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21)
"그렇다는데요?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막내 신관님 얘기가 맞는 것 같아요?"
내 질문에 두 명의 발꾼이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눈치만 볼 뿐.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런 반응이면 무언의 긍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뭐, 저도 진작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그래요, 잘 요약해서 설명했다는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드리도록 하죠."
당연한 얘기지만, 내게 미행꾼의 숫자로 그들의 목적을 어림짐작하는 재주 같은 건 없다.
그래도 나는 잔뜩 거들먹거리며, 적선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세르펜스를 칭찬했다.
원래 꼰대들은 몰라도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굴곤 하니까. 꼰대 주교의 설정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형편없는 칭찬에도 세르펜스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인젤 주교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진심으로 기쁩니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오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봤냐? 부럽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녀석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이없어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이미지 관리는 완전히 포기한 건가?'
어차피 '설정'이라는 방패도 있겠다, 아주 막 나갈 생각인가 보다.
나는 가볍게 혀를 내두르며, 세르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발꾼이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영주님께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큰 도련님을 관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큰 도련님을 관찰하라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저희는 그저 주인님의 명령을 따를 뿐. 의문을 품는 건 저희의 임무가 아닙니다."
대답을 한 건 윈발꾼이었다.
베발꾼은 말실수를 할지도 모르니, 윈발꾼이 나서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게 아닐까 한다.
안 물어봐서 모른다는데, 거기다 대고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계속 파고들어 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애초에 세라투 자작에게 무언가를 들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고.'
그럼에도 세라투 자작에게 받은 명령에 관해 캐물은 건 일종의 밑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려면 우선 상대방의 말문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주제가 필요한데, 기왕이면 내가 알아내고 싶은 정보와 밀접한 주제가 좋다.
그런 점에서, '세라투 자작에게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라는 주제는 매우 적절했다.
챈들러를 미행하다 잡혔으니, 그건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또한 적당히 상황을 봐서 악숭 세력에 관해 넌지시 얘기를 꺼내며,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윗사람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까, 순순히 협조하면 용서해 주겠다.'라는 말로 구슬릴 수도 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괜히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거짓말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네요."
유지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가볍게 쥐어 입가에 가져다 대고, 왼손으로는 오른쪽 팔꿈치를 받치듯 잡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나는 너희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거다.
"이단 심문관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니, 백번 양보해서 들은 게 없다는 얘기는 믿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선심 쓴다는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발꾼이들은 믿어줘서 고맙다며 굽신거리는 대신에, 경계심을 드러내며 침묵했다.
믿어 준다고 하면서도 칼은 여전히 목을 겨누고 있는 데다가, 자신들이 잡혀 온 이유조차 듣지 못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첫째님을 관찰하며 무엇을 보고 들었습니까?"
"그건 주교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내 물음에 윈발꾼도 물음으로 되받아쳤다.
단순히 떠보는 거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놈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황당함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표정과 목소리에 담아냈다.
"아뇨?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요?"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저희를 기절시켜 데려올 정도의 실력자가 이 중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에게 다 들었을 거면서, 굳이 아는 얘기들을 질문하시는 저의가 뭡니까?"
윈발꾼이 자존심이 짓밟힌 사람처럼 분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따지듯이 말했다.
베발꾼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듣고 보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네.'
안 그래도 물리적으로 짓밟힌 사람을 정신적으로도 짓밟은 기분이라, 조금 미안해졌다.
"에인젤 주교님, 너무 놀리지 마세요. 계속 그렇게 장난치면, 화가 나서라도 입을 다물어 버릴지도 모른답니다."
유지스가 마치 자신만 믿으라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놀린다거나 장난친다는 표현으로 보아, 발꾼이들의 착각을 이용할 생각인가 보다.
"저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입을 주체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주교님, 제가 누구죠? 이단 심문관, 마테리아 S. 사지타랍니다. 심문에 관한 일이라면, 제가 주교님보다 몇 수 위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예에, 아무렴 그렇겠죠."
나는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하며 삐진 척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이러한 내 행동이 연기라는 걸 알기에, 유지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발꾼이들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어째서 아는 얘기를 구태여 묻느냐고 질문하셨죠? 이유는 간단해요. 저희가 두 분의 증언을 신뢰해도 될지, 검증하는 작업이랍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그냥, 보고 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된답니다."
"이야, 참 간단한 일이네. 두 분께서 잘하시는 일이잖습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킨 일만 하는 거."
"주교님?"
"네, 네. 저는 입을 닫을 테니까, 마저 할 일 하시죠?"
내가 유지스와 티격태격하기 시작하자, 발꾼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이단 심문관의 기분이 나빠지면, 심문을 받게 될 자신들이 그 화를 고스란히 떠안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질문을 반복하는 것보다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게, 대답을 듣기에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하지만 앞서 질문을 한 건 에인젤 주교님이니,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다시 물어봐 드리죠. 두 분께서는 오늘 무엇을 보고 들으셨죠?"
