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7)
* * *
아침이 밝아왔다.
원래 오늘 오후에는 마차를 빌려 타고 영지를 쏘다닐 생각이었다.
신전이 들어서기 적당한 입지를 찾아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우리가 위장하고 있는 설정상,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어젯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다.
영주성에 도착한 첫날부터 방에 침입자가 들어와 가방을 뒤졌는데, 신전을 세우겠다며 빨빨 돌아다닌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며 비웃음 사기 딱 좋은 짓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은 그냥 성에서 머무르기로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우리의 진짜 목적을 생각하면 영지 순회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그나저나 세라투 자작은 정말 사과할 생각이 없나 보네.'
자기가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발뺌을 할 땐 하더라도, 영주성 내부에서 침입자가 나타난 이상 책임의 소재는 명확했다.
그러나 식사 약속이 잡힌 점심때가 다 되어 가도록, 세라투 자작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직접 찾아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사람을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은 전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별관에서 우리끼리 아침을 먹을 때만 해도, 세라투 자작이 침입자의 보고를 받고 황당해서 정신을 못 차리나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상황 파악을 끝내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은 곧, 세라투 자작이 고의로 사과를 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라는 뜻이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닐 테다.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겠다는 거겠지.'
사과를 하지 않는 것보다,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섣불리 세라투 자작을 몰아붙일 수는 없다.
그도 그러할 게, 우리는 이곳에서 달성해야 할 목적이 있으니까.
내키는 대로 내 할 말을 잔뜩 쏟아냈다간,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세라투 자작과 처음 만났을 당시.
이곳에 머무르려고, 영지가 마음에 든다는 티를 내도 너무 냈던 게 화근인가 싶다.
한숨이 절로 나올 법한 상황이지만, 정말로 한숨을 내쉬어선 안 된다.
적당히 화를 내되,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내가 이번 한 번만 참는다.'라는 행동을 보여야 할 때다.
결국 세라투 자작으로부터 그 어떠한 말도 전해 듣지 못한 채.
식사실에서 그의 가족들'만' 대면하게 되었다.
"···영주님은요?"
"아버지께서는 어젯밤 성에 잠입한 침입자와 관련하여, 조사 보고를 받느라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 질문에 대답한 건 세라투 자작의 두 아들 중 하나였다.
자작의 말을 대신 전해 주는 거로 보아, 맏이가 아닐까 한다.
'조사 보고 좋아하시네. 보고라면 어젯밤 그 침입자에게서도 듣고, 시종장을 통해 또 들었을 텐데.'
아무래도 세라투 자작은 모르쇠로 발뺌할 작정인가 보다. 그러고도 모자라, 식사 자리에 늦기까지 하다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다.
초대받은 사람이 음식을 눈앞에 두고,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는 상황 자체만 봐도 예의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마냥 기다려야 하는 건, 초대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귀족 사회에서 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이 지각하는 것과 '초대받은' 사람이 지각하는 건 다른 의미를 갖는다.
초대받은 사람이 늦으면, 그저 시간 약속도 못 지키는 무례한 사람이 될 뿐이다.
하지만 초대한 사람이 늦어진다는 건, 상대방을 깔보면서 자신을 높이는 행위이다.
'너는 내 아랫사람이니, 기어오르지 말라는 뜻이지.'
마치 키우는 개에게 사료를 내어주고, '기다려!'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부터 너를 길들일 예정이니, 좋은 말로 할 때 고분고분하게 따르라는 사전 예고나 다름없다.
'그러니 어지간히 상대를 깔아뭉개고 싶지 않거든, 식사 초대를 해놓고 지각하는 일만큼은 피하라고. [자라나는 어린 귀족들을 위한 필독서 ~특수 예법 편~]에서도 경고했지.'
정말로 세라투 자작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늦는 거라면, 이 얘기를 식사실에서 듣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별관을 나서기 전에 시종을 보내서 알렸어야 한다.
실질적인 피해를 본 나와 세르펜스에겐 말 한마디 전하지 않았으면서, 자기 아들에게만 말을 전해 놨다?
그것도 식사 자리에 늦을 거라는 얘기를?
이런 상황에 사정이 있어서 늦어진다는 헛소리를 믿는다면, 그건 천하에 둘도 없는 멍텅구리다.
'눈치 없는 휴마누스도 머리를 굴려서, 간단히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개수작이지.'
나는 식탁 앞에 가서 자리에 앉는 대신, 식사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서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다른 때라면 이렇게 대놓고 살펴볼 수 없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귀부인이 하나. 그 귀부인과 자작을 적절히 짬뽕해 놓은 듯한 딸이 하나. 자작을 완전히 빼다 박은 아들이 하나. 그리고 귀부인을 많이 닮은 아들이 하나···.'
이들 중에서 세라투 자작의 지각 소식을 전달한 건, 자작을 완전히 빼다 박은 아들이었다.
비단 외견만 그러한 게 아니라, 여유로운 표정과 당당한 자세와 점잖은 목소리 등. 풍기는 분위기가 세라투 자작 그 자체였다.
반면에 다른 아들은 어딘지 모르게 의기소침해 보였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까지 어머니를 닮은 건가?'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게, 정작 자작 부인은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 소심해 보이는 쪽이 타락펜스가 이용한 놈이려나?'
