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59화 (459/925)

459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9)

"주교님께서 침입자의 배후로 저를 지목하셨다고, 시종장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세라투 자작은 가족 소개도 생략하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알아서 통성명했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내 설정을 존중해 준 건지.

작은 의문이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으나,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어째서 세라투 자작이 저런 말을 했느냐다.

'계속 범인이 따로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길래, 그 얘기는 못 들은 척 넘어가려는 줄 알았는데.'

세라투 자작의 표정에서 곤란하다거나, 양심에 찔린다거나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었을 뿐이다.

마치 내가 가소롭다는 듯 말이다.

이제 와서 자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인정할 리는 만무하고, 세라투 자작의 웃는 얼굴도 눈에 거슬린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말을 먼저 입에 올린 걸 테다.

바짝 긴장하는 게 좋겠다.

"그 얘기를 들었으면 빨리 와서 해명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하지 않은 일에 증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범을 밝힌 후에 말씀드리려 했던 겁니다."

내 삐딱한 물음에도 세라투 자작은 점잖은 태도로 대답했다.

그냥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 내가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 확실한 증거를 찾느라 늦었다는 뜻으로 들렸으나, 진짜 의미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식사 자리에 늦은 이유는 내가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워서. 즉, 나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느긋하게 기어 나온 주제에.'

누가 들으면 정말로 세라투 자작이 침입자 조사 때문에 늦은 줄 알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침입자를 잡으셨나 봐요?"

"하하, 그랬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수상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진짜 침입자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영주님께서 붙인 사람은 아니란 거죠?"

"예, 그렇습니다."

세라투 자작의 당당한 대답에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의 발언은 성의 경비 수준이 뒤떨어진다고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을 저토록 쌈박하게 할 줄이야.

"이 영주성에 들어온 첫날부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주교님께서 이 성의 주인인 저를 의심하실 만도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말을 마무리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니다. 말을 연결할 때 쓰는 단어지.

그런데도 세라투 자작은 아무리 기다려도 말을 잇지 않았다. 이는 내 호응을 기다리는 거다.

알아서 주절주절 떠들어 댈 것이지.

속으로 별짓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마지 못해 입을 뗐다.

"하지만, 뭐요?"

"달리 의심할 상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누군데요?"

"주교님께서는 똑똑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세라투 자작이 말끝을 흐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뒷말을 듣지 않아도, 멍청하다고 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얼굴이 찌푸려지자, 세라투 자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당연히 악마 숭배자들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영주님 말씀은 악마 숭배자들이 저를 감시하려고 영주성에 침입한 거다, 이거죠? 그리고 대륙의 공적인 악마 숭배 세력에서 보낸 놈이니까, 못 잡은 것도 어쩔 수 없다?"

"네, 그렇습니다."

세라투 자작이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직감은 침입자의 정체가 세라투 자작이 보낸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투 자작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니까 지금 뭐야? 내가 악숭이를 달고, 영주성에 들어왔다는 소리지?'

세라투 자작의 말을 종합해 본다면.

그가 식사 자리에 지각한 것도 나 때문이며, 영주성에 침입자가 발생한 것 또한 나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때마침 시녀가 딸기 젤리를 가져왔길래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세라투 자작에게 따질 뻔했다.

'진정하자, 이런 말싸움에서는 먼저 흥분한 쪽이 지는 거니까.'

나는 애써 속을 가라앉히며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유리 재질의 디저트 볼에 담긴, 빨갛고 투명한 젤리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젤리에 마음이 빼앗겨 버리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 모습을 보고, 대체 누가 신성 루멘 제국의 프라시더스 공작을 떠올릴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르펜스가 움찔하며, 디저트용 스푼으로 향하려던 손을 슬그머니 식탁 아래로 내렸다.

"됐습니다.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드세요."

"감사합니다."

세르펜스가 눈매는 도도함을 유지하면서, 입매는 실실 웃는.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스푼을 들어 올렸다.

사라진 딸기 젤리는 구미 타입의 쫄깃쫄깃한 젤리였는데, 시녀가 내온 젤리는 탱글하고 촉촉한 푸딩 같은 젤리였다.

다른 종류의 젤리긴 해도, 맛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걸까?

세르펜스는 젤리를 스푼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살짝 잘라서 입에 넣었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가 참으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얘는 그냥 젤리에 집중하도록 내버려 두자.'

나는 세르펜스에게서 신경을 끄고, 젤리를 한 입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세라투 자작의 말에 동의하며 악숭 세력에 덤터기를 씌워야 할지. 아니면 세라투 자작을 다시 한 번 찔러봐야 할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게 이로울 건 없다.

