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42)
내가 뻘쭘함을 느끼며 괜스레 헛기침하거나 말거나, 유지스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세라투 자작은 분명 악마 숭배자와의 거래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계획을 준비한 지도 어언 20여 년. 슬슬 지칠 만도 했겠죠. 그래서 이렇게 된 바에, 교단과 완벽한 신뢰 관계라도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닐까 해요. 어차피 악마 숭배 세력과 접촉하지 못했으니."
긴 문장을 막힘없이 술술 늘어놓던 유지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호흡을 들이마시며,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여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유지스는 그렇게 한 명 한 명. 모두와 눈을 맞추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영주성 내부를 조사하게 둬도 거리낄 것은 없다···라고 생각해버린 거죠. 자신의 첫째 아들인 '챈들러 세라투'가 마인 '러스티'와 이미 접촉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마른 침이라도 삼켰나 보다.
다들 알고 있는 얘기인데도 이렇게나 몰입하게 만들다니. 이런 게 바로 화자의 중요성이라는 걸까?
유지스는 구연동화를 시켜도 잘할 것 같다.
'아닌가? 미스터리 스릴러 쪽으로 강제 장르 변경을 시도하려나?'
내가 유지스에게 어울리는 책은 어떤 장르일까, 이것저것 대입해보는 동안에도. 유지스의 날조 섞인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르웰이 우리에게 접근하여, '세라투 자작이 반역을 의중에 두고, 악마의 힘을 빌려 클로반의 신분을 가로채려는 게 아닐까 한다.'라는 추측을 내놓으며 우리에게 도움을 구했다거나.
'가족들은 아버지의 야욕에 희생된 피해자일 뿐'이라며 선처를 부탁했다거나.
식사실에서 르웰이 비슷한 내용을 말하긴 했지만, 당사자가 말하는 것과 제삼자가 옆에서 칭찬해준 건 천지 차이다.
르웰을 바라보는 사용인들의 시선에 선망이 담겼고, 성검 일행의 눈빛에 호감이 어렸다.
심지어 자작 부인은 눈물까지 터트리며,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무리 정치가의 기본 패시브 스킬이 '뻔뻔함'이라고 한들, 르웰은 아직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기 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가 눈물까지 보였는데, 동요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르웰은 난감함과 민망함이 뒤섞인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순순히 감동에 젖어 들기에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유지스도 자작 부인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양심이 찔렸는지, 다음 챕터로 넘어갔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세라투 자작의 부하가 아닌. 그 누구도 파악하지 못한 침입자가 나타나, 경비를 뚫고 탈출에 성공한 뒤 홀연히 사라져 버린 거죠!"
유지스가 긴박한 어조로,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갑자기 커진 목소리 때문에 놀라기라도 한 걸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자작부인이 화등잔 같은 눈으로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울던 어른도 뚝 그치게 하는 훌륭한 완급 조절이다.
"그래요, 이 영주성에는 정말로 악마 숭배 세력에서 보낸 누군가가 숨어 지내고 있었던 거예요."
유지스가 다시 목소리를 내리깔며, 있어 보이게 말했다.
이단 심문관 행색을 하고 악숭 세력을 운운하니,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실처럼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
르웰은 두 번째로 나타난 침입자의 정체가 세르펜스였다는 진실을 들었다.
그것을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최근의 일이었고, 르웰은 유지스를 사기꾼 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성검 일행에게도 가짜 침입자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더군다나 그들은 유지스가 '엘프'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진실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가 이단 심문관 행세를 하며,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모습에 그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지스의 말이 이어지자, 그들은 모두 얼굴을 굳혔다.
"물론 그 침입자를 붙잡지 못했기에, 그자가 악마 숭배자라는 증거는 없지만 정황은 존재해요. 첫째 공자는 세라투 자작에게 정신적으로 속박되어 있었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잃었어요. 그런 사람이 세라투 자작의 윤리에 벗어난 그 무서운 계획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요?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그 계획을 알려 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연인을 가장한 마인 '러스티'뿐이랍니다."
나는 '당연히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유지스의 말을 흘려듣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한 가지 생겨나죠. 과연 악마 숭배 세력은 세라투 자작과 접촉하지 않고도, 그자의 계획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아챌 수 있었을까요?"
문맥상 '두 번째 나타난 침입자는 악마 숭배 세력의 사람이다.'라는 걸 확고히 하고자, 적당히 끼워 맞춘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말을 하는 당사자인 유지스의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했다.
'나와 세르펜스는 [성검의 주인]에 관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타락펜스가 알아낸 정보가 마왕에게 전달되어, 현재의 악숭이들에게 고스란히 흘러 들어간 거려니 생각했지만···.'
그걸 모르는 유지스로서는 의문을 품을 만했다.
유지스뿐만이 아니라, 르웰이나 성검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영주성 안에 악마 숭배 세력이 심어둔 세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중인지, 다들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침입자가 세라투 자작을 감시하며, 제 아들들을 대하는 태도 따위를 주기적으로 보고한 거겠죠. ···아무튼. 그런 와중에 저희가 나타나 성안을 들쑤시고 다니자, 식자재 창고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탈출을 감행하게 된 게 아닐까 해요. 그러다가 조급한 마음에 실수해서,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당하게 된 거겠죠."
유지스가 의문을 접어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실존하지 않는 침입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척했다.
"세라투 자작은 그 침입자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악마 숭배 세력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혹은, 그러길 바랐거나요. 아무튼 악마 숭배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교단에서 온 우리에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버렸으니 굉장히 조급해졌을 거예요. 그래서 가문에서 겉도는 첫째 아들을 미끼 삼아, 성 밖으로 보내고. 저기 계신 두 분을 미행으로 붙였다는 게, 저의 추론이랍니다."
