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12화 (512/925)

512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40)

그게 왜 휴마누스의 잘못이냐고 따지려는 순간.

휴마누스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동자만 굴려서 흘깃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비록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고, 휴마누스의 시선은 다시 식탁 위로 돌아왔지만.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 나타난 마수들도 날짐승이나 곤충처럼 비행 가능한 종류였죠? 철로를 끊어 먹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인의 근거지에 돌입했을 때, 지하실에서 들짐승 형태의 마물과 흑마법사. 그리고 마인 휘하의 병사가 나타나, 저희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마인이 비행형 마물들을 불러들여 도망가게 된 거죠. 마인의 도주를 막아보려고 최대한 노력하긴 했는데, 몰려든 마물들의 수가 많기도 하고···."

내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휴마누스가 아닌 리에나였다.

휴마누스는 머뭇거리다가 말할 기회를 놓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당황해할 이유가 없는 얘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거로 보아, 리에나가 자신을 위해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한다.

"무슨 그런 얘기까지 하고 그래?"

"그냥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씀드린 거예요."

"으응, 그래···."

휴마누스가 머쓱하다는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리에나는 그런 휴마누스를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세르펜스는 비행형 악마를 잡았는데, 자신은 마물에 올라탄 마인조차 놓쳐 버렸으니.'

마인이 비행형 마물을 타고 도망갔다는 말을 해 봤자, 변명일 뿐이라고 여길 만도 하다.

저러다 빨리 성장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그의 발목을 붙잡을까 걱정이다.

'그냥 교육 과정의 차이일 뿐인데···.'

세르펜스가 비행형 마물을 상대할 때. 화살이나 주변의 마물을 발판삼아 공중전을 벌일 수 있었던 건, 그가 별의별 훈련을 다 받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암살자보다 더욱 은밀하고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었기에, 그런 묘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거다.

반면에 휴마누스는 그와 비슷한 것조차 배운 적이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 어느 누가 황태자에게 잠입이나 암살 기술을 가르치겠는가.

"아무튼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하늘로 도망간 마인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나타난 마물이 여럿이라서. 어떤 마물에 마인이 올라탔는지 확인하랴, 사람들을 지키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 거잖아요? 진짜 잘하셨는데, 성검의 주인께서는 왜 이렇게 시무룩해 하실까?"

"맞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내가 신발 옆면으로 세르펜스의 발을 툭 치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한 번 어두워진 휴마누스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도망간 마인이 어디선가 사람들을 또 해치게 될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그런 것뿐이니, 굳이 위로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휴마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과는 다르게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애써 괜찮은 척 구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르웰이 그런 휴마누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입을 열었다.

"현 성검의 주인이신 휴마누스 황태자 전하와 제국의 프라시더스 공작을 비교하는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세르펜스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우네. 혹여라도 그에 관해 안 좋은 소리를 한다면, 자네가 타국의 귀족이라 하더라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걸세."

세르펜스를 거론하는 르웰의 말에, 휴마누스가 언제 기죽은 표정을 했느냐는 듯. 눈을 사납게 뜨며 자못 근엄하게 말했다.

시온의 몸에 빙의하여 그를 본 이래, 가장 황태자다운 모습이다.

모두의 시선이 휴마누스와 르웰에게 쏠린 틈을 타, 나는 세르펜스의 표정을 살폈다.

세르펜스도 휴마누스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봤는지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럴 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반응을 하긴 뭘 해?'

나는 '신관 프레이'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시선을 보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르웰을 바라보았다.

휴마누스의 으름장에도 르웰은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한 자태를 뽐냈다.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었어요. 소문에 시달리다 보면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마인을 쫓는 데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전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안전에 신경 써 주셨잖아요. 어찌 생각하면 전하와는 관계없는 타국의 백성들인데도요. 그 점에 다시금 감사를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르웰이 계속 떳떳할 수 있었던 건, 휴마누스나 세르펜스를 깎아내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가 보다.

오해한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휴마누스가 굳혔던 얼굴 근육을 풀고 무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하네."

"괜찮아요. 저야말로 경솔하게 소문을 언급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닐세. 하도 그런 얘기를 접하다 보니,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그러실 만도 하죠. 가까운 친우와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얘기를 듣고, 그 누가 덤덤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교단에서는 그 소문들의 근원지가 악마 숭배 세력이라고 하던데, 그럼 악마 숭배자들이 퍼트린 소문에 사람들이 선동당했다는 얘기잖아요."

르웰이 능란하게 휴마누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자신은 악숭이들이 퍼트린 소문에 휘둘리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필했다.

바스툴 왕국의 사교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몰라도, 이 정도면 이름깨나 날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앞으로 정치계에서의 활약도 기대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악마 숭배자들이 내 부족함을 강조하고 깎아내리기 위해, 세르펜스를 언급한 것은···. 그래. 화가 나긴 하지만, 그들은 적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나는 성검의 주인이니 당연히 견제해야 하고, 세르펜스는 성검이 없어도 그들을 위협할 만한 실력을 갖췄으니까. 다만 내 부족함 탓에 세르펜스의 입장이 곤란해져서, 그에게 미안할 따름일세."

