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33)
'이거 유지스 글씨체네.'
유지스는 클로반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내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세라투 자작이 둘째를 편애하는 것 같지 않으냐고.
그리고 별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돌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뭔가 떠오른 바가 있어 보여서, 글로 적어서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좀처럼 말할 기회를 잡지 못하여, 말로 전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생각이 통하기라도 한 듯이 이렇게 쪽지에 적어서 건네주다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긴 했으나, 대화할 여건이 안 되면 글로 적어 전달한다는 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진정한 미스터리는 어째서 이 종이가 세르펜스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느냐다.
저녁 식사 중 세르펜스는 내 옆에 앉았고, 유지스는 에드나와 함께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식탁 아래에서 주고받은 건 아닐 테다.
'그렇다는 건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올라오면서 몰래 건네준 건가? 그런데 세르펜스는 양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잖아.'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다. 유지스가 직접 세르펜스의 주머니에 넣은 거다.
모두의 눈을 피해 남의 바지 주머니에 쪽지를 넣다니.
전 대륙의 소매치기범들이 울고 갈 능력이다.
주머니의 주인인 세르펜스는 바로 눈치챈 것 같긴 하나, 그걸 고려하더라도 굉장한 건 굉장한 거다.
나는 유지스의 신묘한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글의 내용에 집중했다.
글을 쓰는 데 주어진 시간이 10분밖에 없었던 탓인지, 서두부터 본론이 적혀있었다.
[ 세라투 자작의 둘째 아들인 클로반의 모습을 본 후, 저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답니다. ]
이런 쪽지에서까지 이단 심문관 설정의 '~답니다.' 말투를 쓸 필요가 있었던 걸까?
조금 어이가 없긴 했으나, 이 또한 유지스답다면 유지스다운 점이리라.
나는 유지스의 문체에 개의치 않고 다음 문장을 읽었다.
[ 그리고 세라투 자작이 클로반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편애하는 걸 보고, 그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긴 한데···. ]
서두부터 본론으로 치고 나왔던 게 무색할 정도로 글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확실한 건 아니라던가, 자신이 비약한 걸지도 모른다거나.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문장들이 나열되었다.
그 문장들을 읽고 있자니, '떠오른 바가 있어 전달하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나는 다음 문장을 읽기 전에, 잠시 종이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막내 신관님. 제 가방에 보면 그···, 물에 타 마시는 그거 있거든요? 뭔지 아시죠? 그것 좀 타 오세요. 막내 신관님도 마시고 싶으시면 본인 것까지 타 드셔도 됩니다."
"······."
세르펜스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자신더러 분유를 타 오라고 말한 게 맞느냐고 묻는 거다.
나는 그런 세르펜스에게 '그럼 주교인 제가 우유를 타서, 막내 신관에게 대령해야 합니까?'라는 눈빛으로 맞대응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내 눈빛을 마주한 세르펜스가 청승맞은 표정을 했다.
매일 아침 학교에 바래다주던 부모님이 '이제 너도 다 컸으니까, 오늘부터는 혼자 등교하렴.'이라고 말한 걸 들은 아이의 표정이 이러할까.
서운함과 서러움이 뒤섞인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내가 세르펜스의 분···, 우유를 타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먹고 싶은 사람이 먹고 싶을 때, 알아서 챙겨 먹어야지.
나는 마음을 굳히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내게 분유를 타주는 건 언제나 선우였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내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따지는 듯. 억울하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녀석이 이렇게 나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를 치사한 사람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세르펜스다.
"대답 안 합니까?"
"그, 그게···. 이 방에는 물을 끓일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내 재촉에 세르펜스가 치사하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며, 가까스로 변명을 짜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거면 모를까. 마시고 싶으면서도 저러고 있으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냥 우유 분말일 뿐인데, 무슨 상징적 의미라도 부여한 건가 싶기도 하고.
"물을 끓일 수 없다면, 물을 끓일 수 있는 곳에 다녀오셔야죠."
"어젯밤 방에 침입자가 들어왔는데, 지금 저를 내보내시는 겁니까?"
"문 앞에 성기사님 있잖아요. 잠깐 방 안에 들어와 있으라고 하죠, 뭐."
"···알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그 앞에 서 있던 윈스톤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 뒤, 복도로 나갔다.
기운 빠진 세르펜스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만도 하건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윈스톤의 모습으로 보아, 정말로 방음이 안 좋긴 한가 보다.
'일부러 윈스톤을 방으로 불러들인 건 아니지만, 마침 잘 됐네.'
이렇게 된 김에 유지스가 적은 쪽지를 보여줘야겠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윈스톤에게 내밀며,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어제랑 근무 순서 바꿨어요?"
"지금 렉스 님은 식사 중이십니다. 그동안만 제가 잠시 경호를 서는 것뿐, 순서는 어제와 같습니다."
