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24화 (524/925)

524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3)

'이런 인재가 [성검의 주인]에서는 그냥 묻혔단 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르웰은 베일에게 꼭 필요한 인재다.

베일은 정의롭긴 하지만 지나치게 고지식한 면이 없잖아 있다. 반면에 르웰은 베일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졌으면서, 적당히 영악한 구석도 있다.

게다가 가족들 사이에서 겉돌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두 사람은 서로 동병상련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로 르웰과 베일을 바라보는 그때.

르웰이 돌연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축하연을 열기에 앞서.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어제 이단 심문관님께서 그러셨지요? 누군가가 아버지께서 제 오라버니들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보고, 그것을 악마 숭배 세력에 보고했다고 말입니다. 하나 외부에서 온 침입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는 결국 성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악마 숭배 세력에 정보를 흘렸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건만. 별거 아닌 얘기였다.

나는 느긋하게 긴장을 풀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악마 숭배 세력은 가뜩이나 인력이 없어서, 교단의 성직자한테도 스카우트를 권하는 집단입니다. 그런 곳에서 여태껏 사람을 심어 두었을 리가 없잖아요? 원하는 정보를 얻어, 첫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 이후. 정보원을 불러들여 다른 곳으로 보냈을 겁니다."

내가 손을 내저으며 가벼운 투로 얘기했음에도, 르웰의 표정은 되려 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내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낙관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래서 방심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걸 테다.

하지만 나에겐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

밤늦게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온 세르펜스가 '수상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라는 보고를 올렸으니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건 유지스도 마찬가지였다.

'유지스는 혹시 모르니, 지속해서 정령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악숭이가 숨어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이 얘기를 어떻게 르웰에게 전달하느냐다.

예전에는 전대 세라투 자작의 성이었으니, 거리낄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 세라투 영주성의 주인은 엄연히 르웰이었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한 르웰의 사람들이 되었다.

"가주님께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긴 한데···. 사실 어젯밤에 막내 신관님이랑 이단 심문관님께서 성안을 몰래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지켜봤거든요."

"···네?"

"미리 말을 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제 별관에서 저희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결정된 거라서요. 하하하."

나는 일행의 대표인 주교로서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르웰이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멋대로 집을 들쑤시며 사람들을 감시하고 다닌 것에 화를 내는 것도 아니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단념하는 것도 아닌. 의미 불명의 표정이다.

"주교님이시라면 도움을 준 거니까, 감사히 여기라며 큰소리치실 줄 알았는데···. 사과를 하신다니 의외네요. 하긴. 식사 시간에 성기사님을 가만히 세워 두셨던 것도, 실은 베일 저하의 얼굴을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가리기 위함이라 했으니···."

르웰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듣고 나는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이 너무 풀린 나머지, 꼰대 주교의 설정까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이런 초보 같은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일루미나티의 수장으로서, 윈스톤과 에드나 보기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째서 나는 뻔뻔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걸까. 좀 더 안하무인으로 나댔어야 했는데.

이게 전부 내가 너무 예의 바른 사람인 탓이다. 이런 내게 꼰대 설정 같은 건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교단에서 내로라하는 인재인 에인젤 주교님의 인성에 문제가 있을 리가 없는데···. 정말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맞습니다.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교단 제일의 인격자입니다. 신 룩스메아께서 대륙에 내리신 선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스한 분이십니다."

르웰이 에인젤 주교에 대해 재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자신의 설정을 잊지 않고, 맡은 바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아닌가? 어찌 보면 프레이가 신관이라는 설정을 망각한 것 같기도 하고···.'

성직자라면 마땅히 찬양해야 할 룩스메아는 찬양하지 않고, 에인젤 주교만 찬양하고 자빠졌다.

이쯤 되니 악숭이를 상대로 '호로록'을 실험해 보라던, 에드나가 설정을 더 잘 지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가 대단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인데 말해 뭐합니까? 입만 아프게. 막내 신관님은 어른들 대화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가방에서 젤리나 꺼내서 먹고 계세요. 다섯 개까지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젤리로 세르펜스를 입막음한 뒤, 르웰을 바라보았다.

살아온 세월로만 따지면 이곳에서 가장 어린 르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젤리를 꺼내는 세르펜스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엄청난 무력을 지녔다는 저 신관이 나보다 어리다고?' 하는 의문이라도 품은 게 아닐까 한다.

'실제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프레이의 설정 나이도 르웰보다 연상이지만.'

