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18화 (518/925)

518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46)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시온을 불러내신 겁니까?"

세르펜스가 여전히 내 등 뒤에 숨은 채로 휴마누스에게 질문했다.

아무리 휴마누스가 부담스러워도 그렇지. 서로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낯을 가린단 말인가.

이런 식이면 10년, 2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못 친해진다.

"그게···."

"잠시만요."

나는 막 입술을 떼는 휴마누스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어 보인 후.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눈치 없기로는 세상 제일가는 휴마누스라 할지라도, 의자를 가져와 앉으라는 제스처 정도는 이해하겠지.

휴마누스는 의자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돌렸고, 나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침대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뒤에 있던 세르펜스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녀석은 나처럼 다리를 포갰다가 자세가 영 불편했는지, 결국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로 신발까지 챙겨 신었다.

그 사이 의자를 가져온 휴마누스가 자리에 앉으며,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 나만 따돌려지는 느낌인데?"

"세 명이 나란히 일자로 앉아서 대화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그건 그래."

내 완벽한 논리에 설득된 휴마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고작 앉은 자리 가지고 서운해할 줄이야. 보좌관에게 휘둘리는 공작과 잘 어울리는 소심 콤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두 사람이 다스릴 미래의 제국은 어떤 모습일지 심히 걱정된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요, 그냥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당당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갑자기?"

"그보다 빨리 하려던 얘기나 하세요."

"어, 응."

내 재촉에 휴마누스가 덜떨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르펜스는 얼굴을 너무 잘 써먹어서 문제던데, 휴마누스는 얼굴을 너무 막 쓰는 것 같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을 왜 저따위로 쓰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부럽지만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떠올릴 즈음. 휴마누스는 맹하게 풀렸던 얼굴 근육을 추스르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온은 내가 저번에 꿨던 '꿈'의 뒷내용을 전부 알고 있는 거지?"

"전부까지는 아니고 대략적으로는···, 아마도?"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내 어중간한 대답에 휴마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해서 찡그린 건 아니고, 내 말뜻을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리느라 그런 걸 테다.

예전이라면 자신 있게 '휴마누스에게 벌어진 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으려나?

한때는 '[성검의 주인]에 생략된 내용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라고 믿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고증이 엉망인 데다가, 각색까지 있었다는 얘길 듣고 났더니. 지금은 그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

"일단 뭐가 궁금한 건지, 그것부터 얘기해 보세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드릴 테니."

"아! '그런 부류'구나, 이해했어."

휴마누스가 찌푸렸던 미간을 활짝 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휴마누스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했다.

착각이었지만, 정정하자면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고, 그러자니 매우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때의 '나'는 비행 가능한 마물이나 악마들과 싸울 때, 어떤 식으로 대처했어?"

이제야 휴마누스가 본론을 말했다. 공략집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이래저래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대신, 인증된 방법을 쓰겠다는 얘긴데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

오히려 현명하면 현명했지.

실패가 입증된 건 따라 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게 역사니까.

더군다나 마왕도 회귀 어드밴티지를 가진 채 움직이고 있으니, 휴마누스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꼼수 축에도 못 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휴마누스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다.

"들어 봤자 별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유지스가 없어서?"

휴마누스의 반문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눈치의 존재 여부가 의심스러웠는데. 내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모습을 보니,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떠졌다.

"조금 전에 성검 일행에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잖은가. 그리고 휴마누스는 유지스가 본래는 자신의 일행이 돼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휴마누스의 눈치가 성장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과다?"

내 대답에 세르펜스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내가 휴마누스를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라도 할까 봐.

놀라워할 일이 아니라고 선수 친 게 틀림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휴마누스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눈치를 키우든가 해야지···.'라고 중얼거렸다.

세르펜스의 말뜻을 '휴마누스의 눈치가 성장할 날은 평생 가도 오지 않는다.' 정도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한다.

이번에도 휴마누스 혼자 착각한 거지만, 열심히 노력하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가 오해하게 내버려 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눈치 얘기는 이제 됐고. 이번에 휴마누스는 어떤 식으로 싸웠는데요?"