유지스가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면, 이단 심문관의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겠다는 경고다.
실제로는 가까이 다가온 적을 견제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보조 무기일 뿐이었지만.
발꾼이들에겐 목에 겨눠진 성기사의 검보다, 고문 전문가 이단 심문관의 허리춤에 걸린 작은 단검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테다.
"···큰 도련님께서는 성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장 애인의 집으로 가서, 쭉 그곳에서만 머물렀습니다."
"그 애인이란 사람의 외향적 특징은 어떻게 되죠?"
"우선 머리색은···, 저 뒤쪽에 서 계신, 구릿빛 피부의 키 큰 여성분과 비슷한 색이었습니다."
목에 들이밀어 진 검 때문에 함부로 고개를 움직일 수 없는 탓인지, 윈발꾼은 외모를 서술하여 푸로르를 지목했다.
푸로르도 적색 계열의 머리칼을 지닌 건 맞지만, 공왕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공왕의 머리카락은 선홍색이고, 푸로르의 머리칼은 적갈색이니까.
'다 알고 있는 거 아니냐며 확신에 차서 따질 땐 언제고.'
곧이곧대로 대답하기 전에 이렇게 한 번 떠보는 걸 보면, 보통 신중한 성격이 아니다.
그런 윈발꾼에게는 애석한 일이나, 우리는 챈들러의 연인이 무슨 색 머리카락을 지녔는지 알고 있다.
"기왕 거짓말하는 김에, 아예 직모라고 말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냥 붉은색 계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유지스가 좀 더 본격적으로 거짓말을 해 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고, 윈발꾼은 정중히 사양했다.
우리를 떠보긴 했으나, 단검의 관리 상태를 몸으로 확인하고 싶은 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것으로 보아, 앞을 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집 안에는 그 애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미행 대상이 그 집에서 머무는 동안 무슨 대화가 오갔죠?"
"······."
곧잘 대답하는 듯했던 윈발꾼의 입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유지스의 손이 단검 쪽으로 향하자, 놈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연인 사이다 보니, 워낙 많은 대화가 오고 간 터라···. 기억을 떠올려 보느라 그런 것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오고 간 대화 내용을 그대로 다 읊어 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영주님께 보고하려던 내용만 말씀해 주셔도 충분하답니다. 반드시 보고해야 할 내용이 분명 있었잖아요. 그렇죠?"
"···네, 있었습니다."
윈발꾼이 바로 그 내용을 읊는 대신에 '있었다.'라고 대답한 건,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함으로 보였다.
그 증거로 윈발꾼의 눈동자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희를 붙잡아 오신 겁니까? 이제 슬슬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때도 된 것 같은데···."
"거래를 시도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유지스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반복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선언한 뒤부터, 계속 의문문으로 끝내는 게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졌다.
'유지스는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왔지? 역할에 몰입하면 이런 것도 자동으로 할 수 있게 되나?'
이단 심문관 배역을 받고 제국을 떠나기 전, 에일리히에게 초단기 족집게 과외라도 받은 게 아닐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유지스가 이런 협박성 짙은 화법을 구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큰 도련님께서는 자신의 애인에게 '네 덕분에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사랑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요?"
착잡한 이야기에도 유지스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각오를 마쳤으니, 이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일만 남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요?"
"없었···는데, 정말 알고서 질문하시는 게 맞는 겁니까?"
윈발꾼이 나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딴청을 부렸다.
"자신의 안위보다 그런 알맹이 없는 정보가 소중한가요? 그런 게 아니라서 순순히 말씀해 주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어차피 큰 도련님은 제 주인님도 아니니, 오늘 보고 들은 얘기를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유지스의 연속된 질문에 윈발꾼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반면에 베발꾼은 연신 눈동자를 굴려서 나와 유지스를 번갈아 노려보았는데, 그 눈빛이 마치 사기꾼이라도 보는 듯하다.
반신반의하던 윈발꾼과는 다르게 제대로 속아 넘어갔나 보다.
"큰 도련님께서 무슨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는 몰라도, 주인님께 해가 되는 일일 겁니다. 여러분께서 주인님의 편이라면, 이제 그만 저희를 놓아주십시오."
윈발꾼이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우리가 챈들러와 그 연인의 뒷조사를 하는 걸 보고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우리더러 세라투 자작의 편이라고 하다니. 대단한 모욕이 아닐 수가 없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교단의 성직자는 언제나 룩스메아 님의 편입니다. 그렇죠, 이단 심문관님?"
"맞아요. 저희는 항상 룩스메아 님의 편에 서서, 그분을 위해 움직이죠. 룩스메아 님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편드는 일은 없답니다."
나와 유지스는 언제 말다툼을 했느냐는 듯, 사이좋게 말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