악숭 세력이 범인인 것 같다며 맞장구를 치면, 나는 증거도 없이 생사람을 잡은 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계속 세라투 자작을 의심하고 떠본다면,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불통 취급을 받겠지.

"악마 숭배자가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 그렇다고 치죠."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내가 들어도 구차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내 말에 세라투 자작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유작작한 그 태도가 얄밉다 못해 약이 올랐다.

"아무래도 제가 주교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는가 봅니다."

"믿음이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생겨나는 건 아니잖아요. 오래 두고 봐야 생기는 거죠."

"네, 맞는 말입니다."

"아! 물론 저는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니까, 애초에 의심을 살 일 자체가 없지만요. 오히려 절 의심하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한 번만 더 감시하다가 걸리면, 악숭이로 낙인 찍히게 될 거라는 내 협박에도.

세라투 자작의 여유로운 표정에는 실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악마 숭배 세력이 바라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저와 영주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주교님과는 말이 참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나더러 멍청하다고 돌려서 욕할 땐 언제고, 이제 와 세라투 자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친한 척 굴었다.

정말 안 좋은 의미로 귀족다운 자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주교님께 감시를 붙였겠습니까? 사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민망하나, 이 바스툴 왕국에 세라투 령만큼 신전을 세우기에 적합한 곳은 없습니다. 영지의 면적으로 보나, 부유함으로 보나. 치안이나 청결 상태 등. 나무랄 곳이 없지요."

갑자기 세라투 자작이 영지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오긴 하지만, 자랑질을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겸사겸사 젤리도 마저 먹고.

"어디 그뿐입니까? 신전을 세우려면 땅도 땅이지만, 인력과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영지는 매우 드물뿐더러, 선뜻 기부금을 낼 영주는 아예 없을 겁니다."

"뭐, 그렇겠죠."

나는 제 소임을 끝낸 디저트용 스푼을 내려놓으며 설렁설렁 대답했다.

그러나 세라투 자작은 성의 없는 청자의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이유로 미루어 봤을 때. 악마 숭배자들은 신전 설립 계획을 무산시키고자, 저와 에인젤 주교님을 반목하도록 이간질하려는 게 확실합니다."

정말 놀라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내 방에 침입한 놈이 악숭 세력의 끄나풀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었는데, 어느새 그것이 기정사실로 둔갑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괜한 의심은 삼가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의심을 삼가라는 말은 결국 자신을 전적으로 믿으라는 뜻이었다.

침입자의 배후가 세라투 자작이든, 제3의 인물이든.

이런 결론을 끌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라투 자작은 대단한 사람이다.

'세라투 자작이 악숭 세력에 넘어가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신뢰보다 경각심이 먼저 들고,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을 것만 같다.

"영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네요. 악마 숭배자가 이 성을 제멋대로 활보하고 있다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부로 경비를 강화할 생각입니다."

"어디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예의 그 침입자가 영주성 밖으로 도망갔다면 상관없겠지만,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지? 바스툴 왕국에 새로운 신전을 세울만한 곳이 세라투 령 뿐이라면, 진작에 사람을 심어뒀을지도 모르고···."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척. 주절주절 혼잣말을 떠들어댔다.

혼잣말이라 해도 목소리 크기는 대화를 하던 그대로였기에, 이 자리에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으리라.

너희 집안 곳곳을 내 맘대로 헤집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탐문을 하고 다녀야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집주인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까 주교님의 말씀은, 성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겁니까?"

"어째서 정색하시는 겁니까? 성안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악마 숭배자를 찾아내는 일을 대신 해주겠다는 건데요?"

나는 머릿속으로 순진무구한 연기를 펼치던 세르펜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질문했다.

'그쪽이 먼저 침입자는 악숭이라고 말했잖아? 그럼 교단의 성직자들이 나서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내가 맡은 배역이 주교만 아니었더라면, 깝죽거리며 약 올렸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꼰대 주교 설정 때문에 교단의 이미지가 걱정되었던 터라, 이번만은 꾹 참기로 했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염려되어서 말입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악마 숭배자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해악이며, 우리 룩스메아 교단은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티가 났지만, 순순히 대답하는 걸 보면 켕기는 건 없는가 보다.

적어도 영주성 내에는 말이다.

아무튼 기왕 성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으니, 가장 먼저 개차반의 방을 샅샅이 뒤져봐야겠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예고한 건 아니지만, 그 또한 약속이라면 약속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