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5)
세르펜스의 얘기가 너무 터무니없던 나머지, 순간적으로 그를 나무라는 듯한 내용의 글을 써 버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다음번에 챈들러가 데이트하러 갈 때, 몰래 뒤쫓아간다는 선택지가 생겼으니 말이다.
[ 아도르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무턱대고 나무라듯 얘기해서 미안해. ]
[ 아니다. 내가 실수를 했으니, 혼이 나는 건 당연하다. ]
[ 그건 아도르의 실수가 아니야.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잖아? 혼내려던 의도 따윈 없었어. 아까는 내가 너무 황당해서 그랬어. 탐지하려고 흩뿌린 옅은 신성력에 그냥 소멸해버리다니. 챈들러는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그런 기운을 묻히고 온 걸까? ]
나는 마침표를 찍은 후. 조심스럽게 세르펜스의 안색을 살폈다.
녀석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내가 적은 글을 읽었다. 그리고 내 표정까지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내가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무작정 잘못을 덮어주는 게 아니란 걸, 알아봐 준 거다.
그 모습에 나는 안도하며, 마음 편히 의자에 앉아 글을 적었다.
[ 그 마인 말인데, 혹시 폴드 공국의 공왕일까? ]
[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악마와 계약한 자가 추가로 생겼을 수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
세르펜스도 의자에 앉아 글을 적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성검의 주인]에서 타락펜스가 직접 '세라투 후작'에게 접근했었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공왕도 직접 나서서 세라투 가문의 후계자 중 누군가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챈들러의 연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 가능성을 높이는 것에 한몫했다.
여성인 데다가 마인이기까지 하고. 거기다가 최근 바스툴 왕국 내에서 마물이 일으킨 기차 사고도 있었으니.
공왕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면 그게 더 놀라울 일이다.
'하필이면 챈들러에게 접근한 거야 뭐···.'
클로반은 타락펜스가 한 번 써먹었고 르웰은 주관이 확고하다.
그러니 클로반 외에 정신적 결함이 뚜렷한 챈들러를 이용하려 한 걸 테다.
굳이 연인 관계를 맺은 것도 그렇다.
애정 결핍이 있는 상대를 좌지우지하기에, 연인만큼 적절한 관계도 없을 테니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다시 펜을 들어 올렸다.
[ 혹시 마인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기운이 묻어나기도 해?
내가 아는 바로는 마인이 일부러 그 기운을 방출하여 신체나 옷가지 등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거나, 강제로 몸속에 주입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없다고 알고 있거든. ]
[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
[ 우리. 그러니까 교단의 성직자들이 세라투 영주성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악숭이들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흑마력도 아닌 마인 특유의 기운을 남기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니 정말로 이상했다.
함정을 파놓고 있는 거라면 좀 더 티를 팍팍 냈을 텐데, 고작 탐지하려고 퍼트린 신성력에 정화되어 사라져 버려서야.
어지간한 사람들은 긴가민가해 하다가도, 착각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기 딱 좋지 않은가.
[ 어쩌면 그자는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는 채로, 상대방의 물건을 훔쳐 온 걸지도 모르겠군. ]
[ 챈들러가 제 연인의 물건을 훔쳤다고? 대체 왜? ]
[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거기까진 모르겠다. ]
[ 해 본 사람도 보통은 모를 거야. ]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물었던 건 아닌지라, 나는 가벼운 농담을 적어놓고 고민에 잠겼다.
부유한 세라투 가문의 자제인 챈들러가 타인의.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훔칠 이유는 뭐가 있을까?
'뭐가 됐건 정상적인 연인 관계로 보긴 어렵겠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는 나중에 고민해보기로 하고, 나는 당장 떠오른 새로운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 마인의 특징으로는 역안이 있잖아. 그런데도 정체를 모를 수 있을까? ]
[ 눈을 감거나 가리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숨길 수 있는 특징이다. ]
우문현답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세르펜스가 매우 간단하고도 명료한 대답을 내놓았다.
[ 아무튼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나갔다 오겠다는 얘기지? ]
[ 그래. ]
[ 굳이 새벽인 이유는 윈스톤이 방문 앞을 지키고 있을 때 다녀오기 위함이고? ]
[ 그렇다. ]
[ 아도르의 실력이라면 지금 이 시각에도 성안을 몰래 돌아다니는 데 별지장 없지 않아? ]
[ ]
내 연이은 물음에 긍정을 표하던 세르펜스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더니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기왕이면 챈들러가 자고 있을 때보다, 욕실에서 씻고 있을 때 방을 뒤지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
[ 옷 안에 넣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은 물건일 거다. 그러니 욕실에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 ]
[ 그럼 욕실에서 나올 때 손에 들고 있는 게 훔친 물건이겠네! 참 알기 쉽다, 그치? ]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해도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을 직감한 걸 테다.
[ 윈스톤이 문 앞에 있나, 같은 층에 있나. 거기서 거기잖아? 세니어도 허리춤에 차고 있는 데다가, 유지스랑 에드나도 근처에 있고. 그리고 새벽보단 지금이 더 안전하겠지.
나도 지금 당장 나가라는 건 아니야. 곧 베일이 저녁 먹고 여기로 올 거잖아? 그때 다녀와. ]
나는 세르펜스를 달래겠답시고 글을 적었는데,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베일의 이름이 적힌 시점에 특히나.
[ <선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다녀오긴 하겠다. 하나, <선우>도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자의 꾐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
[ 그자? 혹시 베일을 말하는 거야? ]
[ 그렇다. ]
[ 설마하니 베일이 나를 바스툴 왕국에 스카우트하려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얘길 하는 건 아니지? 그럴 일은 없고,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안 넘어가니까 걱정 붙들어 매. ]
[ 믿겠다. ]
세르펜스가 종이가 아닌 나를 직시하며, '믿겠다.'라는 세 글자를 적었다.
