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44)
"아무튼 요지는 성 내부에 악마 숭배자가 있는지 없는지, 너희도 모른다는 거지?"
휴마누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불과 몇 분 전에 나왔으니.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닐 테다.
세르펜스와 유지스의 대화가 본론에서 멀어지니까 상황을 정리하려고 꺼낸 말이겠지.
눈치 빠른 유지스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유지스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앗, 죄송해요. 너무 저희끼리만 떠들었죠?"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쓸데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닌걸."
휴마누스는 유지스를 향해 가볍게 손사래 쳤다. 그러고는 시선을 옮겨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그보다 세르펜스. 그런 얘기는 아까 그 영주 대리나 베일 왕자에게 해 줘야 하는 말 아니야?"
"굳이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영지를. 더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세르펜스의 대답에 휴마누스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기는커녕 어처구니만 잃었다.
바스툴 왕국의 자작령을 다스릴 때도 필요한 인력 구조 조정을 너는 왜 안 했느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생각이 눈빛에 고스란히 담기기라도 했던 걸까?
세르펜스가 곁눈질로 나를 힐끔 바라보고는 '으음···.'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악마 숭배자를 찾아내는 일까지 떠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없다면 다행이지만,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 오늘 밤중에 몰래 순찰하며, 사람들을 관찰해 볼 생각입니다."
어쩐지 세르펜스에게서 망쳐버린 시험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부모님께 잔소리를 들을까 봐, 일찍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뭉그적대는. 딱 그 짝이다.
그래봤자 아직 한낮이라, 밤이 되려면 멀었기에 혼낼 시간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불만스럽긴 해도, 이미 지나간 일로 혼내긴 뭐해서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녀석이 저렇게 기대를 하니, 괜히 따끔하게 혼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의 감시는 제가 아이레에게 부탁해 볼게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기척이나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한 명을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거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 다수를 감시하는 거라면, 세르펜스보다 유지스가 불러낸 바람의 정령이 적임이긴 하다.
'다만, 악마 숭배자가 숨어 있을 확률이 0%라 해도 무방해서 그렇지.'
세르펜스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있을지도 모를'이라던가 '없다면 다행' 같은 표현을 계속해서 써대는 걸 테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스를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유지스는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 표정을 지워냈다. 세르펜스가 성검 일행의 눈치를 보느라, 대외용 미소를 꺼낸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한다.
"나도 뭔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척 봐도 피곤해 보이는 휴마누스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마치 세르펜스에게 허락이라도 구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 휴마누스의 행동에 세르펜스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많이 지치셨을 텐데, 편히 쉬십시오."
"으, 으응···."
"혹시 초조하십니까?"
"응? 아, 아니!"
세르펜스의 물음에 부정하는 휴마누스의 목소리 톤이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았다.
강하다 못해 과하다 싶은 저 부정의 실체는 긍정임이 틀림없다.
휴마누스 본인도 티가 너무 많이 났다고 생각하는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휴마누스는 앞으로 발전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벌써 초조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치고, 휴마누스의 표정에서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말과 표정이 따로 노는 그 모습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하는데···?' 하고 휴마누스의 끝말을 따라하기까지 했다.
대놓고 압박을 주는 세르펜스의 행동에 휴마누스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국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잖아."
아무래도 공왕이 비행형 마물을 타고 도망쳐 버린 게 여러모로 충격이었나 보다.
세상에는 노력해서 되는 것이 있고,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저기다 대고 '노력하면 날 수도 있지!'라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그건 응원이 아닌 비아냥일 뿐이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세르펜스가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를 걱정하는 모습에 마냥 기뻐하기에는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휴마누스였다.
"마인 러스티가 불러들인 건 마물뿐만이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망가진 철로 주변에서, 흑마법과 오러가 사용된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했었죠? 역시 마인의 사병과 흑마법사들이 그 위에 타고 있었던 건가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질문했고, 휴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그런데도 인명 피해가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흑마법사는 두 명뿐이었는데, 마물의 수가 많다 보니···."
휴마누스가 말끝을 흐렸다.
자칫 자신의 동료인 아니마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게 되어 버릴까 봐, 말을 아끼는 게 아닐까 한다.
악숭 세력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위급 흑마법사가 오지 않는 이상. 현재 아니마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니마를 제외한 성검 일행에겐 공중의 적을 상대할 능력이 없다.
제아무리 아니마라 하여도, 혼자서 마물들을 추락시키며 흑마법사들까지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갑자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린 기분이다.
그 문제를 붙들고 낑낑거리고 있는 그때, 유지스가 짝하고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참! 저번에 볼타 산맥에서, 늑대처럼 변한 푸로르 님께서 리에나 님을 등에 태우고 성벽 위로 올라오셨잖아요? 그럼···."
"혹시 제가 커다란 새 같은 거로 변해서, 휴마누스를 태우면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푸로르가 유지스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말하는 뉘앙스와 표정과 행동. 그 모든 것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 푸로르의 모습에 유지스는 어리둥절해 했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는 듯한 표정이다.
"엘프 나리···, 아니, 유지스 님? ···리에나. 엘프에 왕족이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푸로르가 유지스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다가, 호칭 문제에 막혀 리에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성검의 주인]에서는 유지스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제 동료니까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되냐고 말했었는데.
괜히 친한 친구 사이를 갈라놓은 기분이 들었다.
