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41)
* * *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저번에 기도회를 열었던 작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나중에 와전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세라투 자작과 챈들러의 죄목을 명확히 밝히고, 르웰을 제외한 세라투 가문 구성원들의 처우에 관해 얘기해 두기 위함이다.
어디 가서 당당하게 떠벌리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입단속 시키면,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게 될 테니까.
'차라리 소문의 근원지가 되어 원하는 정보를 흘리고, 퍼져 나가는 정보를 지켜보면서 적절히 통제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지.'
사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업무 모드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성검 일행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푹 쉬고 저녁 이후나 내일로 미루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아직 해가 중천인데 자는 건 너무 이르고, 할 일은 끝내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나 뭐라나.
연회장에는 자작 부인과 클로반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자작 부인은 우리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파리한 안색 때문에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인사는 됐으니까, 그냥 앉으세요. 성검의 주인께서도 괜찮죠?"
내가 휴마누스를 돌아보며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 부인은 배려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비틀거린다면 반사적으로 잡아줄 법도 하건만. 클로반은 앉은 자세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 자체를 못 한 것처럼 보였다.
자작 부인이 일어나서 비틀거리다가, 도로 자리에 앉는. 그 모든 동작을 말이다.
클로반의 상태는 식사실에서 기절당하기 직전과 비교하여,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두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불분명했고, 힘없이 벌어진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침이 떨어질 것만 같다.
제 발로 연회장까지 찾아온 게 아니라, 누군가 들어다가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멍하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자작 부인은 그런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클로반의 시선이 잠깐 겹쳐진 손을 향하긴 했으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자작 부인은 그런 작은 반응에도 안도하며, 기도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비어있는 손으로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들 피곤해 보이니까, 빨리빨리 진행하죠."
내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르웰이 증인들을 불러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시녀들이 미리 준비해 둔 허브티를 따라주는 사이, 젤리 도둑과 발꾼이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금방 도착한 거로 보아, 옆 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 우선 젤리 도둑님부터 간단하게 자기소개하시고, 세라투 자작에게 어떤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얘기해 보세요."
"제 이름은···."
"이름은 관심 없으니까 뭐 하는 사람인지만 설명하시면 됩니다."
말이 싹둑 잘려버린 젤리 도둑이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을 밝히면 더 이상 젤리 도둑이라 불리지 않을 줄 알았나 보다. 꿈도 크다.
"저는 주인님···. 그러니까 돌아가신 세라투 자작님의 명을 받아, 정적을 감시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했습니다. 여기 계신 성직자분들이 성에 처음 오셨던 날에도, 그분의 명령을 받고 에인젤 주교님의 행동을 몰래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명령인지는 말씀 안 하십니까?"
"아!"
내 지적에 젤리 도둑이 깜박했다는 듯 탄성을 터트린 후, 작은 단서가 어쩌고 뇌물이 저쩌고. 아까 응접실에서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뇌물이라는 얘기에 성검 일행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렸다.
"뭔가 받기는 했는데, 뇌물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제가 너무 존경스러워서, 업무를 보는 데 보탬이 되길 바란다면서 주는데. 그 성의를 어떻게 거절합니까?"
"만년필이나 마법 스크롤, 깃펜 세트는 그렇다 쳐도, 와인이나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빨리 설명이나 할 것이지, 젤리 도둑이 미심쩍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와인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여, 다음 날 업무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목걸이는···. 그건 그냥 팔면 돈이 되잖습니까? 신전을 짓는 데 보탤 예정이었습니다! 게다가 깃펜 세트는 제가 산 거거든요?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는 그 정도만 하고, 하던 증언이나 마저 하세요."
"아까는 솔직하게 얘기하면 된다고 하셔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누가 지금 그거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
젤리 도둑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를 쳐다보는 성검 일행들. 특히, 리에나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그 뇌물인지 선물인지 하는 물건에 대해, 이따 자세히 설명해 주시길 바라요."
다행히도 리에나는 지금 당장 따지는 대신, 나중에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꼰대 설정을 잡고 윈스톤과 일부러 신경전을 벌였던 것처럼. 내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뇌물을 받은 거라고 믿어주는 걸 테다.
'사용인들은 내가 물욕에 눈이 멀어, 뇌물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지만.'
어차피 베일이 왕이 된 후, 뇌물을 바친 영주들을 벌하면 함정 수사였다는 게 밝혀질 거다.
그렇게 되면 뇌물을 받아먹는 주교가 있다는 소문도 쏙 들어가겠지.
나는 묘한 눈빛을 보내오는 사용인들을 무시하며, 느긋하게 허브티를 한 모금 마셨다.
풋사과 향과 비슷한, 캐모마일 특유의 그윽한 향기가 입안에 감돌았다.
'캐모마일이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하던데. 르웰이 자작 부인을 신경 써서 캐모마일 차를 준비하라고 주문한 거려나?'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젤리 도둑에게 계속 설명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 아무튼. 주교님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우셨고, 저 붉은 머리의 신관님께서는 목욕물을 받으며 가방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이 다 받아진 후. 주교님께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셨고, 붉은 머리의 신관님도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욕실로 따라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그 틈을 타서···."
젤리 도둑의 말이 끊겼다.
왜냐하면 '신관 프레이'가 '에인젤 주교'의 수발을 들기 위해, 욕실까지 따라 들어왔다는 얘기에 놀란 휴마누스가 마시던 차를 뿜었기 때문이다.
사극에서 망나니가 칼날에 물을 뿜어대는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주 호탕하게 말이다.
"무, 무슨 일이죠?!"
르웰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차를 따라 주었던 시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황급하게 찻주전자를 열어 그 안을 살피는 게, 독이라도 들었나 확인하는 듯하다.
"독 없어요, 제가 먼저 마시는 거 다들 보셨잖아요?"