"나보다는 아니마가 주로 활약했지. 마법으로 마물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고, 간간이 공격 마법으로 추락을 유도하면서 말이야. 나는 마물이 공격하려고 지상에 다가왔을 때 반격하거나, 추락한 마물과 그 위에 타고 있던 병사의 숨통을 끊었을 뿐이지. 그리고 푸로르는 아니마와 리에나를 지켰고, 리에나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결계를 펼쳤어."

아니마가 화려한 공격 마법으로 적의 정신을 쏙 빼놓은 사이, 유지스가 날개나 약점을 노리고 화살을 날렸다는 내용이 빠졌을 뿐.

[성검의 주인]에서 성검 일행이 쓴 대처법과 얼추 비슷했다.

'역시 아니마가 유지스 몫까지 해야 하는 건가?'

아니마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 후에도, 그녀 혼자 공중의 적을 전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적도 강해졌으니까.

그리고 [성검의 주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적. 공왕이 조종하는 마물과 그 위에 올라타서 싸우는 병사들까지 나타났다.

일반 병사보다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더 강한 건 기본 상식이다.

하물며 평범한 말도 아닌 마물을 타고 있으니, 그 위험성은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거기다가 공왕의 병사는 말이 좋아서 병사지, 무력으로만 따지면 기사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마의 각성 이벤트가 사라졌다는 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에드나를 구해낸 건 절대 후회하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아니마가 마법 수련을 꺼린다는 게 문제였으니, 잘만 구슬리면 얼추 해결될 것 같기도 하고.

"나름대로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잘못됐어?"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끙끙대며 고민에 빠져 있으니, 휴마누스가 소심한 질문을 해 왔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휴마누스는 수도 없이 원망을 받고, 실패를 경험하고, 좌절을 맛보았다.

그래도 그때의 휴마누스는 지금처럼 대놓고 소심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일행의 리더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 애쓰며, 밤늦게 홀로 검을 휘두르며 불안감을 떨치고자 노력했다.

'그래봤자 일행들은 다 눈치챘지만.'

아무튼 그랬던 휴마누스가 지금 이렇게 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건.

내가 '신의 사자'니까. 그리고 아직 무력적인 측면에서는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보다 앞서 있으니까.

그래서 현재 휴마누스가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아니요, 제가 알고 있는 방법과 비슷하게 잘하고 있어요. 시기상 아니마에게 마법으로 몸을 띄워달라고 부탁한다거나, 발판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거나 하며 뻘짓 좀 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맞는 방법을 빨리 찾았네요?"

"저번에 세르펜스가 악마와 싸우는 걸 보고 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습해 보긴 했는데···. 도저히 세르펜스처럼은 못 할 것 같더라."

시행착오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닌가 보다.

휴마누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존경심마저 담겨있는 그 눈빛에 세르펜스가 내 뒤에 숨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림도 없다.

'얘는 고양잇과 주제에 왜 이렇게 쥐구멍을 좋아하는 거야?'

하지만 고양잇과 동물은 꽉 끼는 좁은 박스에 들어가 있을 때 안정을 느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종족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닙니다. 그날 제가 악마를 쉽게 처치한 것처럼 보였던 건, 운이 따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악마가 방심하지 않았거나 전투가 길어졌다면. 혹은 악마가 조금이라도 더 강했더라면. 저는 필패했을 겁니다."

몸을 숨길 곳을 찾지 못한 세르펜스가 오늘도 '아닙니다.'로 시작되는 말을 입에 담았다.

휴마누스를 위로해 주는 것도 좋지만, 그러자고 세르펜스가 자신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애당초 세르펜스가 자신을 낮춘다고 휴마누스가 좋아할 리도 없고.

그런 데서 위안을 얻는 건 편협한 사람뿐이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연기로 적의 방심을 유도하고 암기를 던진 것도 다 세르펜스의 능력이니까."

"그래! 다 세르펜스가 잘나서···. 그런데 방금 뭘 던졌다고?"

휴마누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구경만 한 건 나뿐이고, 다들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니.

덕분에 나 말고 세르펜스가 암기를 던졌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었나 보다.

"네, 사실은 정정당당한 전투가 아니었습···."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대단하잖아! 세르펜스는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예···?"

