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40)
"이쪽에 앉아 주세요."
르웰이 창가에 놓인 조그마한 1인용 티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종장을 떨어뜨려 놓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역시나. 르웰은 대화를 나눌 목적으로 우리를 방으로 초대한 것이 분명했다.
아직 르웰이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상황 자체는 반겨 마땅한 일이다.
나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하나뿐인데, 본인은 어쩔 셈이지?'
그런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르웰은 화장대 의자를 들고 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으로 의자를 옮기는 모습이 힘겨워 보였으나, 르웰이 다람쥐처럼 잽싸게 움직인 탓에 도움이 필요하냐는 말 한마디 꺼내 보지 못했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르웰은 상당히 독립적이며 빚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 같다.
그리고 세라투 자작과는 다르게, 우리를 아랫사람처럼 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저희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이제 보니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관심이 없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요?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신 룩스메아 님과 교단이 자리하고 있는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됐습니다. 그보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자리까지 권하신 겁니까?"
"대화는 차가 오고 난 이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그보다 제 방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괜찮나요?"
나는 말을 빙빙 돌리는 르웰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으나, 그녀는 대화 자체를 나중으로 미뤘다.
시녀가 들어오면 대화가 끊길 테니 이따가 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온 시녀가 손 놓고 있는 우리를 보면 이상하게 여길 수 있으니, 뭐라도 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쳐다봤다.
세르펜스만 신성력을 퍼트리며 제 역할을 하는 중이었고, 나머지는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항상 수색에 앞장섰던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방을 뒤져도 되는 건지 헷갈렸는가 보다.
"다들 뭐합니까? 안 뒤지고."
"될 수 있으면 옷장과 침대는 여성분께서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들었죠? 각자 위치로! 빨랑빨랑 움직여요!"
나는 일행들에게 지시를 내린 후, 르웰을 쳐다보았다.
르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쥘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며 싱긋 눈웃음 지었다. 그래서 나도 씨익 웃어 보였다.
일단 따라서 웃긴 했는데, 다과상이 차려질 때까지 웃고만 있기에는 얼굴 근육에 경련이 올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첫째님께서는 매일 이 시간에 외출하시나 봐요?"
"지금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 얘기를 꺼내시는 건가요?"
르웰이 쥘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으며 황당한 소리를 해댔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내 표정이 재밌었는지, 르웰은 까르륵 웃으며 장난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별로 장난처럼 들리진 않았는데···.'
아주 잠깐일 뿐이지만, 르웰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던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눈빛은 분명한 견제였다.
그런데도 장난이라 우기니, 나도 '더워서 부치시려고 부채를 폈던 게 아니셨나 봐요?' 하고 맞받아쳐야 하나 고민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썰렁한 농담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르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예요."
"정기 모임 같은 거라도 참석하시나 봐요?
"모임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분위기를 봐서는 데이트처럼 보였어요."
내향적으로 보였던 챈들러가 정기적으로 외출한다길래, 무슨 일인가 했건만.
그냥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챈들러의 나이가 스물일곱이라 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스물일곱이고, 세르펜스는 스물여섯인데···.'
악마 숭배자가 판을 치는 이 시국에 연애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다니. 참으로 속 편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데이트처럼 보였다는 건···. 혹시 미행이라도 하신 겁니까?"
"굳이 미행하지 않아도 분위기만 보면 알 수 있지요. 안 그러던 사람이 꾸미고 다니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죠."
"아···."
"성직자분들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죠."
내가 나지막이 깨달음의 탄성을 흘리자, 르웰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성직자'라는 단어가 '모태 솔로'로 치환되어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 봬도 연애 경험이 한 번은 있었는데.
몹시 억울하지만, 교단의 성직자 신분 때문에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어서 침묵했다.
"참고로 약혼녀는 아니랍니다."
"예?! 약혼녀가 아니라면 설마!"
"오해는 하지 마세요. 큰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저희 삼 남매 중 약혼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요."
"아, 예에···."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
챈들러가 연애 중이라는 건, 내가 먼저 어딜 갔느냐고 물었으니 돌아온 대답이라 치자.
하지만 세라투 가문 자제들의 약혼 여부까지 내가 알아야 하는 걸까?
'무언가 중요한 대화를 하려고 방으로 부른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TMI를 듣고 있노라니, 그냥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교님, 옆에 있는 줄을 당겨 주실래요?"
세르펜스의 집무실이나 응접실에도 이와 비슷한 줄이 있었기에, 르웰이 지칭한 줄의 쓰임새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줄을 당기면 문밖에 걸린 종 따위가 울리는 구조일 테다.
나는 앉은 상태로 손을 뻗어 줄을 잡아당겼고, 바로 문이 열리며 시녀가 서빙 카트를 밀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줄이 있는 걸 보면, 방에 방음이 잘 되나 봐요?"
"크게 소리를 지르면 밖에서도 들리긴 해요. 하지만 목도 아프고, 교양 없이 매번 소리를 지를 수 없어서 이런 줄을 사용한답니다. 오러나 마력 같은 힘을 다룰 수 있는 분들은 목소리를 증폭시켜, 구체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던데 저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요."