"쿨럭, 그, 그냥···. 크흠! 사레가 들렸을 뿐이네. 다들 신경 쓰지 말게나."
나와 휴마누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르웰이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고, 시녀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십년감수한 시녀가 휴마누스가 뿜어낸 찻물을 닦아내는 동안, 젤리 도둑의 증언은 계속되었다.
그는 가방에서 뇌물들을 발견하고 나서, 원래 있던 자리에 고스란히 놔두었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욕실에서 나와, 세르펜스의 가방을 뒤져 젤리를 훔쳐먹었노라 말하였다.
'젤리를 훔쳐 먹은 건, 침입자'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 탓인지, 나를 바라보는 사용인들과 성검 일행의 시선이 곱지 않다.
거짓말쟁이를 보는 눈빛이다.
"···뒤늦게 욕실에서 나온 붉은 머리의 신관님께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가, 이상함을 느끼셨는지 주교님의 가방까지 여셨습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없던 옷 주름이 생겼다고 트집을 잡으시더니, 젤리가 사라졌다고 하시질 않나. 주교님께서는 젤리를 먹은 게 저라고 뒤집어씌우시질 않나···. 너무 황당하여 저도 모르게 기척을 냈고, 신관님께서 던지신 깃펜에 맞아 부상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증언을 하라고 시켰더니 젤리 도둑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댔다.
세라투 자작에게 사실대로 보고했으나, 도대체 일을 어떻게 했길래 발각당한 거냐며 혼만 났다는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런 젤리 도둑의 증언 같지도 않은 증언에 지루해졌는지, 푸로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교 나리.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합니까?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닌 것 같은데···."
"아주 좋은 질문이랍니다. 그날, 주교님과 프레이 님께서는 누군가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계셨을 거예요. 맞죠?"
별안간 유지스가 나와 세르펜스를 향해 질문했다. 무언가 기가 막힌 설정이 떠오른 게 틀림없다.
나와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여, 유지스가 마음껏 떠들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주교님께서 프레이 님의 딸기 젤리를 드셔 놓고, 시치미 떼신 것도 그런 이유였겠죠."
'딸기 젤리'라는 귀여운 단어를 쓰면서도 유지스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분위기를 잡았다.
그리하여 의미심장하게 귀여운 문장이 완성되었다.
과연 유지스의 신작 발표회는 서막부터 남다르다.
"주교님께서는 그 감시자가 세라투 자작이 붙인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고 계셨어요. 세라투 자작은 주교님을 복종시켜, 제 뜻대로 이용하길 바라면서도, 그 생각을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았거든요."
유지스는 우리가 이곳에 온 첫날.
세라투 자작과 내가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였던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감시자의 배후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했죠. 물증도 없이 의심한다면. 세라투 자작이 가짜를 데려와 거짓 진술을 시키고, 누명을 씌운 거냐며 되레 큰소리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교님께서는 많이 고민하셨을 거예요."
"오오, 맞습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셨대요?"
"제가 누군가요? 이단 심문관, 마테리아 S. 사지타랍니다. 누군가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건, 제 전문이죠."
내가 박수까지 쳐가며 맞장구를 치자, 유지스가 으스대는 체했다.
그러자 사용인들 사이에서 '역시 이단 심문관님은 대단하시구나.'라거나, '이단 심문관님 앞에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네, 다 꿰뚫어 보시니까.'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작 그 이단 심문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아무튼 주교님께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꾀를 내셨어요. 프레이 님께서 즐겨 드시는 젤리를 먹고, 그것을 감시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작전이죠. 단것을 매우 좋아하는 프레이 님이라면, 남은 젤리의 종류와 개수를 파악하고 있을 테니. 통 안에 많고 많은 젤리 중, 하필이면 하나 남은 딸기 젤리를 드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겠죠."
"헉! 대박, 소름! 거기까지 눈치채셨을 줄이야!"
"누군가는 무슨 그런 작전이 다 있느냐며 비웃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작전에 걸려든 당사자를 보세요. 얼마나 억울해하는지! 세라투 자작이 어디서 가짜를 데려왔다면, 저런 생생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장담하건대, 절대 불가능했을 거랍니다."
"이거 이거···. 제가 잘난 척하면서 밝힐 생각이었는데, 한 방 먹었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으쓱였고, 유지스는 '훗!' 하고 웃으며 우쭐거렸다.
르웰은 아까 '딸기 젤리의 진실'을 들어 놓고도, 우리의 대화가 사실인지 긴가민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원래 유지스는 진실보다도 진실 같은 설정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재능이 있었지. 일루미나티의 시작도 그렇고.'
대륙 각지로 불려 다니는 유능한 에인젤 주교가 막내 신관님의 젤리를 탐했다는 얘기보다, 유지스가 지어낸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게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변수가 생겨버렸어요. 세라투 자작이 '감시자는 주교님을 쫓아서 따라온 악마 숭배자다.'라고 주장한 거죠. 자신이 주교님께 감시를 붙였다는 사실을 은폐하면서, 우리 때문에 성안에 침입자. 그것도 악마 숭배자가 들어오게 되었다며 오히려 책임을 물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입니다. 어떻게 그런 수작질을 걸어올 수가 있는지···!"
내가 이마를 짚으며 과장되게 말하자, 옆에 앉은 세르펜스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세르펜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유지스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주교님께서는 여기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상황을 반전시켰어요. 아직 감시자가 성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성안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고자 하셨답니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실에, 나는 씨익 웃으며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라는 걸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하지만 나는 이어진 유지스의 말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라투 자작은 주교님의 도발을 흔쾌히 받아들였죠. 주교님께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도록 시킬 생각으로 말이에요."
이래서야, 세라투 자작과의 머리싸움에서 내가 졌다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