저래서야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번에 배신하면 다시는 믿지 않겠다.'라는 선고처럼 느껴질 뿐이다.
녀석은 그 사실을 알고서 저러는 걸까?
애석하게도 그 질문은 던질 수 없었다.
베일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자신의 방문을 알렸기 때문이다.
"주교님, 저 렉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내 대답이 떨어지자, 베일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갑옷을 갖춰 입고 두툼한 책을 한 손에 든 모습이 언밸런스하다.
"자, 자. 이쪽에 앉아서 성서를 펼치세요."
나는 세르펜스가 앉아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고, 세르펜스는 방금까지 나눈 필담이 적힌 종이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잠입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으러 욕실로 향했다.
베일은 그런 세르펜스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 세르펜스는 잠깐 나갔다 올 예정입니다. 막내 신관님이 계속 방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
나는 새 종이에 글을 적어서 베일에게 보여줬다.
막 투구를 벗어든 베일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아까 챈들러에게서 마인의 기운을 감지했거든요. 너무 미약한 기운이라, 이내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
[ 설마 악마 숭배자와 손을 잡게 된다던 젊은 가주가 챈들러 공자였던 겁니까? ]
베일이 투구를 소리 없이 내려놓은 후. 테이블 위에 놓인 세르펜스의 펜을 들어 글을 적었다.
내가 지칭했던 '세라투 가문의 젊은 가주'는 클로반일 가능성이 99.9%였으나, 구태여 그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
[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봐야겠죠. 대체 악숭 세력과 언제 접촉을 하나 했는데, 이맘때였나 봅니다. 다행히 늦진 않았네요. ]
[ 그래도 악마 숭배 세력과 접촉을 했다는 건 ]
베일이 굳은 표정으로 글을 적는 도중에 욕실 문이 열리며 세르펜스가 방으로 나왔다.
체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검정 일색의 타이트한 옷과 코와 하관 전부를 가리는 복면. 그리고 허벅지와 팔뚝, 허리춤에 벨트로 고정한 흑색 단검들까지.
누가 보아도 '나는 암살자요!' 하고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외치는 복장이었다.
[ 혹시 몰라서 제가 챙기라고 시킨 겁니다. ]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서둘러 글씨를 써서 베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특정 직업군의 전문가 포스를 물씬 풍기며 나타난 세르펜스의 모습에 놀라, 입을 떡 벌렸던 베일이 그제야 진정하고 표정을 수습했다.
세르펜스는 베일이 놀라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뒤 붉은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을 옷 안으로 숨겼다.
그러고는 암막 커튼이 처진 창문 앞에서 꼼지락대다가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면서 창문도 닫았는지, 커튼은 잠시 하느작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흔들림이 멎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묘한 세르펜스의 몸놀림에 베일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 세르펜스쯤 되는 실력자면 저 정도는 기본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저 녀석은 못 다루는 무기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녀석을 만능펜스라고 부르죠. ]
[ 예 ]
제정신을 찾은 베일이 매우 성의 없는 답변을 적었다. 얼마나 성의가 없었는지, 마침표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선명하게 '그걸 왜 네가 자랑하고 있냐?'라고 따지는 듯한 모양새다.
나는 그런 베일의 표정을 무시하기로 했다.
[ 그래서 아까 무슨 얘기를 하시려던 겁니까? 악숭 세력과 접촉했다는 건, 그다음은요? ]
[ 그랬다는 건, 결국 세라투 가문의 사람들은 전부 연좌제로 엮이게 되는 것 아닙니까? ]
[ 아직 참작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챈들러가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채,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면 말이죠. ]
내가 적은 글을 읽고 난 베일의 표정에 안도감이 어렸다.
르웰이 은연중에 형제들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베일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테지.
'그런 점에서 휴마눈새는 괜찮은 건가?'
부디 세르펜스와의 엇나간 관계를 바로잡는 김에, 집 나간 눈치도 바로 잡아 왔으면 좋겠다.
나는 속으로 휴마누스의 집 나간 눈치의 무사 귀가를 빌어주며, '챈들러가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적어서 베일에게 보여줬다.
세르펜스의 의견이라는 부분을 강조했더니, 베일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 아 참. 르웰에게 충성 서약을 받은 거, 축하합니다. ]
[ 감사합니다. 그런데 챈들러 공자에 관한 건, 영애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
아직 축하를 받기에는 시기상조라 여긴 걸까?
베일이 내 축하 인사에 짧게 예의만 차린 후, 곧장 본론을 이어 나갔다.
[ 당연히 얘기해야죠. 악숭이들이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까. 더군다나 아까는 시종장 때문에 제대로 된 계획도 못 들었잖아요? ]
[ 아무래도 영주성 내에서는 세라투 자작의 감시망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 역시 만나려면 밖에서 만나야 하려나? 게다가 챈들러가 데이트하러 갈 때 뒤도 밟아야 하니, 외출은 필수일 텐데. 그러려면 수색을 빨리 끝내야.. 아, 근데 어느 세월에 성을 전부 뒤지고 다니지? ]
[ 그런데 왜 갑자기 반말을 하십니까? ]
내가 글씨를 끼적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베일이 불쑥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다.
[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며 혼자 고민하는 겁니다. 의견 낼 거 아니면, 제 생각을 함부로 읽지 말아 주세요. ]
내가 적은 이 문장을 끝으로, 베일은 더 이상 종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홀로 사색에 잠겼다.
그렇게 나와 베일은 각자 고민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