휴마누스가 호소라도 하듯이 속에 쌓아왔던 말들을 술술 쏟아냈다.

남들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사람들이 소문에 관해 떠들어 대는 것을 보아도 모르는 척해야만 했던 탓에.

꾹 참아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 소문에 선동된 사람들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25년의 세월 동안 책임을 전가했으면 됐지, 어째서 자꾸만 그에게 부담을 주려는 건지 모르겠네. 정말 염치도 없지···."

사람들이 소문에 선동당해 세르펜스에게 부담을 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세르펜스에게 가장 부담을 주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휴마누스'라고 답할 것이다.

세르펜스는 다년간의 연기 생활로 익숙해진 덕분에 표정 관리만은 완벽했지만, 테이블 아래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직 접시 위에 음식이 남았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음식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휴마누스가 저런 말을 이다지도 시원시원하게 내뱉을 수 있는 건, 세르펜스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까먹어서는 아닐 거다.

반대로 녀석에게 점수를 따서 절친 자리를 쟁취하고 말겠다는 노림수는 더더욱 아니다.

휴마누스는 그냥, 원래 이런 성격일 뿐이다.

괜히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친근함의 표현을 아끼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기분에 맞춰 주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도 않는.

세르펜스도 그런 휴마누스의 성격을 알고 있을 거다.

그의 말속에 어떠한 계산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더욱 부담스럽고 민망하면서, 미안해졌겠지.

'이대로라면 세르펜스가 제 입으로, 휴마누스를 친구라고 칭하는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은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마냥 온기에 젖어 들기에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성검의 주인께서는 일단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뭣 모르는 사람들이 악마 숭배 세력이 퍼트린 뜬소문에 놀아나며, 친우분을 곤란하게 해서 못마땅한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악마 숭배 세력의 계략일지도 모르잖습니까?"

"맞아요! 휴마누스 님께서 세상에 환멸을 느끼며, 자신들과 싸우길 포기하게끔 하려는 작전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휴마누스 님께서는 소문이나 그것을 떠들어 대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마시고, 그에 관한 건 저희 교단에 맡겨 주세요."

유지스가 자연스럽게 내 말을 이어받았다. 호쾌하게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두드리며 말하는 모습이 매우 믿음직스럽다.

미리 대본을 짜 놓은 것도 아닌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나 정확하게 꿰뚫어 보다니.

어째서 유지스는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는 걸까?

두 명이라면 한 명은 성검 일행에 들어가, 휴마누스의 눈치 없음을 커버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유지스를 성검 일행에 양보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하지만 그쪽은, 그···."

"그 반응은 뭐지요? 저희 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교단이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유지스가 서운하다는 듯 말하자, 휴마누스가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휴마누스가 잠깐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던 건 아마도 유지스를 '이단 심문관 마테리아'가 아닌, '그냥 유지스'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유지스는 현재 세르펜스와 같이 행동하고 있으니까. 그녀에게 일을 맡긴다는 건, 세르펜스도 함께 그 일을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휴마누스는 소문을 잠재우려고, 세르펜스가 나선다는 소린 줄 알고 덜컥했던 걸 테다.

'세르펜스가 소문 때문에 대외 활동도 못 하고 곤란한 상황에 놓인 건 맞긴 한데···. 휴마누스 본인은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곤욕을 치르는 중 아닌가?'

성격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좋은 놈이다.

눈치와 인성을 맞바꾼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적어도 세라투 령에서는 그런 소문이 나오지 않도록, 저도 노력해 볼게요."

르웰이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숭 세력이 퍼트린 소문들이 단순한 모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새삼 깨달은 듯하다.

어쨌거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야~! 이대로 영주 대리님께서 영주님이 되시면 든든~하니,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민망해하느라 한동안 말이 없던 세르펜스가 제 본분을 잊지 않고, 또다시 내 의견에 조건 없는 동의를 표했다.

별로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역시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유지스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안 그래도 아침에 벌어진 참변으로 혼란스러우실 텐데, 마물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도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시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지민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모습에 감동까지 받았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르웰 님께서는 귀족들의 귀감입니다, 귀감! 오죽했으면 제가 르웰 님의 이름을 외웠겠습니까? 바스툴 왕국의 모든 귀족들은 르웰 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유지스와 내가 마구 칭찬해대자,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주변에 대기하던 사용인들의 고개가 살짝씩 끄덕여졌다.

이제 우리가 한 칭찬은 저들의 입을 통해, 영주성 곳곳으로 퍼져 나가겠지.

"감사합니다. 지금의 저는 아직 영주 대리일 뿐이지만, 그 칭찬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영지를 지켜나가 보이겠어요."

르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포부를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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