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4)
"위장한 모습을 보고 눈치채셨겠지만, 저희는 현재 매우 중요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세르펜스의 말에 여관 주인이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으로 추측하건대. 우리가 로브를 입어 신관복을 가린 게, 공금으로 플렉스하기 위해서인 줄 알았나 보다.
"아아-! 이해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곳에 오신 걸 비밀로 해 달라는 거죠? 알겠습니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저희에 관해 묻거든, 저희가 복도와 계단을 지나면서 나눴던 얘기만 슬쩍 흘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밀을 지키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여관 주인을 향해, 세르펜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세르펜스어가 낯선 여관 주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 것도 당연지사다.
'저 녀석, 또 밑밥 깔고 있네.'
녀석이 여관 주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필요한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나는 세르펜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입으로 옮겼다.
"사실 저희가 오늘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식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
"협조라고는 했지만, 그쪽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입니다."
여관 주인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세르펜스는 사무적인 태도로 제 할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하나뿐인 문을 가로막아 선 채.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협조를 운운하는 모습이 상당히 위압적이다.
제삼자인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니. 당사자인 여관 주인의 눈에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다.
여관 주인이 긴장한 얼굴로 꿀꺽 마른 침을 삼켰고, 나는 아보카도 퓨레를 듬뿍 올린 호밀빵을 씹어 삼켰다.
"최근 세라투 령에 악마 숭배자가 숨어들었습니다."
"헉! 아, 악마 숭배자가!"
"하지만 저희가 신전 터를 알아보기 위해, 영주성에 머물고 있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사안입니다. 그러한 탓에 저희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자가 많아, 직접 나서서 악마 숭배자를 추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르펜스의 말에 여관 주인이 기겁했다.
누가 보면 여관 주인더러 악숭이를 잡아 오라고 시키기라도 한 줄 알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단에 사정을 알렸으니 머지않아 지원이 도착할 겁니다. 저희는 앞에서 이목을 끌고, 실제로 악마 숭배자를 쫓는 건 그분들이 하게 될 예정입니다."
"저, 실례지만 그런 계획을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저희가 드나들어도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그분들이 남몰래 머무를 장소가 필요합니다."
"아!"
세르펜스가 명확한 목적을 밝히고 나서야, 불안해하던 여관 주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날파리만 날리던 여관에 장기 투숙객이 머무를 예정이라 하니. 저렇게 반기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짜식! 그냥 방음 잘 되는 곳에서 밥 먹으며 대화하려고, 여관으로 안내한 줄 알았더니.'
기특하게도 휴마누스 일행의 숙소를 잡아줄 생각으로 그랬던 모양이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포크로 파스타 면을 돌돌 감아 먹었다.
파스타는 그라나파다노 치즈가 올라간 알리오 올리오였는데, 페페론치노가 들어가서 세르펜스가 먹기에는 조금 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례금이라면 충분히 지급할 테니, 협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설마하니 교단을 도와 악마 숭배자를 체포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거절할 리는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혹여라도 내키지 않는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무, 물론 협조하고 말고요!"
여관 주인은 사례금 얘기에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가, 이어진 세르펜스의 말에 사색이 되어 대답했다.
대외펜스였다면 위험할 것 같아서 꺼려지신다면 미리 말해달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전부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라도 지었을 텐데.
싸늘한 표정으로 저런 소리를 해대니, '교단의 일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건, 이단이라는 증거다. 그러니 악마 숭배자와 함께 심판대에 세우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세르펜스가 파스타를 먹을 수 있도록 골라내던, 페페론치노 중 하나를 면 사이에 조용히 숨겼다.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선지급으로 700만 아스를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지원 오신 분들이 일을 마치고 떠나실 때. 그분들에게 받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르펜스가 100만 아스권 지폐 일곱 장을 꺼내며 말하자, 하얗게 질렸던 여관 주인의 안색에 생기가 돌았다.
여관 주인은 자기가 언제 긴장했느냐는 듯, 세르펜스의 앞까지 잰걸음으로 다가가 돈을 받아 챙겼다.
'그런데 세르펜스 저 녀석. 후지급될 금액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데다가, 그마저도 휴마누스에게 떠넘겼잖아?'
휴마누스는 그래 보여도 황태자니까. 용돈 정도는 넉넉하게 가지고 다닐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만에 하나, 교단이 휴마누스가 아닌 성직자들을 지원 보낼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저건 터무니없이 많은 돈 낭비를 했다고 봐야 하나, 더 큰 지출을 아꼈다고 봐야 하나?'
조금 헷갈린다. 그래서 페페론치노를 반으로 잘라, 면 아래에 숨겨 놓았다.
"주교님. 먹는 거로 장난치지 마세요."
에드나가 밥상머리에서 장난치는 아이를 혼내듯이 말했다.
페페론치노를 골라냈다가 다시 넣는 내 행동이 못마땅했나 보다.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막내 신관님이 매운 걸 못 드셔서, 대신 골라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방금···."
"어허!"
"······."
에드나는 더 이상 무어라 말하는 대신에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제스처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냥 내 교육 방침을 존중해 준 거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페페론치노를 두고 에드나와 짧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세르펜스는 여관 주인에게 경고 섞인 주의 사항을 일러주고, 그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자! 이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에 들어올 사람도 없을 테니까, 다들 편하게 드세요. 그리고 세르펜스도 어서 이리로 오세요."
내 말이 끝나자, 일행들이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뒤로 젖혔다.
세르펜스도 나와 유지스 사이로 쏙 들어와 앉아, 포크를 손에 쥐었다.