르웰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까지 늘어놓았다.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수다스럽고 사교성 좋은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그렇게 르웰이 평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얘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시녀는 차를 따르고 커다란 홀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담았다.
티 테이블이 워낙 작은 크기라, 찻잔 두 개와 접시 두 개만으로도 꽉 찼다.
그 때문에 시녀는 찻주전자와 남은 케이크가 올려진 서빙 카트를 그대로 둔 채, 방 밖으로 나갔다.
"지금 계신 별관은 방음이 안 좋은 편인데, 시끄럽진 않았나요?"
"다행히도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이 없어서,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묵는 방에는 이런 줄이 없는 거로 보아, 확실히 여기보다 방음이 안 좋긴 한가 보네요."
"주위가 조용할수록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법이죠."
르웰이 후후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그 말이 마치 별관에서는 말을 조심히 하라고 경고하는 듯 들렸다.
아니, 이건 경고가 틀림없다.
일견 평범한 수다처럼 들렸던 르웰의 말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곳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밖에서 들을 수 없다. 하지만 별관은 작게 말해도 누군가 엿들을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다.
르웰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거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세라투 가문의 자제분들께서는 어째서 아직 약혼을 하지 않으신 건지···. 실례가 아니라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실례랄 것까지 있나요? 저희 가문처럼 재력 있는 귀족가라면 청혼서가 많이 들어올 텐데, 아직까지 결혼은커녕 약혼조차 하지 않았으니 의아하게 여기실 만도 하죠."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아까 르웰이 방출한 TMI를 끌고 와서 질문을 던지자, 르웰이 의뭉스럽게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멋모르고 그냥 지나쳤으면 대화가 결렬될 뻔했다.
"이거 이거! 제가 셋째님을 어린 아가씨라 생각하고 얕보았나 봅니다. 사과하죠."
내 실제 나이를 생각하면 '어린 아가씨' 같은 단어 선택은 우습기 짝이 없으나, 에인젤 주교는 서른일곱 살인 데다가 꼰대 중에 꼰대였다.
고작 열여덟 살인 르웰을 상대로는 이조차도 지나치게 정중한 말이었다.
"천만에요."
르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로 답하며,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에인젤 주교가 꼰대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인지, 아니면 어린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게 익숙했던 탓인지.
그조차 아니라면 일부러 남들이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도록 행동했기에, 기분 상할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
아직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그래서 세 분께서 아직까지 약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안 했다기보다는 못 했다고 봐야겠죠."
"영주님 때문에요?"
"맞아요."
찔러보려고 던진 질문에 르웰이 선뜻 대답했다.
이제까지 의뭉스럽게 행동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너무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준 덕택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귀족가에서 혼인이란 정치적으로 유용한 카드죠. 아버지께서는 그 카드를 아껴 두시는 거예요."
르웰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챈들러와 르웰의 경우는 그럴지 몰라도, 세라투 자작이 클로반을 약혼시키지 않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일 거다.
'클로반이 누군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의 자리를 강탈했을 때 들킬 위험이 높아지겠지.'
아무리 정략혼일 뿐이라도 약혼을 한 이상, 주기적으로 교류하며 개인적인 대화를 주고받게 될 테니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 그런데 첫째님께서는 데이트하러 다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사교계에서 큰 오라버니의 평가는 좋지 않을뿐더러, 큰 오라버니와 연애 중인 영애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상대는 아마도 평민이겠죠."
"그러니까···. 상대가 평민일 테니까 세라투 자작이 알고도 모른 척해 준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후계자로 점찍어 둔 건 작은 오라버니니까요. 후계자 승계에 방해가 될 뿐인 큰 오라버니가 귀족가와 연을 맺게 된다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우시겠죠."
그렇게 말하며 르웰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르웰은 세라투 가문의 자제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눈으로 제 아비의 행동들을 보아왔을 거다.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무정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세라투 자작 같은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게 있다면, 매몰차게 치워 버릴 수 있다.
애초에 연연할 정이 없기에 망설일 이유 또한 없을 테니까.
'클로반의 자리를 꿰차게 되면, 챈들러는 제 자리를 뺏을지도 모르는 경쟁자가 될 테니 죽여 없애고. 르웰은 바꿔치기한 걸 알아볼 수도 있으니, 먼 곳으로 시집을 보낼 계획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인상이 찡그려진 까닭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 탓으로 돌렸다.
"해가 너무 강해서 그런데 커튼 좀 쳐도 되죠?"
"그렇게 하세요."
르웰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성력 탐지를 끝낸 세르펜스가 움직여 커튼을 쳤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셋째님께서는 영주님이 그 유용한 카드를 아직 쥐고 계신 이유도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어요."
"말씀해 보시죠."
"주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쩐지 제가 시험받는 기분이 드네요."
그렇게 말하며, 르웰은 부치지도 않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 지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이 주교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기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라며 가늠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