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30)
"아! 그러고 보니 별관 뒤뜰에서 깃펜 네 자루가 발견되었습니다. 혹시 이에 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세라투 자작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괜히 감탄사를 붙이며 말했다.
별관에 침입자가 발생했으니, 그 주변을 수색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상한 물건을 발견했다면, 가장 먼저 화제에 올리는 게 당연한 절차다.
'그런데 그 얘기를 이제서야 꺼내다니.'
세라투 자작은 침입자를 찾아낼 생각이 없었던 거다.
침입자의 배후가 세라투 자작일 거라는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악숭이가 어쩌고저쩌고 하던 세라투 자작의 말은 그냥 무시하면 될 것 같다.
'은연중에 내 탓이라고 몰아가던 걸 보면, 내가 부채감이라도 느끼길 바랐던 거겠지.'
주도권을 쥐고 나를 흔들어 보려다가, 세라투 자작 본인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니까.
원래 해야 할 말을 뒤늦게 꺼낸 거다.
이 얘기를 어째서 지금에서야 하느냐고 따진다면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오해를 푸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며, 또다시 내 탓으로 몰고 갈 테다.
이는 세라투 자작이 남 탓만 하길 좋아하는 좀스러운 양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나를 통제하려는 수작질이다.
나는 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젯밤 창밖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길래 던졌습니다."
"던지다니, 주교님께서 말입니까?"
세라투 자작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를 감시하던 자에게 보고를 받았으면, 깃펜을 던진 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아뇨, 저 말고 막내 신관님이요."
"그거 정말 놀랍군요. 깃펜을 발견한 병사의 말에 따르면, 그중 세 개는 나무와 땅에 깊숙이 박힌 상태로. 나머지 하나는 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가 묻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냥 위협용으로 던진 줄 알았는데, 적당히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맞추긴 했는가 보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녀석은 디저트용 스푼을 아직 쥐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그것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젤리 하나로는 아쉬웠는가 보다.
"젤리를 참···,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그냥 달콤한 디저트류는 대부분 좋아합니다. 방금 먹은 젤리는 애피타이저로 치고, 식사를 마친 후에 디저트 더 먹어도 되죠?"
"물론입니다."
잠깐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금세 표정을 추스른 세라투 자작이 흔쾌히 대답했다.
때마침 시녀들이 새로 만든 음식들을 가지고 식사실로 들어왔고, 자작은 젤리를 더 준비해 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흠, 흠! 어쨌든 깃펜의 상태로 보아, 옆에 앉아 계신 분은 평범한 신관님은 아닌가 봅니다?"
세라투 자작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질문했다.
음식도 나왔고 대화도 끊겼으니, 어물쩍 넘어갈 법도 하건만.
굳이 질문을 던지는 걸 보면, 침입자에 관한 건 철저하게 악숭 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갈 생각인가 보다.
'하긴, 우리에게 영주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권리까지 내주게 되었으니까. 그런 거라도 챙겨야 셈이 맞겠지.'
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어, 막내 신관님은 한때 성기사 수련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어째서 그만두었느냐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고, 결국 한바탕 설정 풀이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왜 내가 밥도 못 먹고, 이런 설명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정작 당사자인 세르펜스는 면목없다는 표정을 꾸며내며, 깨작깨작 느릿하게. 하지만 꾸준하게 음식을 섭취했다.
얄밉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뿐.
식사를 등한시했던 세르펜스가 남의 집에서도 이렇게 잘 먹는다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래, 얘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이 있다면 나한테만 질문을 던져대는 세라투 자작에게 있겠지.'
나만 회유하면 세르펜스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옵션 같은 거로 생각한 걸까?
세라투 자작은 막내 신관님의 설정 풀이가 끝난 이후에도, 집요하게 나한테만 말을 붙여왔다.
"오늘 오전에 기도회를 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면서 말이다.
별관 거실에서 보란 듯이 기도회를 열었으니, 그 소식이 세라투 자작의 귀에 들어갈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바빠서 식사 자리에 지각한 사람이 먼저 그 얘기를 꺼내는 건, 설정 오류가 아닐까 싶다.
"집무실에서 나와 식사실로 오는 동안 들은 얘기입니다."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세라투 자작이 변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불만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신 룩스메아 님을 모시는 성직자로서 하루에 한 번 기도를 올리는 건, 당연한 일상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신전을 세우기 전이라 정식으로 예배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할 따름입니다."
"과연,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새로이 설립될 신전의 관리자로 걸맞은 분이신 것 같습니다."
'분이십니다.'도 아닌. '분이신 것 같습니다.'라는 애매한 표현이었지만, 어쨌든 칭찬은 칭찬이었다.
어제오늘 본 바로는 아부 같은 걸 할 양반이 아닌데.
그런 세라투 자작이 갑자기 나를 띄워주니까, 기분이 좋기는커녕 찝찝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적중했다.
"내일은 제 가족들도 주교님께서 주관하시는 기도회에 함께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바쁘실 텐데, 기도회에 참석할 시간은 있으신가 봐요?"
"이 대륙을 비추는 빛, 그 자체이신 룩스메아 님께 기도를 올리는 일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룩스메아 님을 모시는 주교에게 감시를 붙이는 거로도 모자라, 밥상머리 앞에서 손가락만 빨도록 일부러 지각까지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신앙심 깊은 척하면,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신실하신 주교님이라면 당연히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표정이 영 마뜩잖아 보이십니다."
