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07화 (507/925)

507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35)

발꾼이들은 속았다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그들은 윈스톤 덕분에 살게 된 거나 다름없다.

세라투 자작이 죽은 줄도 모르고, 충성심으로 그를 변호했다고 치자.

그랬다면 이들은 세라투 자작의 공범. 혹은 잠재적 이단으로 취급될 거다.

공왕을 인질로 잡겠다는 작전은 말할 것도 없으니 넘어가고.

도망치는 것 또한 명을 재촉하는 일이다.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다면 휘하에 받아줄 가능성이라도 있지. 도망간다면 쥐뿔도 없다.

'가문의 정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를, 전대 가주의 하수인을 새로운 가주가 과연 순순히 놓아줄까?'

하물며 전대 가주가 그 세라투 자작인 바에야. 말 다 했다.

세라투 자작이라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다녔을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세라투 자작과 챈들러의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 세라투 가문의 명예는 크게 추락하게 될 거다.

그걸 힘겹게 복구해 놓자마자, 세라투 자작이 벌였던 다른 스캔들이 추가로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

'아무리 르웰이 벌인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세라투 가문의 재력을 잘게 쪼개어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주워가기 위해, 사정없이 헐뜯으려 할 테니까.

그러니 르웰은 대륙 끝까지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젤리 도둑 외 2명의 입을 막아야 하는 처지다.

'세라투 자작에게 충성을 다 바쳤는데. 세라투 가문을 배신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평생 쫓겨 다니게 된다면 정말 말도 안 되게 억울하겠지.'

젤리 도둑이란 누명을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어째서 윈스톤이 협박 아닌 협박까지 동원해가며, 이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했는지 알 것만 같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여기까지 온 이상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저희에게 순순히 협조하시죠?"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젤리 도둑 외 2인에게 협조를 권유했다. 그러자 그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내 딴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고 지었는데, 저들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나 보다.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고, 윈발꾼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세라투 자작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시켰고, 무슨 보고를 했는지. 그것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참 쉽죠?"

"주인님···께서 악마 숭배자와 손을 잡으려 했다는 건, 전부 밝혀진 것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이젠 돌아가시기까지 했는데···."

윈발꾼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들을 납치해놓고,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며 떠들어댔으면서. 이제 와서 무엇을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투다.

"세라투 자작이 죽었으니까, 여러분에게 묻는 겁니다. 죽은 사람을 심문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우리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고 공표하면 편하겠지만, 절차라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윈발꾼이 먼저 대답했고 다른 두 사람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동의도 얻었겠다, 마음 편히 물어볼 일만 남았다.

발꾼이들은 어제 대화했으니까, 젤리 도둑에게 질문해 봐야겠다.

"세라투 자작이 당신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길래, 제 방에 침입해서 젤리를···. 아니, 가방을 뒤진 겁니까?"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주교님에 대해 뭐든지 알아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가방을 뒤져서, 다른 영주들에게 받은 뇌물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내 뒷조사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뇌물 청탁 여부가 아니라 무엇을 받았는지 알아내라고 시켰다니. 세라투 자작의 의도를 모르겠다.

'남들이 내게 준 것보다 비싸고 좋은 물건을 선물할 생각이었나?'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대신,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귀족의 생각은 귀족이 잘 알겠지.

"주교님께서 지니고 계신 고가의 물품을 알아낸 뒤. 거쳐온 영지의 영주들이 구매한 물건들을 조사한다면, 누가 어떤 물건을 선물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더불어 주교님께서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 또한 자연히 갖춰질 겁니다."

"다짜고짜 뇌물을 받았냐고 찔러보는 것보다, 어느 영주에게 어떤 물건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

"영주들은 어디까지나 주교님의 훌륭하신 인품에 반해, 존경의 의미로 선물을 드렸을 뿐이지만···. 세라투 자작은 그것을 뇌물로 둔갑시켜, 주교님을 협박하려 한 겁니다."

세르펜스가 싸늘하게 눈동자를 빛냈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말아 쥐며, '정말 비겁한 자입니다.'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분노한 듯한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받았던 뇌물들이 정말 선물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인젤 주교의 꼰대 설정 덕분이다.

훌륭한 인품이란 부분에서 이미 틀려먹었다. 그렇기에 내가 영주들에게 받은 물건은 뇌물이 확실하다.

'이 녀석···, 아부가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정신 못 차리고 휘둘리다 보면, 온갖 비리를 다 저지르게 될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제국의 차기 황제가 휴마누스라서 다행이다.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에게 아부를 떨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선물의 보상을 하지 않은 주교님을 비난하며, 영주들을 부추겨 주교님께 위해를 가하도록···."

아직 얘기가 안 끝났나 보다. 어차피 세라투 자작은 죽었는데, 너무 열을 올리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세르펜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제 그만 설명해도 된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세르펜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제 가방을 뒤진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막내 신관님의 가방은 왜 뒤진 거죠?"

"거리낄만한 물건이 있다면, 자신의 가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방에 넣어 뒀을 것 같아서···."

내 질문에 젤리 도둑이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어째 '그런데 그 물건이 젤리인 줄은 몰랐다.'라는 내용이 이어질 것만 같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

"그래서 뭘 좀 찾았습니까?"

