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27)
챈들러의 웃음에 클로반이 다시 한번 발악했다.
"웃어? 지금 이 상황이 너한텐 우스워?!"
"마, 말조심 해! 내가 네 형이야!!"
항상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던 챈들러가 자신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낯설어서일까?
아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여놓고 당당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기가 찬 것일까?
클로반이 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챈들러는 그런 클로반을 향해 콧방귀를 뀌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붉은 핏자국이 남아서, 되려 옷이 더럽혀졌다.
그럼에도 챈들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더니,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반대 손으로 꾹 눌렀다.
'다친 건가?'
세라투 자작의 피가 묻은 건 줄 알았건만. 챈들러의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피였나 보다.
챈들러에게서 느껴지는 차갑고 섬뜩한 분위기에 묻혀, 그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챌 수 있었다.
'피를 적잖이 흘린 것 같은데, 이제서야 상처를 발견했다는 듯 지혈을 하다니. 아프지도 않았나?'
세르펜스에게 치료해 주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잘 모르겠다.
다친 장본인이 치료를 요구하지 않으니, 일단은 내버려 두어야겠다.
"이익···!"
클로반이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으로 챈들러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태연한 얼굴로 상처를 지혈하는 챈들러의 행동이 도발로 느껴졌나 보다.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겠네.'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훅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둘째님께서 너무 흥분하신 것 같으니까, 일단 기절이라도 시켜두고···."
"절대 안 됩니다! 클로반도 아버지의 아들인데, 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챈들러가 내 말을 끊으며 잽싸게 소리쳤다.
지금 기절해 있다고, 나중에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닐진대.
불길한 느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어디 얘기해 봐! 교단에서 온 성직자도 아버지의 방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버지가 악마 숭배자라는 건지, 어디 떠들어 보라고!"
클로반은 챈들러의 도발에 완전히 넘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모습이 꼭,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는 자신을 지킬 수단이 없어서 괜한 허세를 부리는 듯 보였다.
"주교님···."
세르펜스가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를 걱정하는 듯하여,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녀석은 차라리 나를 걱정하는 게 낫다. 이 상황에 신경 쓰는 것보다.
"기사들이 살인을 방관했을 리는 없으니···. 당시 현장에 있었던 건, 세라투 가문 사람들과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뿐이었던 게 아닐까 한답니다. 제 추측이 맞나요?"
유지스가 나를 지나쳐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다.
세르펜스에게도 유지스에게도 고마운 마음뿐이다.
"네, 맞습니다."
"일단 그쪽은 조용히 해 주세요. 살해 동기를 듣는 것보다, 일이 돌아간 순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랍니다."
유지스는 자못 냉철하게 말하며 챈들러에게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그에 챈들러는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피식 코웃음을 쳤다. 여유작작한 그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세라투 자작을 닮아있었다.
"사건을 처음부터 목격한 사람 중, 그나마 침착하면서도 가장 공정하게 상황을 설명해 줄 만한 분은 르웰 님 뿐인 것 같네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괜찮아요."
르웰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있던 시녀에게 실신한 어머니를 맡겼다.
그러고는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애써 의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식사 도중, 작은 오라버니께서 큰 오라버니를 무시하는 말을 했어요. 평소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죠. 하지만 오늘은 큰 오라버니께서 참지 않으셨고, 말다툼이 오갔죠."
"그런데 정작 살해된 사람은···."
유지스가 말끝을 흐리며, 세라투 자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께서 작은 오라버니의 편을 들어주셨거든요. 그랬더니 큰 오라버니께서 갑자기 접시를 깨더니, 아버지께 달려들어서···. 음, 보시는 바와 같이···, 이렇게 되었죠."
르웰의 말을 듣고, 나는 가늘게 실눈을 뜨며 세라투 자작의 시체를 자세히 쳐다봤다.
목 부분에 깨진 접시 조각 같은 게 박혀 있었다.
'챈들러의 손바닥에 난 상처도 저거 때문이려나?'
그나저나 세라투 자작이 고작 접시 파편 따위에 찔려서 죽을 줄이야.
기나긴 세월 동안 품어왔던 야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식들까지 이용하려 한 잔혹한 품성.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 장면에 어머니께서 비명을 지르며 실신하셨고, 그 소리를 듣고 기사들이 식사실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작은 오라버니께서 큰 오라버니께 달려들었죠. 기사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큰 오라버니를 제압하려 했어요. 그때, 큰 오라버니께서 외친 거죠. '아버지는 악마 숭배자였다.'라고."
르웰의 설명 속에는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얼마나 당혹스러워하는지,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르웰도 세라투 자작이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난장판은 바라지 않았을 거다.
"모두가 당황하여 멈춰 있는 틈에, 큰 오라버니께서는 시종에게 성직자분들을 모셔오라고 지시하셨어요. 성직자분들이 도착하고 난 후에, 아버지께서 악마 숭배자인 이유를 설명하겠다면서요. 기사들은 일단 흥분한 작은 오라버니를 큰 오라버니와 떼어 놓았지만, 작은 오라버니께서는 그 상태로도 계속 소리를 질렀죠. 그래도 큰 오라버니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고요."
"혼란스러우셨을 텐데, 설명해주셔서 감사해요."