"정 호칭이 신경 쓰이신다면, 그냥 유지스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굳이 존댓말을 쓰실 필요도 없고요."
"오?! 시원시원한 엘프 친구네, 나도 그냥 푸로르라고 불러 줘!"
아무래도 내가 유지스와 푸로르의 사교성을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두 사람은 눈 깜빡할 사이에 친구를 먹었다.
우리 집 아이가 저들의 반만큼이라도 사교적이면 좋으련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르펜스는 유지스가 새 친구를 사귄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녀석은 입을 삐죽 내밀지 않으려고 입술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나중에 대륙이 평화로워지면 세르펜스를 끌고 사교계 파티라도 참석해야 하나 싶다.
사교성 향상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 같긴 한데, 맛있는 디저트 정도는 잔뜩 먹고 돌아올 수 있겠지.
"아까는 유지스에게 뭐라고 하려던 게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물들이 병사들을 태우고 나는 것처럼, 내가 휴마누스를 태우고 나는 건 불가능해. 부분적으로 팔만 날개로 바꾸어 봤자 내 한 몸 띄우기조차 어렵고. 그렇다고 완전히 모습을 바꾸자니···. 여기가 완전히 회까닥 해버리거든."
푸로르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 부분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콧등을 찡그리며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는 푸로르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인 적 앞에서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는 짐승처럼 보였다.
[성검의 주인]을 통해 읽은 바에 의하면, 어렸을 적에 드루이드의 힘을 극도로 끌어올렸다가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했던가.
그렇게 몸도 정신도 완전히 짐승이 되어버린 푸로르는 늑대 무리에 섞여,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고 생고기를 뜯으며 지내길 한 달.
그녀의 아버지가 용병단원들을 총동원하여 주변의 늑대란 늑대는 모두 생포하고, 푸로르와 마찬가지로 드루이드의 힘을 계승한 어머니가 나선 끝에.
푸로르는 겨우겨우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때의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서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했지.'
더군다나 이제는 그녀를 사람으로 되돌려 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없다.
푸로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드루이드의 힘을 쓸 때면 반드시 '인간적인 부분'을 남겨두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변신한 모습은 항상 반인반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푸로르가 그 규칙을 깬 건, 마왕의 힘을 흡수한 잿빛 머리칼의 세르펜스와 싸우는 최종 결전에 이르러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보다 눈앞의 동료가 다치는 것이 더욱더 두려웠기에, 푸로르는 자신의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잠시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동료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전투에 임하던 장면은 진짜 감동이었는데···.'
갑자기 세르펜스가 전해준 솔레르티아의 말이 떠올랐다.
[성검의 주인]은 '해피 엔딩'으로 각색된 거라던 얘기가, 그 어느 때보다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유지스가 괜한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으로 귀 모양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기다란 엘프 특유의 귀가 축 처졌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쳐다본 유지스의 귀가 움찔거렸다. 마법이 귀를 움직이는 근육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나 보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랑 푸로르가 같이 하늘로 올라가면, 리에나와 아니마를 지켜줄 사람이 없잖아."
"앗! 그 점을 깜박했어요. 일행이 네 명뿐이니까, 전열에 더 신경을 써야겠네요."
눈치 없는 휴마누스가 괜한 얘기를 꺼내서 유지스가 더욱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얘기를 꺼낸 수준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그때 푸로르가 팔짱을 끼고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공중의 적을 상대하는 것도 상대하는 건데, 묘하게 균형이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뭔가 부족해."
"그러게요. 푸로르와 휴마누스는 근거리에서 적을 상대하는 타입이고, 반면에 리에나 님과 아니마 님은 근거리 전투에 취약하시니···."
유지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분석하듯 말했고, 푸로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투 중에는 주로 휴마누스가 전면에 나서고, 나는 뒤쪽에서 일행들을 보호하고 있긴 하거든? 그런데 가끔 싸우다 흥분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앞으로 뛰쳐나가거나 할 때가 있어서···. 고쳐야 하는 버릇이라는 건 알지만, 누군가 한 명 정도는 내 뒤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해."
"그것도 그렇겠네요. 가끔은 적들 사이로 파고드는 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 근거리 대응도 가능하면서, 중장거리 공격으로 전열(前列)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푸로르의 한숨 섞인 푸념에, 유지스도 안타깝다는 듯 말을 얹었다.
그냥 자기소개였다.
"맞아, 내가 바라던 게 딱 그런 사람이야! 정말로 그런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
바라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건만.
푸로르는 몹시 애석하다는 듯 탄식했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돌려 휴마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동료 모집 같은 거 안 해?"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우리와 호흡도 맞아야 하고, 악마 숭배 세력과 싸우려면 실력도 좋아야 하고. 무엇보다 원하지도 않는 힘든 싸움에 멋대로 끌어들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의 의지도 중요하고···."
"내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는데?"
푸로르를 설득하려던 휴마누스의 말이 엉뚱하게도 아니마의 심기를 건드려 버렸나 보다.
아니마의 한 마디에 휴마누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며,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입으로는 '어, 그건 그러니까···.'라는 말을 반복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런 휴마누스의 모습에 아니마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됐어, 그냥 해 본 말이야. 이젠 별로 신경 안 써."
"고마워, 아니마!"
아니마는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휴마누스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 잘했지?'라고 묻는 표정으로 에드나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에드나는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아니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째 에드나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아니마가 휴마누스를 이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당사자인 휴마누스는 휴마누스대로 감동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상호 이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