 하셨는데. 그 내용도 적혀 있었어? ]

[ 당시 부 집사였던 현재의 집사가 올린 보고서에 쓰여있었다. ]

[ 그냥 짧게 제온이라고 쓰면 될 텐데, 참 번거롭게도 산다. ]

자기가 생각해도 반박할 말이 없는지 세르펜스가 또다시 딴청을 부렸다.

아무튼 그 내용이 다소 과격한 터라, 유지스는 세르펜스 배려 차원에서 그 내용을 어물쩍 넘겼는가 보다.

자신의 귀를 자르네 마네 하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적은 제온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 그래서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지? ]

[ 그리고 내가 살던 세상에는 범죄심리분석 수사관이라는 직업이 있어. ]

세르펜스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자꾸 상황과 맞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도 하건만.

녀석은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전부 써 내려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까 내가 녀석을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 직업명에서 알 수 있듯, 사건이 벌어지면 단서들을 조합하고 분석해서 용의자를 추려내거나. 그렇게 잡아낸 범죄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일을 해. ]

'프로파일러'라는 명칭으로 더욱 잘 알려진 직업이다.

세르펜스는 내 설명을 읽고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펜을 들었다.

[ 이단 심문관과 비슷하군. ]

[ 종교 쪽이 아니라 국가 소속이고, 그 외에도 차이점이 몇 가지 더 있긴 해도 비슷하긴 하지. ]

[ 그런 직업이 존재하는 걸 보면, 그쪽 세상에도 범죄자가 많은가 보군. ]

대체 이 녀석은 그동안 내가 살던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 왔길래 이런 얘길 하는 걸까.

범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건 절대다수의 바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게 지켜지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세상에 조금이나마 더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은 항상 존재해 왔다.

[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

[ 그렇다면 <선우>는 그 세상의 평균이 아닐 거다. ]

[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얘길 꺼냈는지 알겠어? ]

나는 세르펜스가 적은 허튼 글을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물었다.

세르펜스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 악랄한 생각을 떠올려도, 그걸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

[ 대충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지. ]

[ <선우>가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그러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을 거다. ]

모처럼 잘 나아가는 듯하더니, 끝에 가서 도랑으로 빠져버렸다.

녀석의 시무룩한 표정이 한숨을 불러일으켰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글을 적었다.

[ 나쁜 생각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도르가 알아줬으면 해. ]

[ 범죄자를 파악하고자 그들의 심리와 수법을 추리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한 생각을 떠올리는 건 다르다. ]

[ 사람은 누구나 욕구가 있어. 그래서 누구나 나쁜 마음을 먹 ]

[ 그럴 리가 없다. ]

내가 글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빠르게 글을 썼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을 감았다가 뜨니 없던 글이 생겨난 듯하다.

'얘가 원래 성선설 지지자였나? 그런 것치고는 자기 자신에겐 성악설을 적용하는 것 같던데. 한 가지만 해 주면 안 되나?'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잠시 당황했지만, 내가 한 말을 왜 부정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선우와 유지스는 다르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같은 소리를 해댈 게 뻔해서, 나는 선수 치기로 했다.

[ 나도 나쁜 생각 하거든? 어릴 때 학습지를 하다가, 몰래 버린 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할까 고민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

[ 그건 그냥 게으른 거다. ]

[ 싫어하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앞으로 넘어져서 코가 깨졌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저주한 적도 있어! ]

[ <선우>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악한 사람일 테지. ]

망했다. 대화 진도가 안 나간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말한 녀석에게 너무 큰 걸 바랐나 보다.

[ 범죄자와 일반인을 구분 짓는 건, 자신이 떠올린 나쁜 생각이 도리에서 어긋난 것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고 멈출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이야. ]

[ 범죄자 중에는 일반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을 떠올리고, 저지르는 자들도 있다. ]

[ 그런 사람들도 시작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걸? 나쁜 생각을 거듭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면서 그 한계치가 점차 높아졌을 뿐이라고 생각해. ]

그저 세르펜스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자신을 부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러다가 세르펜스와 성무선악설까지 논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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