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2)
"특별···, 임무?"
르웰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유지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단 심문관의 임무와 그 연장이라는 건···. 서, 설마 왕실이 악마 숭배 세력과···!"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던 르웰이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쉽게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될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그런 르웰의 반응에 나와 유지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답을 보냈다.
"새로운 신전을 세운다는 건, 그저 눈속임일 뿐이었군요."
"어? 말투가 다시 돌아왔네요?"
"저는 '아직' 자작 영애일 뿐이니까요.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교단 측에서는 저하의 즉위를 돕기로 결정 난 건가요?"
이제 더는 내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마음이 다급해진 건지.
르웰은 내 물음을 무시하며, 자기가 할 말만 다다다 쏟아냈다.
"돕는 건 아닌데, 돕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모호하고···."
"교단에서는 기회를 주었을 뿐입니다."
내가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버벅거리자, 세르펜스가 몸을 반쯤 틀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 세르펜스의 눈빛 속에서, 반성을 많이 했으니 이제 그만 용서해 달라는 간절함이 엿보였다.
어차피 언제까지고 녀석을 벽 앞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손짓으로 녀석을 불러들였다.
"기회요?"
"한 나라의 붕괴는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가 생길 테고, 그것은 악마 숭배 세력이 바라 마지않는 일입니다."
세르펜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서서, 르웰의 물음에 대답했다.
도도한 표정으로 진지한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빈 접시를 계속 들고 있는 걸 보니, 케이크가 더 먹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녀석에게서 접시를 빼앗아, 케이크를 한 조각 올린 뒤 돌려주었다.
아동의 복지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으니까 이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그 말인즉.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니, 교단 측에서는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라는 건가요?"
르웰이 세르펜스의 손에 들린 접시를 슬쩍 쳐다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질문했다.
케이크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사교계에서는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세라투 자작이 르웰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여러 사교장에 드나들게 했을 테니. 저런 대처가 능숙할 법도 했다.
"네, 그렇습니다. 바스툴 2왕자 저하의 주장에 따르자면, 현 바스툴 왕은 악마 숭배 세력과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으며, 나머지 왕족들 또한 그 뜻에 동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내부 고발자인 2왕자 저하를 보호 및 감시하며, 그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으스대거나 케이크를 자랑하지 않고,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벽을 보고 반성하게 시킨 것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교단에서는 직접적인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군요."
"만일 저하께서 교단에 바스툴 왕국의 참정권을 제공하겠노라 약조하신다면, 적극적인 도움을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세르펜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웰의 시선이 베일에게로 향했다.
룩스메아 교단 소속도 아닌 세르펜스가 저런 말을 할 줄은 예상도 못 했는지, 베일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런 약속은 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네!"
속사포처럼 빠르게 내뱉어진 베일의 목소리에서 억울함이 뚝뚝 넘쳐흐르는 듯하다.
그에 르웰이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으로 모실만한 사람이 없었다면 교단의 제안을 고려해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네요."
"그래도 저하의 주장대로 왕실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잡았다면, 그들을 처단하는 것에 '협력'할 수는 있습니다."
"일부러 말 순서를 그렇게 하신 건가요?"
"주교님의 가르침에 따랐을 뿐입니다."
참정권 제공을 거부당하고 나서야, 협력 얘기를 꺼낸 세르펜스의 화법에 르웰이 혀를 내둘렀다.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표정으로 보아, '단것만 먹을 줄 알았던 막내 신관이 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세라투 령에 머무는 건 저하의 결정인 건가요? 세라투 가문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그건 아닐세. 세라투 가문을 포섭하자는 의견을 먼저 낸 건, 에인젤 주교님이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이 솔직한 왕자님은 굳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베일을 보는 르웰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알고 있네. 내가 수동적이었다는 것쯤은. 나는 최근까지 방황해왔고, 여기 계신··· 분들께 의지하고 싶다고도 생각했네. 하지만 이제는 외면하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아. 믿어주게나."
베일이 절절한 목소리로 르웰에게 말했다.
그에 르웰은 샐그러진 표정을 풀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하인 제가 저하를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 저하께서도 제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 주세요."
"약속하겠네."
르웰이 왕을 허수아비로 세운다 어쩐다 할 땐,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다행히도 베일을 멋대로 쥐고 휘두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모셔야 할 왕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동료로 대하겠다던 베일의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둘 모두에게 잘 된 일이다.
"흠, 흠! 그리고 이곳에 머물기로 한 건, 세라투 가문의 힘이 내게 필요하기 때문만이 아니네."