"제가 세르펜스도 먹을 수 있게, 파스타 속의 매운 고추들은 다 골라냈습니다. 약간 알싸한 맛이 나긴 하지만, 치즈도 듬뿍 들었겠다. 이 정도면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슬슬 매운 것도 먹어 버릇해야죠."
"설정이 아니라 진짜로 매운 걸 못 드시는 거였습니까?"
베일이 설정과 실제 모습을 구분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질문하는 걸 보면, 세르펜스가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는 게 어지간히도 의외였는가 보다.
나는 세르펜스의 파스타에서 골라낸 페페론치노들을 몽땅 베일 몫의 파스타 위에 올리며 말했다.
"매운 걸 못 드시는 세르펜스를 대신해서, 저하께서 '전부' 먹어 주시겠대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세르펜스가 베일을 바라보며, 순진한 미소를 꾸며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파스타 속에 숨겨진 페페론치노를 씹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혓바닥을 내민 채, 손부채질 하는 세르펜스에게 빵을 내밀었다.
"어이쿠! 제가 미처 다 골라내지 못한 게 남아 있었나 봅니다. 자, 자. 여기 빵 드세요, 빵."
"어째서, 스읍, 하아-. 웃고 계시는 겁니까?"
"웃어요? 제가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
"······."
세르펜스가 내가 건넨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나를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입안의 음식물 때문에 볼이 부풀어 오른 상태로, 눈가에는 눈물까지 매달고 노려보는 게 무서울 리가 없다.
되려 가까스로 참고 있던 웃음만 새어 나오게 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킥킥 소리 내어 웃었고,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표정이 궁금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세르펜스는 나와 유지스에게 큰 웃음을 주고 난 후. 포크로 자신의 파스타를 뒤적여, 기어코 바닥에 깔아 놓았던 반쪽짜리 페페론치노를 찾아냈다.
깔끔쟁이 세르펜스가 음식을 파헤친다는 건, 예전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걸 발전이라고 해야 하나, 퇴화라고 해야 하나?'
그러한 의문을 풀기에 앞서. 배신감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르펜스부터 어떻게 좀 해야 할 것 같다.
"하나로는 정이 없잖아요."
"아까는 미처 골라내지 못한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칫, 들켰군!"
"······."
그 뒤로 세르펜스는 완전히 토라져서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녀석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릇들을 포개어 쟁반에 옮겨 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녀석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땐 손에 들린 쟁반 위에 파르페가 6개 올려져 있었고, 표정 또한 밝아진 상태였다.
'윈스톤이 단것을 안 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인원수대로 가져오다니.'
파르페 위에 올려진 아이스크림을 걸고 장담하건대, 세르펜스가 먹으려고 윈스톤 몫까지 가져온 게 확실하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에드나 씨. 저 파르페 중 하나에,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도록 마법을 써 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걸요."
에드나는 내가 어째서 이런 부탁을 했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시원스레 대답했다.
스태프도 꺼내지 않고 마법진을 뚝딱 그려내는 걸 보아, 정말로 쉬운 부탁이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챈들러 공자 쪽은 어떻게 된 겁니까?"
베일이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내가 권하기도 전에 베일이 먼저 디저트에 손을 댄 건 처음이다. 아무래도 정량의 두 배나 되는 페페론치노를 섭취한 탓에 속이 부대꼈나 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대요. 더 이상 다가가면 들킬까 봐서 멀리서 지켜보는 중이라, 마인의 모습은 못 봤다고 하네요. '그 사람'을 미행하던 자들은 건물 가까이 다가가서 안을 지켜보는 것 같은데···. 여태 그냥 두는 걸 보면, 살려서 세라투 자작에게 돌려보낼 생각인가 봐요."
유지스가 민망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 미행하는 사람들을 걱정하다가, 세르펜스에게 한소리 들었던 것 때문에 저러는 걸 테다.
"장소를 확인했다면, 정령은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네요. 어차피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상, 얻는 것 없이 들킬 위험만 높아질 뿐이니까요."
세르펜스의 말에 유지스가 동의를 표했다.
정말로 정령을 돌려보냈는지 어쨌는지는 유지스만 알 일이나, 세르펜스는 돌려보낸 게 맞느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세르펜스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파르페에 꽂힌 기다란 막대 모양의 과자를 뽑아서, 바로 먹으려 들었다.
"동작 그만! 그거 그렇게 먹는 거 아닙니다. 아이스크림과 같이 드셔야죠. 초콜릿 드레즐이 뿌려진 부분 위주로. 그렇죠, 그겁니다!"
세르펜스가 내 지시대로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듬뿍 묻혀서 입에 넣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으로 보아, 대단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러자 베일이 갑자기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이런 세르펜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나 보다.
"크흠! 그 마인은 연인인 챈들러 공자를 배신하고, 세라투 자작과 손을 잡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네?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셔도···."
베일의 질문에 유지스가 난감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라면 마인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쏘아붙였을 텐데. 유지스는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 선하디선한 반응에 베일이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세라투 자작의 계획을 훤히 들여다보듯 파악하셨길래, 이번에도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가 싶어 물어본 거였습니다."
"아~, 짐작 가는 거라면 있죠. '그 사람'과 세라투 자작. 둘 중 한 명을 택해야 한다면, 마인은 당연히 '그 사람'을 택하겠죠. 그쪽이 더 믿을 수 있을 테니까요."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어조만 살짝 바꿔 물었을 뿐인데, 이번에는 대답이 술술 나왔다.
그 때문일까?
머쓱해 하던 베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젠데···. 이렇게 쉽게 남을 의지하려 드니까, 시온이 자꾸 걱정하는 거예요."
유지스가 기다란 파르페용 스푼을 지시봉처럼 들고 베일을 가리키며,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엄격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