"제가 원래 평소에는 신앙생활에 관심도 없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만 독실한 신자인 척하는 자들을 싫어해서 말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라투 자작 본인을 비난했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그는 남 얘기를 들은 것처럼 맞장구를 쳤다.
아까는 부채감을 느끼도록 살살 찔러대더니. 이제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는 척 굴어댄다.
'이 사람, 이거! 정말 안 되겠는데?'
앞서 세라투 자작은 계속해서 내 신경을 긁어댔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 나는 꽤 자주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냈다.
완전히 나를 척을 질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제는 슬슬 친한 척하며, 심리적 거리를 좁혀야겠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세라투 자작은 작전을 잘못 짰다.
나는 이래 봬도 몽쉘 하나 때문에, 믿지도 않는 종교 행사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신앙심 같은 걸 보여줘 봤자 소용없다.
"예, 저도 영주님께서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가족분들과 합의된 얘기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이 대륙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 룩스메아 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그런 배은망덕한 자들이 존재해서, 악마를 숭배하고 있죠."
"제 가족 중 그런 자는 없습니다."
악숭 세력이 손을 내밀면, 옳다구나 하고 잡을 것 같은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니까 참 어처구니가 없다.
게다가 [성검의 주인]에 등장했던 '세라투 후작'을 떠올리면, 어처구니 수치는 마이너스까지 떨어진다.
"뭐어···. 진심이 담긴 성의를 보인다면야. 기도회에 참석하는 걸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아차! 별관 뒤뜰에서 발견된 깃펜의 펜촉이 전부 망가져서, 도무지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혹시 업무 중에 사용할만한 좋은 펜이 필요하시지 않으십니까?"
귓구멍이 아니라 콧구멍으로 들어도 새로운 펜을 사 주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가만히 있는 건 '신관 프레이'의 설정에 어긋난다.
"콜록, 콜록!"
설정에 충실한 세르펜스는 사레들린 연기를 펼치며,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고작 그 정도로 끝이라면, 내가 세르펜스에게 연기펜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지도 않았을 거다.
녀석은 기침을 계속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물잔을 집어 들고, 다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주, 주교님···."
그렇게 나를 부르며, 세르펜스는 찔끔 흘러나온 눈물 때문에 촉촉해진 눈망울을 빛냈다.
누가 보아도 세라투 자작의 말에 크게 당황하여 사레까지 들려 고생한 후에, 겨우 진정한 모습이다.
"왜요?"
"새 펜은 제가 사드리기로 약속하였잖습니까···?"
세르펜스가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지금의 연기펜스를 만든 걸 테다.
상대방의 연기가 워낙 훌륭한 탓에, 나까지 꼰대 주교 역할에 몰입되었다.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요? 그때까지 저는 손가락에 잉크를 묻혀서 글을 써야 합니까?"
"······."
내가 한껏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리 말하자, 세르펜스가 이를 앙다물고 분하다는 눈으로 세라투 자작을 노려보았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세라투 자작은 황당하다는 눈치다.
대충 '내가 비싼 펜을 사주면 돈을 아낄 수 있으니, 너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 * *
세르펜스의 연기 욕심 때문에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지만, 식사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디저트로 딸기 젤리를 한 번 더 먹을 즈음에는, 개차반 외의 다른 두 자제의 이름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첫째 아들인 소심이는 챈들러, 막내딸은 르웰이라고 했다.
'이름을 안 외운다는 설정만 아니었어도, 그냥 평범하게 이름과 함께 소개를 받았을 텐데···.'
사서 고생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보다.
아무튼 식사 도중에 얻은 소득이라고는 첫째와 셋째의 이름. 그리고 세라투 자작이 사주기로 약속한 만년필 세트뿐이었다.
'식전에는 세라투 가문 사람들의 관계가 어떠한지, 대강 알아볼 수 있었는데.'
어째 식사 도중보다, 식전에 나눈 대화 쪽이 더 영양가가 넘쳤던 것 같다.
나는 오늘 가장 영양가 많은 정보를 던져준 개차반을 불러세웠다.
"개차···. 어라? 이게 아닌데? 무슨 반이었죠? 어쨌든 둘째님, 같이 갑시다!"
"방금 저를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식사실 밖으로 나서려던 개차반이 기겁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개차'로 시작하고 '반'으로 끝나는 단어에 정신이 팔려서, 같이 가자는 말은 듣지 못했는가 보다.
"둘째님이라 불렀습니다."
"그 전에 말입니다."
"제가 원래 중요도가 떨어지는 사람 이름은 잘 못 외웁니다. 그런데 '반'이라는 끝 글자를 외우게 하셨으니, 자긍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내 헛소리에 개차반이 주먹을 꽉 쥐며, 화를 꾹 참았다.
흘깃, 개차반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세라투 자작이 서 있었다.
세라투 자작은 식사실을 막 벗어난 참이었는데, 개차반이 소리를 빽 지르는 바람에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반. 너는 다 좋은데, 매사에 침착하지 못한 게 아쉽구나."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이 아비가 네게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고 있지?"
"네, 꼭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라투 자작이 가던 걸음을 되돌렸다.
클로반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세라투 자작은 제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는 내 분신 같은 아이니까, 잘할 거다."
표정도 목소리도. 아들을 아끼는 다정한 아버지 그 자체인데, 알 수 없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경직되어 움츠러드는 어깨를 억지로 폈다. 그러다가 세라투 자작의 다른 두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첫째 챈들러는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가만히 서서, 클로반을 부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셋째 르웰은 클로반과 세라투 자작을 휙 하고 지나쳐서.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