베일이 멋쩍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그와 대화를 나누던 르웰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누군지는 밝힐 수 없지만, 이 대륙에는 룩스메아 님께 계시를 받는 '신의 사자'가 있거든요.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세라투 가문의 '젊은 가주'가 악마 숭배 세력과 손잡게 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뭐, 서른일곱인 제 기준에서는 쉰다섯이란 나이가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신의 사자께서 그냥 가주가 아닌 '젊은 가주'라고 말씀하신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죠."
"그래서 주교님께서는 세라투 가문이 쌓아온 재력이 악마 숭배 세력에 넘어가기 전에, 저하께서 거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내가 '신의 사자'와 '나'를 따로 떼어내서 설명하느라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자, 세르펜스가 간단하게 요점을 덧붙여 정리했다.
'그건 그렇고, 세르펜스 저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도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은 건가?'
나는 세르펜스의 손에 들린 빈 접시에 케이크 조각을 리필을 해주는 대신, 그냥 고개를 돌려 르웰의 상태를 살폈다.
르웰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며,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르웰이 천천히 입을 뗐다.
"혹시 그 젊은 가주가 남성이었습니까? 그래서 저하께서는 제게···."
"성별에 관한 얘기는 듣지 못했네."
베일의 말에 르웰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베일이었기에, 르웰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저런 것부터 확인하다니···.'
자신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한 선택이었다는 식의 대답이 나왔다면, 르웰은 필시 상처받았을 거다.
이번에는 악숭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성별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건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젊은 가주가 악마 숭배 세력과 손잡게 되는 건 언제였나요? 작위를 받기 전? 아니면 그 후?"
르웰이 자신의 손으로 구기는 바람에 생긴, 드레스의 주름을 툭툭 털어내듯 펴며 질문했다.
자신이 언제 동요했느냐는 듯 냉정한 목소리로 말이다.
"그에 관한 얘기는 없었던 거로 보아, 거기까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계시라는 게 원래 좀 두루뭉술한 면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나게 자세한 겁니다. 교황 성하께서 이르시길, 역대급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신의 사자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비밀로 하는 거로군요?"
"뭐, 대충 그런 거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 몰라라 대답했다.
이런 성의 없는 내 태도에도 르웰은 어차피 신의 사자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듯,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좌우간 주교님께서 저희 삼 남매를 한 명씩 따로 살펴보려 한 건, 협력자를 구하기 이전에. 악마 숭배 세력과 손잡을 누군가를 가려내기 위함이라는 거네요."
"협력자를 찾는 건 저쪽이 할 일이었죠."
나는 손바닥을 펼쳐 정중하게 베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가볍게 턱짓으로 가리켰겠지만, 이제는 신하도 딸렸으니. 전보다 존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르웰은 이러한 존중의 표현을 당연하다는 듯 그냥 넘기며,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로 무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돌연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주교님께서는 저하께서 왕이 되시는 게,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대륙에 득이 된다는 걸 알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세라투 가문을 포용하라는 조언을 하신 걸 테고요."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렇죠."
"그 다른 이유조차, 저희 가문의 힘이 악마 숭배 세력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요?"
나긋나긋한 말투로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던지는 르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대화의 종착점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저를 상대로 귀족들과 거래하는 화법을 연습해 보는 게 아니라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죠? 자신이 가주가 되는 걸 도우라고."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공짜로는 안 됩니다."
"영지 내 가장 좋은 땅을 내어주겠다는 약속으로는 부족한가요?"
"에이~. 신전 설립 같은 건, 그저 핑계였다는 걸 뻔히 눈치채셨으면서 이러시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신전을 설립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죠."
르웰이 말장난 같은 얘기로 내 말을 받아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후 베일이 왕이 된다면, 그를 첫 번째로 따르고 가장 큰 도움을 준 르웰의 가문은 지금보다 더 번창하게 될 거다.
신전을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 친다면, 적어도 바스툴 왕국 내에 이보다 좋은 입지 조건은 없다.
악숭 세력 처단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던 약속도 유효할 테고.
"하지만 신전이 세워지더라도, 제가 그곳에 거처하게 되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어째서죠?"
내 대답이 의외라고 여겨졌는지, 르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질문의 답은 내가 아니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있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매우 유능하시어, 이곳저곳 불려 다니시며 여러 임무를 수행하고 계십니다. 저로서는 그런 주교님이 걱정스럽기는 하나···. 지금과 같은 때에 주교님께서 한곳에 머무른다는 건, 전 대륙적 손실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맞아요. 주교님은 아주아주 바쁜 분이시죠. 이번 임무를 끝마치고 난 뒤에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앞다퉈서 에인젤 주교의 향후 일정을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