나중에 세르펜스의 생각은 어떤지 물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막내딸은 담담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심드렁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오도카니 앉아있는 모양새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교님께서 기분이 상하신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늦으시는 건,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일을 처리하시느라,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습니까?"
내가 도무지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자, 자작을 빼닮은 놈이 재차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쁠 만도 한 거 아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너희 일을 해결하느라 늦는 거니까, 너희가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
대충 이런 뜻이다.
이건 내가 꼬아서 듣는 게 아니다.
미안한 감정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여유롭게 웃고 있는 저 표정은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일부러 내 속을 긁으려고 저렇게 말하는 건지, 자작을 닮은 외형과는 다르게 좀 멍청한 건지···.'
아무튼 매우 재수가 없었다.
세라투 자작이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저놈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고작 두 번 입을 떼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아닌가? 세라투 자작한테 빡친 상태로 세라투 자작의 분신 같은 놈을 봐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저놈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후, 내려야 할 것 같다.
당장은 세라투 자작과 빼닮은 얼굴과 표정만으로 불쾌감 지수가 정점을 찍은 탓에, 냉정한 평가가 불가능하다.
"아, 그래요? 저는 아무 얘기도 전달받지 못해서, 그냥 관심 끄고 계신 줄 알았지 뭡니까?"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성에 침입자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손님께서 피해를 보셨는데. 다행히도 큰 피해는 없었으나, 아버지께서는 이 성의 주인으로서 이 사건을 간과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세라투 자작 복제판 같은 놈이 세라투 자작을 옹호했다.
'뭐? 큰 피해가 없어? 세르펜스의 하나 남은 딸기 젤리가 사라졌는데?'
세라투 자작의 붕어빵이 어젯밤 젤리 통을 흔들어대던 세르펜스의 표정을 봤다면, 감히 저런 소리를 입에 담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피해는 세르펜스의 젤리뿐만이 아니다.
빨간색과 초록색, 파란색, 남색이 일회용 투척 무기가 되어 날아가 버린 탓에, 내 무지개색 깃펜 세트는 더 이상 무지개색이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
별로 귀중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3개만 남아서 묘하게 찝찝하다.
나중에 세르펜스에게 남은 주황색, 노란색, 보라색도 던져 달라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다행이고 아니고를 따지는 건, 저와 막내 신관님이 해야 할 일 같은데요? 어째서 그쪽이 멋대로 다행이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고작 젤리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성의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사건 조사에 진지하게 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붕어빵이 세라투 자작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봤자 아버지께서는 성의 주인으로서 어쩌고저쩌고. 아까 했던 말의 중복이다.
"자,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제분께선 방에 모르는 사람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개인 물건을 만지작거려도 없어진 게 없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식사를 마친 뒤. 제가 자제분의 방에 가서, 방을 좀 뒤져봐도 될까요?"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억지라니요? 방금 자제분께서 하신 말씀이 그렇잖아요? 고작 젤리 하나 사라졌을 뿐이니까,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저는 예의범절이 뭔지 아는 사람이라, 이렇게 친절하게 예고도 하잖아요? 게다가 전 젤리도 훔쳐먹지 않을 거고, 자제분께서 방에서 뭘 하시는지 숨어서 지켜볼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젭니까?"
내 말에 붕어빵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붕어빵이 고개를 돌리기 직전.
마치 하찮은 것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듯, 멸시 어린 눈초리가 잠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세라투 자작을 따라 하긴 하지만, 세라투 자작만큼 표정 관리를 잘하지는 못하나 보다.
"제가 한 말의 요지는 모르는 사람이 제 물건을 맘대로 뒤지고, 몰래 지켜봤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불쾌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까지 풀어서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분이 상하신 것도 이해한다고 말씀드린 거 아닙니까?"
"아뇨, 자제분께서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정말 이해를 했다면, 죄송하다는 사과를 먼저 하셨어야 합니다. 영주님께서 책임감을 느끼고 어쩌고 하는 말을 하시기 전에 말입니다."
식사실로 오면서 세라투 자작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골머리를 앓았는데.
팥소 없는 붕어빵 같은 놈과 말다툼을 하고 있으려니,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든다.
견제해야 할 줄 알았던 아들놈 중 하나는 오만한 파파보이고···.
'쟤는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다른 한쪽은 불안한 표정으로 붕어빵과 내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는 한시도 멈추지 않아, 저러다가 눈알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분명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두 형제의 성격이 왜 이렇게 극과 극인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영주님께서도 이 사건에 책임감을 느끼고 계신다면서, 직접 와서 사과하기는커녕 사람을 보내 미안하다는 말조차 전하지 않으셨죠. 사과하지 않는 건 이 집안 내력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사과를 하지 않아서 사과하지 않았다 말했을 뿐인데, 이게 모욕입니까? 사실 적시지. 이를 두고 모욕이라 말하는 거야말로, 영주님께서 경우에 어긋난 행동을 하셨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닐까요?"
이 정도면 패드립 축에도 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파파보이에겐 굉장한 모욕으로 느껴졌는가 보다.
파파보이가 핏발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눈알을 열심히 굴린 건 다른 아들인데, 눈이 충혈된 건 이쪽 아들이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