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79화 (479/925)

479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7)

나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 그리고 에인젤 주교가 성기사 단장직에 프레이 님을 올릴 계획을 짜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에인젤 주교는 프레이 님을 정신적으로 속박하고 있는 데다가, 이제는 렉스 님까지 좌지우지하려 한다고도 했습니다. ]

갈수록 가관이다.

이래서야 에인젤 주교가 프레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어렸을 때부터 천천히 길들여 놓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시종장이 편지를 다시 가져가 버렸다고 했으니, 윈스톤은 기억에 남는 내용만 떠오르는 대로 적은 걸 테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적힌 내용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에인젤 주교는 엄청난 악인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아니, 잠깐만! 프레이가 성기사 단장직이 되면 좋겠다는 대화를 나눈 건 분명···.'

영주성에 묵게 된 첫날.

침입자가 창문 밖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와 세르펜스가 방안에서 나눈 대화를 대놓고 언급하면서까지, 에인젤 주교를 악인으로 몰아가다니.

어지간히도 이간질에 성공하고 싶었는가 보다.

'시종장이 직접 편지를 쓴 건 아닐 테고, 분명 누가 시켜서 편지를 전달한 것뿐이겠지.'

프레이를 성기사 단장으로 올리려 한다는 내용으로 보나, 편지를 건네준 사람이 시종장이라는 점으로 보나.

발신인은 세라투 자작일 것이다.

하필이면 챈들러가 공왕과 만난다는 게 기정사실이 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골치 아프게 됐다.

원래는 악숭이와 손잡은 누군가가 이간질하며 접근할 수 있도록 내분을 가장했던 건데.

엉뚱하게 세라투 자작이 이렇게 나오면···.

'어?'

나는 잠시 생각을 뒤로 미루고, 윈스톤이 쓴 글을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 또한 에인젤 주교는 룩스메아 교단에 있어서는 안 될 희대의 악인이며, 그가 신전을 장악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전을 장악한 후 힘을 키워, 교단 내 세력 다툼을 일으킬 거라던가. 종파가 나뉘게 되어 교단이 분열될 거라고도 했습니다.

편지에는 그렇게 추측하는 구체적인 이유도 거론되었는데,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미처 외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가관이라는 단어를 너무 일찍 써버린 듯하다.

정말로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성검의 주인] 속 타락펜스 뺨은 못 치겠지만, 그 하위 호환 정도는 가능하리라.

만일 내가 에인젤 주교의 정체를 모르고서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곧장 교황에게 일러바쳤을지도 모르겠다.

[ 아무튼 편지를 쓴 사람은 에인젤 주교를 막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기사의 신분으로 주교에게 직접 손을 쓰기 껄끄럽다면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자세한 방법은 일주일 뒤에 알려 주겠다는 내용으로 편지가 끝났습니다. ]

윈스톤의 글을 끝까지 읽었지만, 어디에도 발신인의 정체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 중요한 사항을 깜박했을 리는 없고. 보내는 사람이 아예 적혀있지 않았다고 봐야겠지.

'혹시 이거 이중 덫이 아닐까?'

현재 세라투 자작은 '에인젤 주교'와 기 싸움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싸움이 아니라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다.

만약 에인젤 주교가 파면당하고 청렴하고 고지식한 주교가 새로 온다고 치자.

그땐 타협의 여지조차 없어, 신전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라투 자작이 이런 편지를 보내서 득이 될 건 하나도 없다.

편지에는 침입자가 감시 중일 때 나눴던 대화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방의 방음은 매우 형편없다.

르웰도 그 사실을 지적했었고, 우리가 방 안에서까지 필담을 나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면 프라시더스 공작저에 있는 별관처럼, 방에서 나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는 모종의 장치가 있을 수도 있고.'

시종장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분명 그 날 있었던 대화도 엿들었을 테다.

그리고 시종장이 편지를 전달했다는 건, 편지를 쓴 사람은 시종장을 제 수족으로 부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와 윈스톤을 이간질할 수 있으면 좋고. 그것이 안 되면 나와 세라투 자작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세라투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면서, 악숭 세력과 접촉한 사람.

즉, 챈들러뿐이다.

챈들러가 연인을 위해 가주가 되고자 결심하여 직접 계획을 세운 것일 수도 있고.

공왕이 챈들러를 위하는 척, 조언을 가장하여 그를 조종한 것일 수도 있다.

'스토커와 마인이라니, 정말 환장할 조합이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윈스톤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뒤로 넘겼다.

세르펜스가 적은 글은 우체국에 다녀온 뒤.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시종장이 2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을 느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윈스톤에게 필기구를 건네고 어쨌고 하는 상황 설명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서론 부분을 대충 훑어 넘기고, 세르펜스의 추론이 시작된 부분부터 정독했다.

[ 내 생각에는 시종장의 배후에 있는 건 첫째 공자가 아닐까 한다.]

나와 같은 의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발신인으로 챈들러를 지목한 문장 뒤에는 그렇게 생각한 까닭이 이어졌는데, 내가 떠올린 생각과 거의 엇비슷했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나와 동급이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나보다 한 단계 나아간 추측을 내놓았다.

[ 윈스톤 경이 받은 편지에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건 의도된 소행으로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글을 쓰는 것 또한 직접 하지 않고 시종장에게 시켰겠지.