"어, 없었습니다!"

"여기 이단 심문관님 계신 거 안 보여요? 거짓말하시면 '예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지스를 가리키자, 유지스는 당황하며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예끼!' 하고 말했다.

진짜 따라 하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건만.

하지만 놀랍게도 그게 효과가 있긴 있었는지, 젤리 도둑이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값비싼 와인과 보석이 잔뜩 박힌 만년필, 마법 스크롤, 다이아몬드 목걸이. 그리고 깃펜 세트를···, 주교님 가방에서 보긴 봤는데···."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도 물어볼 테니까, 지금처럼 솔직하게 증언하시면 됩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교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저를 이단으로 몰고 간다거나···."

"대체 저를 뭐로 보고! 그거야말로 모함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젤리 도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얘기만 하면, 증언을 조작했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이 정도가 딱 좋다.

애초에 내가 가지려고 받은 뇌물도 아니고.

그렇게 속으로 만족하고 있는데, 르웰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다시 물어본다는 건 무슨 얘기인가요?"

"르웰 님이야 세라투 자작을 고발하고 교단의 일에 협조했으니 상관없지만, 자작 부인과 둘째님은 그게 아니잖아요?"

부채를 쥔 르웰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항상 첫째만 안쓰럽게 여기는 어머니가 야속할 만도 하건만. 더군다나 클로반은 그냥 개차반 같은 오빠였을 텐데.

그런데도 그들이 걱정되었나 보다.

"무고한 사람을 이단으로 잡아들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죄인을 못 본 체해주었다는 오해를 사긴 싫으니 어쩌겠습니까? 남들 앞에서 추측이 아닌, 제대로 된 진실을 밝혀야죠. 세라투 자작은 악마 숭배자와 접촉하지 못했고, 첫째는 마인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아···."

"마침 성검의 주인과 그 일행분들도 인근에 와 계신다니, 그분들을 모셔놓고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

"에헤이! 배려라니,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누굴 배려해서 범죄자를 감싸주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첫째도 살인죄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나는 르웰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말했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르웰은 더 이상 감사를 표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건 그렇고. 성검의 주인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그동안 저자들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들은 저희 가문에 고용된 사람이에요. 그러니 맡아 둔다기보다는 대기시켜 둔다고 표현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아차! 그도 그렇네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는 이해했어요. 가문의 기사들을 붙여서 책임지고 '보호'하면 되는 거죠?"

정치가 유망주답게, 르웰은 '아' 다르고 '어' 다른 표현을 골라서 사용했다.

발꾼이들과 젤리 도둑을 수하로 삼을 생각인가 보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고, 성격이 좀 가벼워 보이긴 하지만. 충성심 하나는 봐줄 만하니까.

"보호? 아! 그렇겠네요. 첫째의 명령을 듣고 움직이던 놈이 시종장만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렇죠."

"그리고 시종장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첫째를 한 번 떠봐야겠습니다."

이제 윈스톤 앞으로 두 번째 편지가 도착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혹시 누가 아는가? 악숭이들이 계획을 살짝 고쳐서, 다른 성직자들에게 써먹으려 할지.

무산된 계획이라 할지라도 그 수법을 파악해서 교단에 전달해 놓아야 안심이 될 것 같다.

[성검의 주인]에서 룩스메아 교단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져서 종파가 나뉜 걸 생각하면, '에인젤 주교' 같은 놈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니까.

"기왕 떠보시는 김에 시종장 말고도 큰 오라버니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어? 르웰 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

"네. 슬슬 어머니와 작은 오라버니께서 깨어나실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눈 뜨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실 텐데···. 저 말고도 설명해 줄 입은 많지만, 아무래도 가족인 제게 듣는 편이 충격이 덜하지 않겠어요?"

르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는 사람은 충격이 덜 할지 몰라도, 설명해야 하는 르웰에겐 고역일 텐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릴 수 없었다.

"저···."

철컥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베일의 목소리가 응접실 안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베일은 르웰을 붙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은 상태였다. 그래 봤자 거리가 있어서, 허공을 쥐었을 뿐이지만.

어쨌거나 르웰을 불러세우는 것은 성공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둘째 공자님은 흥분하면 폭력적으로 돌변하시는 것 같던데···.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차하면 기사들을 부르면 되니까, 괜찮아요."

"······."

르웰은 괜찮다고 말하며 또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베일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르웰은 부채를 양손으로 쥔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무언가 갈등하는 듯한 모습이다.

"안 괜찮다고 말하면 같이 가 주실 건가요?"

아랫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윗사람이 될 베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르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일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자기를 보내 달라는 뜻이다.

"어차피 르웰 님은 현재 교단의 보호 대상이니까, 원하시면 작은 성기사님을 데려가셔도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문 휘하의 기사들 앞에서 자주 거론해서 좋을 얘기는 아니라서, 조금 망설여졌거든요."

르웰이 굳이 묻지도 않은 얘기를 덧붙여 대답했다.

아직 응접실에 있는 발꾼이들과 젤리 도둑을 의식해서 한 말이다.

항상 남의 눈을 신경 쓰며 변명을 입에 달고 사는 누군가 덕분에,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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