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1)
"그러고 보니, 챈들러 님께서 연인분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 보이긴 했어요."
씁쓸함에 잠겨있는 나를 대신해서, 유지스가 쾌활하게 말했다.
꾀꼬리처럼 맑은 그 목소리에 르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큰 오라버니께서 요즘 차려입고 자주 밖에 나가는 걸 보고, 그냥 외로워서 밖으로 나돈다고 생각했는데. 점심때 큰 오라버니의 태도를 보고 났더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대체 애인이 어떤 사람이길래, 큰 오라버니가 저러실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챈들러가 아버지인 세라투 자작의 애정에 관심을 끊었다는 게, 어지간히도 이례적인 일이었는가 보다.
르웰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재잘재잘 말을 길게 늘어놓는 걸 보니 말이다.
그 반응으로 보아 내가 추측했던 것 이상으로, 챈들러가 세라투 자작에게 정서적으로 얽매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궁금해졌다면, 챈들러에게 연인에 관해서 자세히 물어봤으려나?'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르웰에게 떠보듯 질문했다.
"오! 듣고 보니 저도 궁금해지네요. 아버지도 제쳐놓을 정도라면, 엄청나게 매력적인 여성인가 보죠?"
"큰 오라버니의 말에 따르자면,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사람이라고 해요."
르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다정은 그렇다 쳐도, 공왕은 나긋나긋함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내가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내용에 의하면 말이다.
[성검의 주인] 속 공왕은 심지가 굳고 기개가 드높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늘 당당하게 자신의 주관을 끝까지 관철해 나갔다.
그리고 단호할 땐 단호하며, 냉정할 땐 냉정할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긋나긋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나라면 그런 강단 있는 사람의 장점으로, 다정함과 나긋나긋함을 첫째로 꼽지는 않을 거다.
공왕이 챈들러의 취향에 맞춰서 연기를 하는 건지, 공왕이 아닌 다른 사람인 건지.
나는 혼란스러움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넉살 좋게 말했다.
"잘 맞는 사람을 만났네요. 첫째님은 척 봐도 애정 결핍이 심한 게, 옆에서 잘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큰 오라버니께서는 자신의 연인은 몸이 약해서, 자기가 돌봐줘야 한다고 하던데요? 게다가 앞이 안 보여서 항상 연인의 집에서 만난다고 했어요."
르웰의 말을 듣고 났더니, 세르펜스가 '눈은 가리면 그만'이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정말로 눈을 가리고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 지독한 설정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성격에, 앞이 안 보이고 몸까지 약한 여성이라니···. 첫째님은 그런 사람이 취향이랍니까?"
"···제 가족이긴 하지만,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르웰도 내심 그 점을 찝찝하게 여겼는지, 부채를 펼쳐 떨떠름한 표정을 가렸다.
만약 자신의 오라비가 연인의 머리카락까지 소장하고 있다는 걸 알면, 르웰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모르겠다.
챈들러가 자신이 돌봐줘야 한다는 말을 운운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연인을 연인이 아니라, '돌봐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걸 테지.
세라투 자작의 그릇된 육아 방식으로 인해, 챈들러가 자격지심 덩어리로 자랐다는 걸 떠올려 봤을 때.
챈들러가 무엇을 '연인의 조건'으로 삼았는지,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께서는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르웰이 부채를 착 소리 나게 접으며, 방금까지 나눴던 대화의 주제와 동떨어진 물음을 던졌다.
황급히 화제를 바꾸고 싶었나 보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연인의 직업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등등.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르웰이 거기까지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너무 자세히 파고들면 시종장에게 의심을 살 게 뻔하다.
그래서 그냥 르웰의 질문에 대답이나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침입자가 성 밖으로 도망쳤으니, 저희도 밖으로 나가 봐야죠. 일단은 이 근방에 사는 영주민들에게 수상한 사람을 본 적 없느냐고 수소문해 보려고요. 겸사겸사 신전을 세울 만한 장소도 알아보고?"
"내일부터는 바빠지시겠네요. 그럼 오늘처럼 주교님과 한가롭게 대화할 기회도 없겠어요. 마땅한 대화 상대도 없고, 외출 금지령이 풀릴 때까지 심심해서 어떻게 버텨야 할지···."
르웰이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같은 장소에 있어야 오늘처럼 우연히 만날 기회라도 생길 텐데. 우리가 성 밖으로 나간다고 하니, 다음 대화는 언제쯤 할 수 있는 건지 넌지시 물어보는 게 아닐까 한다.
"아! 그렇다고 주교님을 심심풀이 대화 상대라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거, 아시죠? 사교 활동을 하다 보면, 무슨 말을 해도 남의 눈치를 보며 체면을 신경 써야 하거든요. 그런데 주교님이나 여기 계신 성직자분들과 대화할 땐, 그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서 무척이나 편하고 즐겁거든요."
아직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르웰이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심심하다는 핑계로 별관에 놀러 올 수 있도록, 미리 발판을 다지는 과정이리라.