휴마누스가 만능펜스의 대단함을 알아채고 감탄하자, 세르펜스가 당황하며 나를 쳐다봤다.

얘는 당황하면 꼭 나부터 찾더라.

나는 세르펜스의 눈빛을 무시하며, 세르펜스는 못 다루는 무기가 없다며 자랑했다.

"심지어 얘는 무기 없이도 잘 싸워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자문회의 전설적인 최후의 1인이잖아? 그 싸움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했는데···."

휴마누스가 매우 아쉬워하며 말했다.

비록 그가 자문회에 참석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지만, 황궁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떻게든 귀에 들어가긴 했나 보다.

"저는 비슷한 장면을 보긴 봤습니다. 그것도 불과 얼마 전에요. 붉은 머리칼과 하얀 신관복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숭이들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죠."

"흠, 흠! 지금 그런 얘기를 하자고 모인 게 아니잖은가."

"또 또 쑥스러워한다!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냥 받아들이면 어디 덧납니까? 세르펜스쯤 되면, '난 너무 대단해! 멋져! 최고야!'라고 떠들고 다녀도 다들 인정할 겁니다."

내가 호들갑 떨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입을 꾹 다물고 새침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누가 보면 내가 녀석을 놀리기라도 한 줄 알겠다. 나는 그저 칭찬했을 뿐인데 말이다.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본론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만하고 다시 진지한 얘기를 해야겠다.

"휴마누스는 자기 몫을 충분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무엇무엇을 했을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자신의 업적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아무리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와 오래 알고 지냈다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폄하하는 것까지 닮아갈 필요는 없잖습니까?"

휴마누스도 본인이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던 걸까?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어···.' 하는 소리를 흘렸다.

"뭔가, 너무 갑작스러운데?"

"익숙해지면 적응이 될 겁니다."

"익숙해지는 거랑 적응하는 거랑, 같은 말 아니야?

"맞습니다. 그냥 휴마누스가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어색하게 대할 땐 언제고, 갑자기 휴마누스와 세르펜스가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찌나 죽이 척척 맞는지, 십년지기 친구라도 되는 줄 알았다. 실제로 알고 지낸 세월은 18년이지만.

내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대화를 끝마친 휴마누스가 나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짚어줘서 고마워. 내가 자신감을 많이 잃긴 했나 봐. 이젠 정신 차려야지. 하하하!"

"휴마누스라면 알아서 잘하겠지만, 너무 힘들면 동료들에게도 의지하고 그러세요. 아니면 저나 세르펜스에게 상담해 달라고 하던가.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고마워, 시온. 그리고 세르펜스도."

휴마누스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어 세르펜스를 바라보며, 그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크게 들썩였다.

"저,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한 게 없긴. 세르펜스는 그냥 같은 편이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믿음직한 친구야. ···이젠 진짜 친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그렇게 하십시오."

세르펜스어 전문가인 내 해석에 따르자면, 세르펜스는 분명 '그래도 된다.'라고 말했다.

즉, 휴마누스를 친구로 받아들인 거다.

그러나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어 입문자 코스에 발조차 딛지 못했다. 당연히 이해했을 리가 만무했다.

마지못해 하며, '그러든가 말든가 네 맘대로 해라. 지난 10여 년간 그렇게 살지 않았나?'라고 비꼬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싫으면 억지로 받아들이진 말고. 내가 좀 더 기다리면 되니까."

휴마누스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윈스톤과 비교할 바는 아니나, 덩치깨나 있는 성인 남자가 저러고 있으니 딱해 보이긴 했다.

"눈치 주는 건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마. 그동안 내가 세르펜스에게 잘못한 게 많긴 하지. 사실 지금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아···닙니다. 휴마누스는··· 으음···."

"응? 뭐라고?"

"그러니까 휴마누스는···. 제 친구가 맞···. 습니다."

기어코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입에서 친구가 맞다는 말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세르펜스는 패배자처럼 고개를 푹 숙였고, 휴마누스는 활짝 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세르펜스가 업보를 치른 게 아닐까 한다.

허구한 날 교묘한 말로 상대방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더니 꼴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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