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39)
"오늘도 성안을 수색하실 생각이십니까?"
세라투 자작이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기껏 소원을 대신 빌어줬건만.
맞장구 정도는 쳐줘도 될 텐데, 정말 인색하고 치사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네, 그럴 생각입니다. 신전이 터를 잡기에 적당한 땅을 보러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본다고 땅이 도망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침입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찾기 힘들어지니까요."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주교님께서 마음이 놓일 때까지 돌아다니셔도 좋습니다."
세라투 자작이 인심 쓰는 척 말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배포가 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우리가 성안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건 이미 허락받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세라투 자작의 말은 생색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라리 억울해하며 펄쩍 뛴다면 정말로 악숭이의 짓인가 고민해봤을 텐데. 저러니까 확신만 강해지네.'
사실 세라투 자작이 결백함을 증명하려면, 침입자를 끌고 와서 '모든 건 악숭이가 시킨 일'이라고 자백하도록 하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우리 쪽에는 고문의 스페셜리스트인 이단 심문관이 함께하는 바.
괜히 거짓말을 시켰다가 들통나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다.
그러니 세라투 자작이 저토록 당당한 건, 예의 그 침입자를 밖으로 빼돌렸다는 증거다.
내 방에 침입했던 날 밤.
침입자는 보고를 마친 후 곧장 영주성을 빠져나가, 깃펜에 찔린 상처를 치료받으며 쉬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세라투 자작의 여유만만한 상판대기가 '백날 천날 뒤져봐라. 뭐가 나오나.'라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쳇, 우리도 그딴 젤리 도둑에는 관심 없다 이거야!'
어차피 우리는 세라투 자작의 기 싸움 놀이에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그를 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영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 편히 영주님의 방을 수색해도 되겠네요."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예?!"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침입자의 목적이 저와 주교님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 또한 그들의 감시 대상일 겁니다."
방을 뒤져달라고 부탁하고 싶다는 세라투 자작의 말에 기겁한 것도 잠시.
이어지는 말에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겠죠."
"다른 가문에서 보낸 염탐꾼이라면 두려워할 것 없지만, 악마 숭배 세력에서 보낸 자가 저를 몰래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들더이다. 그러던 와중에 교단의 성직자 분들께서 몸소 제 방의 안전을 확인해 주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성을 뒤지고 다니는 것을 두고, 세라투 자작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한 행동으로 치부하는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에서 수상쩍은 물건이나 불법 서류 등이 나오더라도, '악숭이가 이간질하려고 가져다 놓은 거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초석이기도 했다.
"아, 참. 선물 드리기로 했던 펜은 주문을 넣었으니, 이번 주 내로 도착할 겁니다."
세라투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펜 얘기를 꺼낸다는 건, '빨리 일어나서 내 방의 안전을 확인해라. 펜 값어치는 해야 하지 않겠냐.'라는 뜻이리라.
"그거 벌써 기대되는군요."
"하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저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테니, 수고해 주십시오."
내 해석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듯. 세라투 자작은 내게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며, 연회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세라투 자작이 내게 한 방 먹였다는 걸 알아챘는지, 클로반이 얄미운 비소를 머금었다.
굳이 클로반을 상대하며 시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적당히 분한 척하는 게 세라투 자작의 방심을 끌어내는 데 유리할 것 같아서.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나는 클로반을 잠시 째려봐 준 뒤, 연회장을 나왔다.
"주인님의 방은 이쪽입니다."
시종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앞장서서 길 안내를 자처했다.
나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주요 인물의 방을 다 확인하고 나면 바로 떼어내 주리라 다짐했다.
'허···.'
세라투 자작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기시감을 느껴야만 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풍경화라던가, 바닥에 깔린 카펫의 무늬라던가.
체리색 가구들과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화병. 장식장에 들어찬 자잘한 소품까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지만, 어제 보았던 클로반의 방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 까닭이다.
세라투 자작의 방이 클로반의 방보다 넓고 화려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세라투 자작이 가주이고, 클로반은 그의 자식인 탓에 벌어진 격차였다.
'하다 하다, 인테리어 취향까지 자기한테 맞췄나 보네.'
나는 속으로 세라투 자작을 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티 내지 않고 방 수색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 세라투 자작이 없었기에, 방을 어지럽힌다고 해서 그의 속을 긁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클로반의 방을 뒤졌을 때와는 다르게 바로바로 물건을 제자리에 놓았다.
"···저기요?"
"네, 말씀하세요."
내가 방금 안을 들여다보고 내려놓은 도자기를 닦으려던 시녀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소는 나중에 하면 안 되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이 시녀는 윗사람이 지시한 대로 따를 뿐이었다.
나는 시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뒤, 다시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녀는 나에게만 붙은 게 아니라, 베일과 에드나에게도 따라붙어서 눈치를 주었다.
에드나는 눈치가 보였는지 비싸 보이거나 망가지기 쉬운 물건은 눈으로만 확인했고, 베일은 시녀가 주는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세라투 자작의 방을 뒤졌다.
세라투 자작이 클로반을 키워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얘기를 의식했기 때문이리라.
