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26)
* * *
아침에 눈을 떠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설 때까지. 세르펜스는 내게 필담을 요청하지 않았다.
간밤에 시종장이 윈스톤을 찾아오는 일이 없었으며, 챈들러를 감시하기로 한 유지스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식탁 머리에 앉아 빵을 뜯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리가 영주성 밖으로 나가려 했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그 중 첫 번째는 르웰과 몰래 접선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르웰이 외출 금지를 당한 탓에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두 번째는 마인이 숨어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거였고, 세 번째는 성검 일행을 만나는 거였다.
전제 조건부터 틀어진 첫 번째 목적을 제외한다면, 나가서 해야 할 일을 전부 달성해버린 셈이다.
'이제 성 밖으로 나가도 할 일 없는 거 아니야?'
챈들러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만큼.
어지간하면 그가 밖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우리도 성에 붙어있고 싶다.
하지만 우리 편의대로 나가겠다 말겠다, 말을 번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또 말을 바꾼다면 의심을 살 것이 자명했다.
"에인젤 주교님, 혹시 입맛이 없으십니까?"
내가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니, 세르펜스가 걱정스럽다는 듯 질문했다.
"그냥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그럽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어찌 주교님의 상태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젯밤에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바로 잠에 드시더니···."
나는 그저 빵을 깨작깨작 뜯어 먹었을 뿐이건만.
세르펜스가 어젯밤 받아 놓고 쓰지 못했던 목욕물에 관한 해명을 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데, 누가 보면 내가 방에 도착하자마자 기절이라도 한 줄 알겠다.
"아무래도 세라투 령에 도착한 첫날부터 침입자 때문에 줄곧 날을 세우고 있던 탓에, 피곤해지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목욕물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나는 세르펜스의 말에 속으로 감탄하면서, '막내 신관의 말에 굉장히 솔깃하지만, 대놓고 그러자고 하기엔 이단 심문관의 눈치가 보여서 괜히 고민하는 척'을 했다.
"커흠! 그래도 할 일을 미뤄둘 수는 없는데, 이것 참···."
"제가 너무 걱정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신체의 피로는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정신적 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주교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통함과 초조함이 반반씩 적절히 섞인 훌륭한 표정 연기가 돋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열흘쯤 잠을 안 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주교님의 특기는 무식하게 몸을 쓰는 게 아니라, 머리를 쓰는 거잖습니까? 영지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상한 자를 찾아내는 건, 성기사님들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주교님께서 대륙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주교님 같은 훌륭하신 분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대륙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겁니다. 주교님께서 앞으로 살릴 수 있는 수많은 목숨을 생각해서라도, 오늘은 푹 쉬십시오."
"확실히···. 막내 신관님 말도 일리가 있긴 합니다."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에인젤 주교의 말 한마디에 신관 프레이가 일희일비하며 목을 맨다는 게 기본 설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프레이가 에인젤 주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폭군을 뒤에서 조종하는 간신 아냐?'
세르펜스가 하는 양을 보고 있자니, '비선 실세'라든가 '흑막' 따위의 단어가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댕그랑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쏠렸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 하나가 유지스에게 나이프를 건네주는 거로 보아, 조금 전 그 소리는 나이프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난 소리였나 보다.
그리고 유지스가 나이프를 떨어뜨린다는 건, 챈들러가 행동을 개시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머나, 죄송해라. 손이 미끄러졌네요."
유지스가 굉장히 성의 없고 미안함이 결여된 말투로 사과했다.
그러고는 시녀에게 건네받은 나이프로 태연하게 식사를 재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고작 성기사님 두 분이 수색을 하기에, 영지가 너무 넓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인력을 더 늘리지는 못할망정, 그나마 있는 인력을 더 줄이다니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네요."
나와 세르펜스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부러 나이프를 떨어뜨렸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유지스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말의 의도만은 분명했다.
괜한 꼼수를 부려 나가지 못할 핑계를 만들어내지 말라는 뜻이다.
"허, 참! 누가 그걸 모른대요? 다만, 막내 신관님이 저를 너~무 걱정하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잠깐! 아주 잠깐 고민했을 뿐입니다!"
나는 공연히 큰 소리를 내며, 모든 것을 막내 신관님 탓으로 돌렸다.