세르펜스의 정체를 아는 성검 일행이나 베일 앞에서, 정신 연령이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주교님께 혼이 나서 슬프지만, 젤리는 맛있네···.'라고 말하는 듯. 새초롬한 표정으로 젤리를 먹는 녀석을 보면, 얘기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결심이 잠시 흔들렸지만, 나는 세르펜스의 명예를 지켜주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그랬는데,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죠, 이단 심문관님?"

"네. 하지만 세라투 가주님. 혹시 모르니 성에 머무르는 동안, 제가 계속 사람들을 감시해도 괜찮을까요?"

유지스가 내 말을 이어받아, 르웰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르웰이 세르펜스 구경을 마쳤다. 그러고는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자세를 고쳐 잡고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요. 나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제게 득이 되는 일인 것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타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체계를 정비해야지 안 되겠습니다."

르웰이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말투로 제 포부를 말했다.

방금까지 젤리 먹는 세르펜스를 구경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하게 말이다.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도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르웰이 세르펜스에게 시선을 뺏긴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흔치 않은 세르펜스의 미모 탓이지.'

내가 새삼스레 세르펜스의 얼굴이 갖는 파급력에 감탄하는 사이.

르웰은 작성이 끝난 서류뭉치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내어, 유지스에게 건넸다.

"그리고 기왕 감시하는 김에, 이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무슨 의심스러운 행동이라도 했나요?"

"그 반대입니다. 여기에 적힌 건, 연회에서 시중을 들도록 할 사용인의 목록입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입이 무거운 자들이나, 사적인 장소에서는 어떠한지 아직 파악하지는 못한 터라···. 제가 어디까지 이들을 신뢰해도 될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상하는 거고, 단물은 확실하게 뽑아 먹겠다는 소리다.

한순간의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

유지스도 그러한 르웰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하며 서류에 적힌 사용인들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살폈다.

마지막으로 연회에 초대할 가문들에 관해 설명을 듣고 난 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바쁜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르웰도 집무실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베일과 함께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말고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는지, 막 연회장을 떠나려는 성검 일행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아, 참! 내일 연설할 때 황태자 전하와 일행분들께서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지키려 했는지 얘기하며,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할 예정입니다."

"공왕을 놓친 것 때문에 사람들이 성검의 주인을 비난할까 걱정되니, 연설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여 좋은 이미지를 심어 두겠다는 뜻입니다."

휴마누스가 알아듣지 못할세라. 나는 잽싸게 르웰의 말을 해석하여 휴마누스에게 전달했다.

르웰은 이런 나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고, 휴마누스는 '정말 유행인가···?' 하고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감사한 일에 감사를 표하는 당연한 일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괜히 생색내는 것 같아서 민망했는지, 르웰이 설풋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르웰이 쉴드 쳐 준다고 비난의 여론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세라투 영지 내에서는 휴마누스를 욕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

"당연히 도움이 되고 말고. 고맙네, 나를 믿어 주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것보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더 값지다는 듯.

휴마누스는 성검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을 믿어주는 그 마음에 감사를 표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 * *

성검 일행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챈들러를 챙겨서 영주성을 떠났다.

우리는 성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해 준 뒤 다시 별관으로 돌아왔다.

유지스는 온종일 정령을 소환하고 있어야 하니, 몸이라도 편히 누워 있어야겠다며 쉬러 갔다.

에드나는 에드나대로 마법 공부를 하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났더니 별관 거실에는 나와 세르펜스, 윈스톤. 이렇게 세 사람만 남았다.

'···이 인원으로 뭘 하라고?'

베일을 따라서 르웰의 업무라도 도와야 하나. 그런 몹쓸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일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야말로 더욱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여유를 만끽해야만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르웰과 베일 몫까지 말이다.

나는 윈스톤도 편하게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커튼을 치고 불을 켜라고 한 뒤.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를 차지한 세르펜스를 쫓아냈다.

세르펜스의 반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눕고 싶어서 그렇다고 하자, 녀석은 마지못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튼을 치고 돌아와, 맞은편 소파에 앉은 윈스톤의 옆에 착석했다.

이제 느긋하게 누워서 숨쉬기 운동으로 칼로리를 태워볼까 마음먹은 찰나.

"저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가 울적하게 말했다.

나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파에 눕자마자 스프링처럼 튕겨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것은 윈스톤도 마찬가지였는지, 투구를 벗다 말고 세르펜스가 앉은 방향으로 고개를 홱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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