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54화 (454/925)

454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4)

이번에도 곧장 반박하는 글을 작성할 줄 알았건만, 세르펜스는 눈에 힘을 주고 가만히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보는 듯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됐다.

나는 막간을 이용해 오른손을 빙빙 돌리며 손목을 풀었다. 글을 빨리 쓰려고 하다 보니, 펜을 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모양이다.

'차라리 말로 하는 게 낫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을 땐 학창시절이 떠올라 재밌었지만, 무거운 화제를 다루며 전투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니 힘들기만 하다.

[ 그자와 같은 악인을 감싸주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선우>는 너무 상냥하다. ]

당장에라도 종이를 찢어발길 듯 노려보던 것과는 딴판으로, 세르펜스는 조심스럽게 펜을 움직였다.

비단 글을 적어내는 손놀림만 그러한 게 아니라, 시선까지도 유순하게 변했다.

다행인 점을 하나 뽑으라면, 세르펜스가 나와 말다툼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그리고 불행인 점을 뽑으라면, 방금 나눈 필담이 전부 허사가 되었다는 거다.

'아무래도 내가 [성검의 주인] 속 세르펜스를 감싸주려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맞긴 맞지만, 그 사실보다는 내용에 집중해 주길 바랐다.

세르펜스의 반응만 보면 내가 무슨 성인(聖人)이라도 된 것만 같다. 그래서 죄 많은 삶을 살아온 타락펜스까지도 보듬어주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과분하다거나 민망하다거나. 그런 감정보다는 착잡함이 밀려들었다.

녀석이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지 알 것 같아서.

내가 최근 2년여간, 세르펜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며 귀한 존재인지 설명하고 칭찬해왔지만.

턱없이 부족했던 거다.

녀석이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과 비교하면 짧디짧은 찰나와도 같고, 눈 뜨면 사라질 꿈결 같은 시간에 불과했다.

[ 아무리 나 때문이라지만, <선우>가 그런 악인까지 옹호할 필요는 없다. ]

내가 가만히 앉아 있자, 세르펜스가 또다시 글을 적었다.

세르펜스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대신에, 보잘것없는 자신마저도 아껴주는 숭고한 존재로 나를 드높이는 걸 택한 거다.

[ 옹호하는 거 아니야. 나도 그 세르펜스는 나쁘다고 생각해. 표현할 줄 몰라서, 세상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세르펜스에게도 기회는 분명 있었어. 휴마누스는 몇 번이고 이유를 물어봤고, 대화를 원했으니까. 그걸 거부한 건 세르펜스야. 그건 아주 비겁하고 용기 없는 행동이었어. ]

휴마누스는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정색하고 말하면 알아듣는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이제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런가 세르펜스는 반성하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회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꿈을 통해 엿보았던 '그 시기'의 장면을 떠올리거나, 자신의 기억 속 휴마누스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거겠지.

[ 여하튼 나는 아도르가 자기 자신에게 너무 야박하니까. 딱 그만큼만 더 신경 쓰고, 돌봐 주는 것뿐이야. 네 몫을 맡아두고 있는 것에 불과해. 그러니 아도르. 네가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찾아가도록 해. 미리 말해두지만, 계속 맡아달라는 말은 사양할게. ]

내 마지막 문장에 세르펜스가 들어 올렸던 오른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정말로 그렇게 쓰려고 했었나 보다.

[ 아도르에겐 아직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아. 그러니까 일단 현재의 자기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해 줬으면 해. 허구한 날 자책하고 자신을 미워하니까, 아도르라는 이름이 매일 울잖아. 불쌍하지도 않아? ]

"으음···."

세르펜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낮은 침음을 흘렸다.

현재의 자신과 '그 시기'의 자신도 모자라서, 이제는 하다 하다 세례명까지 불쌍하다고 여기는 내가 이해되지 않아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선뜻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어서 망설이는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아도르'라는 세례명과 함께 울고 싶은 걸 참아내고 있는 건지.

찰박거리는 물소리만 가득한 욕실에 새로운 소리가 더해지자, 세르펜스는 되돌아온 메아리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크게 들썩였다.

그에 따라 촤악 하고 큰 물보라가 일었고, 그 소리 또한 메아리가 되어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

"너무 오래 욕조에 있었더니, 살짝 현기증이 나네요. 이제 깨끗한 물로 몸을 한 번 씻어내고, 나가야겠습니다."

내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르펜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의 마지막 문장을 적어, 녀석에게 종이와 펜을 함께 내밀었다.

[ 시간 관계상 여기까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욕실에서 궁상맞게 이러고 있었지만, 내일은 암막 커튼을 달아 달라고 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까 질문했던 건, 내일 일정 끝나고 방에서 설명해 줘. ]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종이에 적힌 글을 본 세르펜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물에 젖은 팔을 수건에 닦아내고 나서야, 내가 내민 물건들을 받아서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손이 비워지자, 잽싸게 샤워기를 들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스피드다.

머리를 후다닥 감으면서 얼굴에도 물을 끼얹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마무리로 거울을 확인하며 눈가의 점을 덧그렸다.

그리고 욕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세르펜스가 나를 가로막았다.

녀석은 샤워기를 한 손에 든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뽀송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그냥 나가면 자신은 씻으러 다시 욕실로 들어와야 하고,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을지 걱정되니까.

자신도 빨리 머리만 감을 테니, 기다려달라는 뜻이다.

'바깥의 감시자가 나를 해칠 일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문 앞에는 윈스톤이나 베일도 서 있을 텐데. 어디 그뿐인가? 여기서도 방 안의 기척을 죄다 감지하면서, 대체 뭐가 불안한데?'