여기서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한다면 꼰대 주교 설정이 울고, 오지 말라고 하면 대화를 나눌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저는 바쁜 몸입니다. 한가롭게 담소나 나누며 시간을 낭비할 만큼, 여유 있지 않아요. 정 심심하시면 신학 공부를 하세요. 그러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질문하러 찾아오는 것까진 막지 않겠습니다."
"방금까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눠 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그동안은 침입자 조사로 성안을 돌아다녔고 내일부터는 성 밖을 돌아다녀야 하니까, 짬을 내서 쉬고 있는 것뿐입니다. 저는 일과 휴식.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거든요."
"호호호, 주교님은 참 재밌는 분이시네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았는지, 르웰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작위적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 * *
다음날.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별관을 나왔다.
그리고 시종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를 뒤쫓아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시종장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종장님. 성안에서는 집주인인 영주님을 존중해서 시종장님이 따라다녀도 내버려 뒀지만, 밖까지 쫓아오는 건 별로 내키지 않네요."
시종장을 떼어놓기 위해 다방면으로 고민해 봤지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직접 말하는 것.
긴 고민 끝에 내놓은 결과물치고는 허술하기 짝이 없으나, 고민을 하면 할수록 이 방법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예를 들어, 시종장에게 심부름을 시켜놓고 몰래 나간다고 치자.
성공하더라도 수상함이 배가 될 뿐이다.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께서도 편하실 텐데요?"
"성안은 시종장님의 영역이니 길 안내를 양보했지만, 성 밖에서 주교님을 모시는 건 엄연히 제 영역입니다.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 근방의 지도는 전부 외웠으니, 길 잃을 염려 또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아해하는 시종장을 향해, 세르펜스가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표정은 오만하기 짝이 없고 눈빛은 싸늘함 그 자체다.
그런데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는 대체 왜 저 모양 저 꼴일까?
"저는 그저 여러분의 편의를 돕고자 할 뿐입니다. 주교님의 시중을 두고 신관님과 경쟁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쪽의 존재가 제 편의를 해칩니다. 그러니 따라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대체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그동안 제가 길 안내를 잘하면, 주교님께서는 저 덕분에 편하게 다닐 수 있다며 기뻐해 주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주교님께 칭찬받을 기회를 그쪽이 뺏어갔다는 뜻입니다."
세르펜스의 억지에 시종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변명을 해도 저따위로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아는 세르펜스는 훨씬 더 논리적이고 똑똑한 아이였는데, 막내 신관 설정에 잡아먹혀 버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세르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막내 신관님. 계속 그런 소리를 하면, 막내 신관님을 두고 갈 수도 있어요."
"흡!"
세르펜스가 절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런 세르펜스를 옆으로 잠시 치워 두고 시종장을 직시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침입자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시종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관광하는 기분으로 마차를 타고 놀러 다녔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신전을 세울 만한 땅을 보러 다니는 것 외에, 성에 침입했던 수상한 사람에 관해서도 조사해 볼 생각입니다."
"맞아요. 침입자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움직인 데다가, 성안의 경비를 모두 따돌린 걸 보면 보통 실력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정작 영주성에 침입해서 한 거라고는, 프레이 님의 젤리를 훔쳐 먹은 게 전부잖아요? 분명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세라투 령 내에 머무르며 다시 기회를 노리려고 할 거랍니다."
유지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침입자는 프라이드가 높다.'라는 설정을 부여했다.
그래도 내 말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기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 유지스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도망칠 때 모습을 드러낸 것도, 우리가 이젠 안전해졌다고 방심하길 기대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그런 이유인가 봐요!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꼭 들어맞아요!"
유지스가 호들갑을 떨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런 유지스의 반응을 보며, 시종장은 '그런 건가···?'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침입자 설정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그걸 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은신처라면 함정을 설치해 놓았겠죠?"
"어디 함정뿐이겠어요? 어쩌면 악마 숭배자 동료가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그중에는 흑마법사도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좋아요."
유지스가 내 의도를 알아채고, 장단을 맞추는 정도를 넘어 적절한 추임새까지 넣었다.
우리의 대화를 집중해서 듣던 시종장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제 식자재 창고에 들어가길 꺼리던 모습이 떠올라 슬쩍 찔러봤는데, 효과 만점이다.
"이제 보니, 주교님께서는 시종장님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두고 가려는 거였군요?"
"대충 그런 거죠."
"가만 보면 주교님은 참 쑥스럼이 많으시다니까요? 처음부터 솔직하게 그리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유지스가 우후후 웃으며 말했다.
꼰대 에인젤 주교에게 '쑥스러움이 많아서 걱정된다는 말을 솔직히 하지 못함'이라는 설정이 붙은 순간이다.
'그, 그래···. 꼰대들이 걱정된다며 말하는 것 중 70%는 쓸데없는 참견이고, 29%는 걱정을 빙자한 비난인 법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진심으로 걱정되는 건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한다는 설정도 꼰대다웠다.
나는 민망해하는 척,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유지스가 붙인 설정을 수용했다.
"그, 그런 이유라면 저는 그냥 이곳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시종장이 백기를 들었다.
역시 윗사람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