그도 그러할 것이, 성기사 오르덴이 편지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에인젤 주교와 반목할 경우.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신임을 밝히고, 에인젤 주교와 성기사 오르덴을 함정에 빠뜨려 악마 숭배 세력에 넘기는 것이 가능하잖은가?

반대로 편지를 보낸 발신인을 의심하여 에인젤 주교에게 알린다면, 세라투 자작에게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텀을 둔 것 또한, 성기사 오르덴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챈들러가 윈스톤에게 편지를 보낸 게, 공왕이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세르펜스가 적은 글을 읽고 났더니, 나도 그쪽으로 마음의 무게가 쏠렸다.

'최소한 발신인을 적지 말라는 의견을 낸 건, 공왕이 확실한 것 같네.'

그 뒤로 이어진 내용은 '챈들러의 연인과 윈스톤이 받은 편지에 관련된 추론'을 글로 적어, 유지스와 윈스톤에게 전달했다는 얘기였다.

특히 윈스톤에게는 티 내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하라는 글을 덧붙였다고도 쓰여 있었다.

'일단 일주일 후에 챈들러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볼 심산인가?'

신전에 지원 요청을 보냈으니, 시간을 끌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 읽은 종이를 세르펜스에게 돌려주었다.

세르펜스는 윈스톤의 글이 적힌 종이를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자신이 쓴 글이 적힌 종이를 내게 떠넘겼다.

'이걸로 뭐 어쩌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나는 종이를 든 채로 세르펜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세르펜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펜을 꺼내어, 그 종이 뒷면에 무어라 글을 적었다.

[ 내가 처음으로 <선우>에게 쓴 편지인데, 필요 없는 건가? ]

워낙 흉흉한 내용 일색인지라 이게 편지인 줄도 몰랐다.

더구나 사적인 얘기도 없고 안부도 묻지 않은 데다가, 인사말조차 없다.

나에게 보내는 첫 편지가 이딴 내용이어도 괜찮은 건지, 오히려 세르펜스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것보다, 너는 이제껏 휴마누스가 정성 들여 쓴 편지들을 전부 불태웠잖아!'

할 말이 많았지만, 꼭 해야 할 얘기만 해야겠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세르펜스에게 펜을 달라고 요구했다.

[ 이건 그냥 보고서잖아. 편지를 선물하려거든, 이런 내용 말고 일상적인 얘기를 써 줘. 내가 아도르의 생일 때 적어준 롤링 페이퍼 같은 느낌으로 ]

'롤링 페이퍼'를 적은 순간.

불현듯 베일의 인사를 받으며 종이 뭉치를 분류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 혹시 필담한 종이들 전부 모으고 있는 거야? 롤링 페이퍼처럼 소장하려고? ]

내가 쓴 문장을 본 세르펜스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이내 울상으로 변했고, 녀석은 '그러면 안 돼?'라고 묻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나와 나눈 필담 중에는 녀석에게 위로가 될 만한 내용도 꽤 있었으니까.'

나중에 다시 꺼내 보고 싶을 정도로, 내가 해 준 얘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머쓱하면서도 뿌듯해졌다.

[ 아니야, 괜찮아. 이런 건 모아도 돼. 시간이 흐르면 다 추억이 될 테니까, 잘 간직하고 있어. ]

가져도 된다는 얘기에 세르펜스는 기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종이와 펜을 가져다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손짓으로 누우라고 지시한 후, 신성력 구체를 거두고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통해 밝은 햇빛이 쏟아졌다.

"주교님, 아침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세르펜스가 이제야 일어났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나도 녀석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으으으-!'하는 소리를 내며 꾸물꾸물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 * *

오전에는 병영의 무기고를 살펴보았고, 오후에는 세라투 자작의 집무실과 본성의 지하실에 있는 창고를 들쑤셨다.

창고에는 무기고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무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악숭이 때문에 불안해서 모아 뒀다고 변명할 게 뻔했기에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밤이 올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라투 영지에 오고 나서 가장 평화로운 하루였다.

'하지만 곧 아니게 되겠지. 세르펜스가 분란을 일으킬 테니까.'

나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암살자 분장을 한 세르펜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시 봐도 전문가 포스가 장난 아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을 갖췄음에도 육중한 느낌은 전혀 없고, 날렵한 라인을 자랑하는 몸매 덕택에 전문성이 더 돋보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믿음직해서 너도나도 암살 의뢰를 맡길 것만 같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절대 신관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교님.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세르펜스가 돌아와서 갈아입을 잠옷을 침대 위에 펼쳐 놓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잘 수 없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나도 공범이었기에, 녀석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막내 신관님도 잘 자요."

"네, 그럼 불 끄겠습니다."

이번만큼은 세르펜스가 불을 끄며 언행일치를 선보였다.

그리고 방 안이 어두워지자, 녀석은 창문을 통해 소리소문 없이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기를 십여 분. 방 안에서 스르륵, 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세르펜스가 옷을 갈아입는 걸 테다.

스륵거리는 소리가 사라질 때 즈음, 문밖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뭐야! 시끄럽게. 이제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으음···.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내가 짜증 내는 톤으로 말하자, 세르펜스가 잠긴 목소리를 꾸며내어 대답하며 방 불을 켰다.

불이 들어오자 세르펜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흰 잠옷 차림에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자다 깬 사람의 모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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