"작은 성기사님, 잘하고 계십니다! 열성적으로 임하는 자세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내 응원에 옷장을 뒤적이던 베일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칭찬에 힘을 내는 아이가 있는 반면, 쑥스러워하는 아이도 있는 법이다.
아무래도 베일은 후자에 해당하는가 보다.
나는 베일에게서 관심을 끄고 다른 일행들을 살폈다.
유지스는 벽에 붙거나 바닥을 기어 다니며 여기저기 통통통 두드려 댔는데, 누가 보아도 비밀 통로를 찾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방 안의 물건은 손대지 않았기에, 청소할 게 없는 터라 시녀가 따라붙지 않았다.
윈스톤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눈칫밥 먹을 이유가 없었다.
'세르펜스도 가만히 서서 신성력을 퍼트릴 뿐이니까 똑같겠···, 어?'
신성력 탐지가 끝났는지 세르펜스가 침대 주위를 기웃거렸고, 그런 그에게도 시녀가 하나 따라붙었다.
화병에 꽂힌 꽃을 뽑아 든 채로, 나를 힐끔거리는 세르펜스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꽃이 아야 하니까 그러면 안 돼?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눈썰미를 가졌구나?'
어떤 게 맞는 답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설정을 핑계로 녀석을 본척만척하며 신경을 껐다.
우리는 남은 오전 시간을 통째로 쏟아부어 세라투 자작의 서재까지 뒤졌으나, 의심할만한 물건은 발견할 수 없었다.
기껏 유지스가 찾아낸 비밀 금고도 별 볼 일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업무 관련 문서와 비상금으로 추정되는 금괴 몇 개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완전 허탕이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점심을 먹기 위해 별관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나서, 수고를 무릅쓰고 다시 본성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을 돌아볼 수도 있었지만, 세라투 자작 말고도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회 때 보였던 챈들러의 행동이 마음에 걸려.'
그냥 내가 과민하게 생각한 걸지도 모르나, 어차피 한 번은 찾아가 봐야 했다. 그게 오늘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방을 별관에 내어준 세라투 자작을 욕하며 정원을 가로질러 본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챈들러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큰 오라버니라면 '오늘도' 외출하셨을 거예요."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는 순간,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확인하니 그곳에는 르웰이 서 있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죄송해요."
"그런 거로 뭘 죄송까지 하십니까? 그보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시종장을 노려보았다.
'방 주인이 밖에 나갔으면 나갔다고 얘기를 해 줬어야지! 그냥 방까지 안내를 해?'
시종장이 우리를 감시하느라 바빠서, 챈들러의 외출 소식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르웰이 '오늘도'라는 말을 붙인 거로 보아 챈들러의 외출은 매일. 혹은 매주 반복된 일정임이 틀림없다.
"방을 확인하는 데, 큰 도련님이 반드시 계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시종장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질문했다.
오전에 세라투 자작의 방을 뒤졌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는 방 주인 허락 없이, 멋대로 들어가서 방을 뒤지는 무례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셨···군요."
시종장이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이곳에서 상당히 무례하게 굴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꼰대 설정에 알맞게 부합된다. 고로 나는 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반성 같은 건 하지 않겠다.
"마침 잘 되었네요. 이렇게 마주친 김에, 제 방을 먼저 확인해 주시겠어요?"
르웰이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했다.
만사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니, 의심이 들기 전에 의아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죠, 뭐."
나 혼자 따라오라는 것도 아니고, 일행들과 함께 가는 건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르웰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을뿐더러 안전까지 보장되었기에, 나는 흔쾌히 그 초대를 수락했다.
"시종장은 차와 다과를 내오도록 해. 손님을 방에 들이면서, 그 정도 격식은 갖춰야 하지 않겠니?"
"그런 거라면 저 말고···."
"다른 시녀에게 시켜도 좋아. 다만 네가 방에 따라 들어오는 건 삼갔으면 해. 교단의 성직자분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외의 외간 남성에게 활짝 열린 옷장을 보여주고 싶진 않거든."
르웰이 말과는 다르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르웰의 말은 그냥 시종장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참. 이분들이 아버지의 방을 살펴볼 때, 시녀들에게 청소를 하게 시켰다지? 그게 대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니?"
"그건···."
"시종장은 주교님을 안내해주는 건지, 감시하는 건지 태도를 분명히 밝히도록."
변명 따윈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르웰이 시종장의 말을 싹둑 잘라냈다.
시종장은 그저 세라투 자작의 명령을 듣고 따를 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곤란해하는 시종장의 모습을 보는 것이 꽤 고소했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풋 하는 소리를 흘리며 르웰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르웰의 방은 앞서 보았던 세라투 자작이나 클로반의 방 풍경과 사뭇 달랐다.
세라투 자작은 나이가 있다 보니, 인테리어가 고풍스럽긴 해도 올드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르웰의 방은 누가 보아도 젊은 사람의 방이라는 게 확 와닿았다.
깔끔하고 세련된 새하얀 가구들과 바닥에 깔린 원형 러그, 벽에 걸린 정물화, 협탁에 놓인 향초까지.
따라쟁이 누군가와 다르게, 그녀는 자신만의 색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