유지스가 서둘러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후드 때문에 표정은 살펴볼 수 없었지만,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공왕이 세라투 자작의 계략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것에 관해 고민하느라 그런 거겠지.
"거기 두 분. 자기소개하고, 증언하세요."
나는 다시 내 본분으로 돌아와, 진행을 맡았다.
내게 지목당한 발꾼이들 중 설명을 맡은 건 윈발꾼이었는데, 장황하게 설명했던 젤리 도둑과는 다르게 핵심만 간략하게 증언했다.
"저희는 돌아가신 세라투 자작님의 명령에 따라, 큰 도련님의 뒤를 밟았습니다. 큰 도련님께서는 곧장 연인의 집으로 향하여, 그곳에서 한참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세라투 자작님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하며, 각오를 마쳤으니 계획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들은 바를 보고하기 위해 성으로 돌아오는 중 습격당했고, 눈을 떠보니 여관이었습니다."
"마인이 이자들을 얌전히 돌려보낸 거로 보아, 세라투 자작에게도 접근해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 같길래, 저희가 중간에 빼돌렸습니다."
느닷없는 납치 엔딩에 사람들이 당황할세라, 나는 얼른 손을 들어 올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다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내 친절한 설명에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요약하자면. 세라투 자작은 혼자서 악마의 힘을 빌려 아들의 신분을 가로채 젊은 왕이 되는 망상을 하며, 20여 년 동안 새빠지게 삽질만 하다가. 결국 악마는커녕 악마 숭배자조차 만나보지 못하고 죽은 겁니다!"
"······."
"이단 심문관님?"
"···아! 그리고 첫째 공자는 자신이 마인에게 속아서, 그자가 유도한 대로 움직인 거라고 실토했답니다. 그때 방문을 열어 놓았으니, 그 내용을 들으신 분이 계실 거예요."
내가 호명하고 나서야, 유지스가 뒷말을 이어받아 상황 정리를 마쳤다.
얘기를 듣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반응이 느린 것으로 보아, 아직도 '공왕이 세라투 자작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이 신경 쓰이나 보다.
세라투 가문 사람들의 처우에 관해서는 이단 심문관 역을 맡은 유지스에게 맡기려 했는데, 그냥 내가 설명하는 게 낫겠다.
"첫째는 마인의 정체를 모른 채 이용당한 거라고는 하나, 직계 존속을 살해한 죄가 무거우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르웰 님이야 세라투 자작의 계략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채시고, 저희에게 고발하고 협조해 주셨으니 문제없고. 나머지 두 분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축하한다고 말하긴 뭣한데, 좌우간 처벌은 피하셨으니 다행입니다. 당분간 교단의 감시를 받긴 해야겠지만."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교님!"
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 자작 부인이 잠긴 목소리로, 자신과 클로반을 용서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는 듯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교황에게 이놈의 거지 같은 연좌제를 폐지하면 안 되느냐고 따지고 싶지만.
'애초에 연좌제가 생긴 이유가, 반역이나 악숭하다가 걸려서 사형당한 놈들의 가족이 국가나 교단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는 일이 잦아서라고 하니···.'
그뿐만이 아니라, 세르펜스의 말에 의하면 반역과 악숭 행위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규칙인데, 다른 세계 출신인 내가 본래 살던 세상의 잣대를 들이밀어 뜯어고쳐도 될지 회의적이다.
더군다나 상황에 따라 지금처럼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하고.
"아 참. 그리고 첫째의 처벌은 영주 대리를 맡으신 르웰 님께서 내리실 수도 있긴 한데···. 어차피 신전으로 이송되어 마인에 관해서 조사를 받긴 해야 하니까, 그냥 교단에서 끝까지 처리하는 게 낫겠죠?"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내 물음에 르웰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일 각오를 다졌지만, 그 아버지로부터 정신적으로 학대를 당해온 자신의 형제를 죽이는 건 힘들었나 보다.
'아니면 자작 부인이 마음에 걸렸다거나.'
자작 부인은 여전히 멍해 보이는 클로반의 손을 꽉 겹쳐 잡은 채 입술을 깨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나는 기왕 인심 쓰는 김에, 더 쓰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둘째님 말인데요. 감시를 받으시는 김에, 아예 인근 영지의 신전에서 잠시 생활하다 오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신성력은 정신적인 충격을 완화해주는 기능도 있거든요. 일시적이고 남발해서 좋을 건 없지만···. 아무래도 영주성에서 지내다 보면 이래저래 떠오르는 일이 많을 것 같기도 하고."
"저,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염치없는 얘기라는 건 알지만, 부탁드립니다."
자작 부인이 간절하게 말했다.
클로반의 상태가 상태이다 보니, 자작 부인이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한 큰 오라버니께서 관심을 못 받아 열등감에 시달리셨다니···. 어쩐지 억울해지는 얘기네요.'라고 말하던, 르웰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르웰은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농담처럼 말하였으나, 그게 농담일 리가 없다.
클로반이 받은 세라투 자작의 관심은 부러울 것 없다지만. 자작 부인이 챈드러에게 베풀던 연민은 르웰도 부러웠던 걸 테다.
내 시선이 르웰을 향하자, 자작 부인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아시잖아요? 저는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라는 걸.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곁에 있어 주지 않으셔도, 저는 괜찮아요."
르웰이 쓰게 웃으며 그리 말하자, 자작 부인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그런 르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