유지스는 르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에 르웰은 씁쓸한 표정으로 묵념을 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번에는 당신에게 묻도록 하죠. 자신의 아버지가 악마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째서 저희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를 악마 숭배자라 칭했는지, 그건 질문하지 않는 겁니까?"
"현재까지 들은 상황만 두고 판단한다면, 당신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뒤. 빠져나갈 변명으로 '악마 숭배'를 거론한 것처럼 보인답니다. 이 의구심을 풀지 않는 이상,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챈들러가 교만한 미소를 띠며, 유지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소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클로반에게 기죽어 있던 모습도. 연인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웃음 짓던 모습도.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거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저게 챈들러의 본 모습인가?'
챈들러에 관해 무언가 말하려다가, 험담이 될 것 같다며 말을 아끼던 르웰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라투 자작과 외형이 꼭 빼닮은 클로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이리저리 치이고 억눌린 탓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실 세라투 자작과 가장 닮은 사람은 챈들러였던 거다.
"상황을 이해했다면 어서 설명해 주세요."
"제가 충동적으로 일을 벌였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며, 훈계하는 시늉을 하는 꼴이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이렇게 쉽게 죽을 정도로 약해빠진 주제에···. 하핫,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챈들러가 세라투 자작의 시신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허탈하다는 듯 웃는 그의 표정 속에, 희열과 우월감이 설핏 스쳐 지나갔다.
'잘못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세라투 자작 이상으로 비뚤어진 거려나···?'
문득 손가락이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중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손을 쫙 펼쳐, 손바닥에 묻은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이렇게 별거 없는 줄 알았으면, 진작 이렇게 할 것을···. 그랬다면 진작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제가 무언가에 씌어도 아주 단단히 씌었나 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챈들러는 우리 쪽을 향해 히죽 웃었다.
언뜻 듣기에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으나, 높은 확률로 윈스톤에게 하는 말일 거다.
에인젤 주교를 죽이고, 자신처럼 심리적 올가미에서 벗어나라.
대충 그런 의미로 말이다.
"방금 그 발언은 자신을 불리하게 할 뿐이라는 거, 알고 계신 거죠?"
"이단 심문관님께서도 제 아버지가 어떤 인간이고,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알게 되신다면, 저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디 얘기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제 아버지의 시신을 발치에 둔 채.
챈들러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평소의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건만. 마치 이제서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고 주장이라도 하듯이 퍽 자연스러웠다.
"아버지께서는 자작이라는 낮은 작위에 열등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가문이 가진 부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는 작위라 생각했고, 자신보다 못한 자들이 본인의 머리 위에 있다는 걸 견디지 못해 하셨습니다."
챈들러가 세라투 자작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직접···."
"왕이 되길 바랐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런 분에 넘치는 야망을 갖게 되신 건···."
"성검이 나타나서! 세상이 혼란에 빠질 예정인데, 그럴 땐 무력을 갖춘 사람이 깡패고, 무력을 갖추는 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기회라고 생각한 거죠?"
내가 연속으로 답을 맞히자, 챈들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연세는 올해로 쉰다섯입니다. 그래서···."
"악마와 계약하여, 젊음을 얻고자 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한치의 틀림 없이, 우리가 예상했던 그 내용이 챈들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라투 자작에게 애정을 갈구하느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챈들러가 스스로 눈치챘을 리는 없을 테고···.'
이는 분명 공왕이 챈들러에게 귀띔해 준 내용일 거다.
공왕에게서 이 얘기를 듣고 난 뒤로도 미련이 남아, 세라투 자작을 관찰하고 시험해 봤겠지.
그러고 나서야.
세라투 자작이 자신에게 애정을 베푸는 날은 올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을 테다.
죽이기로 결심한 뒤에는 자신이 노쇠한 아버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을 거다.
어쩌면 세라투 자작이 하찮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을 위압하려 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고, 변명까지 준비해 놓았으니까.
앞뒤 생각 안 하고 충동에 몸을 맡긴 게 아닐까 한다.
"그,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악마의 힘을 이용해 젊어지신 후, 자신과 똑 닮은 클로반의 신분으로 살아갈 계획이셨습니다. 클로반이 바로, 아버지의 야욕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챈들러가 자신만만하게 클로반을 가리키며 외쳤다.
클로반은 챈들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께서는 너를 아끼신 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길을 닦아 놓으셨을 뿐이라는 얘기지. 네가 잘나서도 아니고, 너를 사랑해서도 아닌. 네 젊음과 삶을 빼앗기 위해서!"
클로반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수록, 챈들러의 얼굴에서는 환희가 피어났다.
다른 누군가를 비탄에 빠뜨리며 즐거워하는 저 모습이 악마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무언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것을 억누르지 않고 쏟아냈다.
"그 얘기를 둘째님이 들었으면 해서, 그를 기절시켜 두자는 제 말에 반대하신 겁니까?! 안 그래도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에 힘들어하고, 죽인 사람이 제 형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자신의 동생이 더 힘들어하길 바라서?"
나는 챈들러를 동정한다.
아버지의 애정을 한 톨도 받지 못했고, 동생에게 무시당하며 자라온 그를.
힘들었으니까. 고통스러웠으니까. 복수하고 싶을 만도 했다.
하지만 클로반도 피해자라고 말하면서,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기뻐한다는 건 어딘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