무엇보다 시중드는 사람이 다 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욕실을 나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세르펜스는 손가락을 다섯 개 펼쳤다가 슬그머니 두 개를 접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5분. 아, 아니 4···, 3분만 기다려다오.'라는 음성이 자동으로 지원되었다.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오늘 제 머리는 제가 말릴 테니까, 막내 신관님도 욕실에 들어온 김에 씻고 나오세요."

"···배려 감사합니다."

세르펜스가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떨궜고,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저 긴 머리를 3분 만에 감겠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나왔지만, 뜨거운 김이 서린 욕실에 있다가 나오자 숨이 탁 트이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창가에서 시원한 밤바람을 맞고 싶었으나, 내가 창문 근처로 가면 세르펜스가 씻다 말고 튀어나올 게 뻔했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탈탈 털듯이 말리며, 방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 신관복을 욕실에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어차피 세르펜스가 가지고 나올 테고···.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잠옷을 안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나?'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놓은 게 있긴 할 테지만, 세르펜스가 내 잠옷만 들고 욕실로 향한 걸 감시자가 보았을 거다.

그렇다고 욕실에 걸린 목욕 가운을 입자니, 누가 입었던 건지 모를 물건이다. 녀석 성격에 분명 찝찝해하겠지.

나는 인심 쓴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쪽은 녀석의 성격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동 중에 가방이 흔들린 탓인지,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아닌가? 감시자가 가방을 열어봤으니까, 그거 때문이려나?'

불현듯 가방을 연 게 잘한 짓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세르펜스는 먼저 방에 가 있겠다는 내 말에 불안감을 드러냈다. 이 신경에 거슬리는 감시자를 어떻게든 떼어내고 싶어 할 거다.

그리고 감시자는 세라투 자작이 붙여둔 게 거의 확실하다.

감시자를 치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세라투 자작에게 감시자의 존재를 눈치챘다고 말하며, 직설적으로 치워달라 요구하는 거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주님을 믿고 있었는데, 어떻게 우리를 감시할 수 있느냐. 대체 목적이 뭐냐. 따질 수 있으면 더 좋고.'

이 가방은 우리가 세라투 자작을 경계하지 않았다는 자세를 취하면서, 감시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런 증거를 내가 건드려버렸다.

'그래도 세르펜스는 방에 들어온 후, 자신의 가방을 열어보지 않았잖아?'

감시자도 머리가 있다면 물건 배치는 건드리지 않았을 터.

가방이 흔들려서 내용물이 흐트러진 건지, 누군가 뒤진 건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다.

'반면에 내 가방은 세르펜스가 한 번 열어보고, 정리했지. 그러니까 내 가방만 안 건드리면 되는 게 아닐까?'

그 밖에도 감시자가 보는 앞에서 내가 세르펜스의 잠옷을 갖다 줘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도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해야 자연스럽다.

나는 세르펜스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최대한 조심해서 잠옷만 꺼내고 싶었지만, 신관복이고 잠옷이고 죄다 하얀색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찾았다."

잠옷이 발견된 곳은 가방 가장 깊은 곳이었다.

게다가 옷가게에 진열된 것처럼 고이 접힌 다른 옷들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감싸듯 돌돌 말아놓은 탓에 이게 잠옷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찾아낸 잠옷을 가방에서 꺼내 든 순간.

- 툭.

잠옷이 무언가를 감싼 것처럼 보였던 건, 진짜로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원통 형태의 틴 케이스였는데, 단 걸 좋아한다는 프레이의 설정을 위해 넣어 둔 젤리 통이다.

'세르펜스에게는 내가 매달 리필해주는 사탕병이 있긴 하지만. 그건 유리 재질인 데다가 소중한 물건이라서 가방에 함부로 넣어 다니면 안 된다나?'

그런 이유로 세르펜스의 가방 속에 내 젤리 통이 들어가게 되었다.

세르펜스의 돈으로 녀석을 먹이기 위해 산 거지만, 엄연한 내 젤리다.

젤리를 보고 있자니, 욕실에서 빼먹고 나온 건 신관복 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나 양치도 깜박했잖아?'

그런데 때마침 눈앞에는 젤리가 있다. 혹시 이건 운명이 아닐까?

나는 세르펜스의 잠옷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틴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과일 모양의 아기자기한 젤리를 하나 꺼내어 입에 넣은 후, 뚜껑을 닫고 잠옷으로 감싸서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잠옷이 필요하면 녀석이 알아서 갖다 달라고 말할 테고, 그때 거들먹거리며 꺼내주면 된다.

비록 막내 신관의 젤리를 훔쳐 먹는 주교가 되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목욕을 오래 해서 당이 떨어지면 그럴 수도 있지.'

적어도 에인젤 주교의 설정대로라면, 잠옷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이게 더 자연스럽다.

나는 세르펜스의 가방을 대충 정리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말렸다.

그렇게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똥폼을 잡으며, 하늘을 보는 척 창밖을 살피고 있기를 몇 분.

하얀 목욕 가운을 걸친 세르펜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걸린 시간으로 짐작해 보건대, 후다닥 샤워에 양치까지 끝마치고 나온 게 아닐까 한다.

'뭔가 좀 억울한데? 설정상 시중을 받은 사람은 난데, 왜···.'

나중에 또 이런 식으로 가짜 신분을 만들게 되면, 그땐 기필코. 리더 역할 같은 건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내가 리더의 비애를 곱씹는 동안.

세르펜스는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다급한 손놀림으로 내 가방까지 열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 방에 침입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돌아보며 말하는 녀석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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