윈스톤이 그리 대답하며, 내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아직 나도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윈스톤은 세르펜스가 돌아오는 대로 나가봐야 한다.
그러니 윈스톤이 먼저 읽어보는 게 더 낫겠지.
"큰 성기사님은 작은 성기사님의 선배잖습니까? 후배 교육 좀 제대로 시키세요. 어제처럼 방에 침입자가 들어오면, 그땐 안 봐줍니다. 얄짤없이 징계를 내리고 윗선에도 알릴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글을 읽느라 정신이 분산된 탓인지, 윈스톤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꼰대 주교 설정을 생각하면 좀 더 떠들어야 하지만, 윈스톤이 글을 읽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 그만 입을 다물어야겠다.
글의 분량에 비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윈스톤이 다 읽은 쪽지를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것을 돌려받으며, 다른 손으로는 투구 바이저를 올리는 시늉을 했다.
윈스톤이 나를 따라 바이저를 위로 올렸다.
왜 그러느냐고 질문하는 듯, 의아한 표정이 드러났다.
'내가 보려던 건 저런 표정이 아니라, 유지스의 글을 읽고 난 이후의 감상이 담긴 얼굴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윈스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윈스톤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바이저를 내려썼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시선을 종이 위로 옮겼다.
이제 읽다가 만 쪽지의 뒷부분을 읽어야 할 때가 왔다.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부족하다기보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문장 아래.
'세라투 자작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젊음을 얻으려 한다는 가정하에 추론한 것'이라는 전제 조건이 적혀있었다.
어느 날 몸이 젊어진다면 의심받지 않을 신분이 필요하고, 자신이 쌓아올린 세라투 가문의 힘을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준비한 '새로운 신분'이 바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클로반 세라투'일 거라는 게 유지스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둘째인 클로반을 편애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준 건, 자작 본인이 '클로반'이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그런 것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겠지. 둘째인 클로반이 자연스럽게 가문을 이어받으려면, 그럴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유지스의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라투 자작이 둘째인 클로반을 이용하려 한 건, 악숭 세력과 연을 맺기 전이라서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이 더해졌다.
영혼을 다른 신체로 옮기는 게 가능한지. 아니면 현재의 신체가 젊어지는 것만 가능한지.
악마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실치 않아서, 안전하게 자신과 똑 닮은 클로반에게 표정과 행동. 심지어는 풍기는 분위기까지도.
그 모든 것이 자신과 똑같아지도록 클로반을 가르쳤다는 거다.
그래야 자신이 아들의 자리를 뺏었을 때,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
변화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간극이 크지 않다면 '존경하던 아버지를 잃은 충격'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악숭이보다 더한 놈 같으니···.'
클로반을 보며 '분신'이라 말하던 세라투 자작의 목소리가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이 글을 적은 사람이 유지스만 아니었더라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크흠!"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윈스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몸짓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덩치가 산만한 윈스톤이 성기사 갑옷까지 갖춰 입고 저러고 있으니, 조금은 웃긴 광경이 펼쳐졌으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 전환은 되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내가 숨을 고르자 윈스톤의 기행도 멈췄다.
아무래도 의미를 알 수 없던 그 이상한 몸짓은 심호흡하라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얼핏 보았던 씁쓸한 표정을 보면 윈스톤도 심란했을 텐데···.'
감정이 있고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요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표정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건, 윈스톤이 훌륭한 기사라서 평정심이 남다른 덕분이려나?
-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윈스톤이 방문을 열자, 두 손으로 쟁반을 받쳐 든 세르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고급스러운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와 티스푼이 올려져 있었다.
분유와 화려한 찻잔이라니. 정말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예. 나가보세요. 작은 성기사님에게 제가 한 말···, 그러니까 '경고'도 꼭 전해 주시고요."
나는 세르펜스가 또 오해할까, 말을 고쳐서 '경고'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말했다.
윈스톤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 방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아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쫄리지?'
이게 다 세르펜스가 자꾸 '난 동생 같은 거 필요 없으니, 둘째를 들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라는 식으로 눈치를 준 탓이다.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어, 나는 보란 듯이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세르펜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지금 뭐 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내올 뿐이었다.
괜히 나 혼자 뻘짓한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설마 얘도 좀 심란한 상탠가?'
내가 손수 타 주는 우유에 집착 비슷한 행동을 보였던 것도 그렇고.
쪽지의 내용을 읽기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세르펜스의 행동이 다르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에 관한 건, 세르펜스에게 있어 역린이나 마찬가지잖아···.'
어쩌면 세르펜스는 세라투 자작이 자식을 대하는 태도를 본 그 순간부터, 동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티를 내지 못한 걸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평소보다 더 아이처럼 행동하며, 내게 어리광을 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 아이들에 신경이 팔려, 우리 애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니!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