세르펜스도 눈치 빠르게 유지스를 흘겨보며, 아깝다는 듯이 칫 하고 혀를 찼다.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랍니다."
유지스의 이 말을 끝으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식사를 거의 끝나갈 무렵.
별관에서는 못 보던 시종 한 명이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식사실로 들이닥쳤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게, 누가 보아도 겁을 한껏 집어먹은 얼굴이다.
"무슨 일이야?"
"성직자님들을 빨리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시종장의 물음에 방금 들이닥친 시종이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지스가 밖에 나가는 쪽으로 대화를 유도한 건,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가 굳이 부자연스럽게 핑계를 지어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성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될 테니까.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지?"
"그게, 큰 도련님···께서···."
시종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시종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티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본성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굳이 시종장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방금 들어오신 시종님만 봐도 압니다."
나는 시종장의 말에 한껏 비꼬아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겁에 질린 듯한 시종에게 말을 걸었다.
"본성 어디로 가면 됩니까?"
"식사실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듣죠."
내 말에 시종이 울상을 지었다.
우리에게 위치만 알려준 뒤, 자신은 따라오지 않을 생각이었나 보다.
반면에 시종장은 따라오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우리를 쫓아왔다.
나는 그런 시종장을 무시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정령에게서 모든 상황을 전해 들었을 유지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시종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그게···. 큰 도련님께서, 주인님을 주, 죽이셨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챈들러가 그런 짓을 하려는 건 짐작하고 있던 터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노력도 했다.
그렇기에 세라투 자작의 사망 소식에도 '결국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느낌이 다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다 쳐도, 이 시종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살인을 한 놈의 명령을 듣고 움직인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는 건, 챈들러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사람을 죽여놓고 무슨 깡으로 성직자들을 부른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큰 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길, 주인님께서는 악마 숭배자였고 자신은 정의를 행한 것뿐이라며···, 자세한 얘기는 성직자분들이 오시면 하시겠다고···."
내가 돌연 걸음을 멈춘 후 시종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살인자의 명에 따른다는 게 이상해 보일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네.'
나는 시종에게서 시선을 뗀 후, 아까보다 더욱더 빠른 걸음으로 바지런히 움직였다.
점점 빨라진 걸음은 마침내 뜀박질이 되고 나서야,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굳게 닫혀있어야 할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기사들이 식사실 안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기사들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다.
"오셨습니까? 어서 안쪽으로···."
"아, 잠시만요."
나는 기사의 말을 끊고 에드나를 가리켰다.
에드나는 헉헉거리며 한 손으로 복도의 벽면을 짚고, 반대 손으로는 자신의 옆구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식후 뜀박질이 많이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녀의 호흡이 진정되길 기다리며, 나도 잠깐 숨을 돌렸다.
에드나처럼 숨쉬기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이제, 후우···. 됐어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나가 벽에서 손을 떼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해왔다.
나야말로 숨 돌릴 시간을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있는 관계로, 마음속으로만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실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세라투 자작의 주검과 그 옆에 서 있는 챈들러의 모습이었다.
참혹한 장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자, 기사에게 붙잡혀 있는 클로반의 모습이 보였다.
"왜···, 왜 이제서야 온 겁니까, 왜!!"
클로반이 우리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옷차림도 엉망이고 뺨에는 생채기까지 나 있는 게, 누구와 주먹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구는 보나 마나 챈들러겠지.'
르웰은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었으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녀는 실신한 제 어머니를 부축하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작게 목인사를 했다.
"둘째 님께서 기사에게 제압당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저 자식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클로반이 이제는 존댓말까지 때려치우며 악을 썼다.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잡아채, 세라투 자작 앞으로 끌고 가서 살려내라고 닦달할 듯한 기세다.
그런 클로반을 말린 사람은 그를 붙잡고 있던 기사였다.
"진정하십시오. 주군···께서 악마 숭배자였다는 혐의가 있다잖습니까. 도련님께서 이렇게 흥분하셔서 좋을 건 없습니다."
"왜, 왜 다들 저 새끼 말만 믿는 건데···!"
"믿는 게 아니라, 도련님을 생각해서···."
"다 집어치워!"
챈들러의 명으로 클로반을 붙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클로반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였나 보다.
"크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는 금세 그쳤지만, 그 근원지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리가 난 방향에 있는 사람 중, 살아있는 자라고는 챈들러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