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4)
윈스톤이 투구를 완전히 벗은 후, 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쳐다봤을 뿐인데,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주군이 저러는 것이오?' 하고 책임을 물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시 세르펜스를 불러오기로 했다.
"어···, 그냥 제 옆에 앉으실래요?"
"당신 옆에 앉고 싶어서 꺼낸 말이 아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누워라."
내 물음에 반말로 대답하는 거로 보아, 방금 그 말은 역시 '신관 프레이'가 아닌 '세르펜스'로서 한 말이었나 보다.
하기야 프레이는 도도하고 오만한 성격이었으니. 본인이 이기적인 것 같다며 울적하게 말하는 건 설정 오류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안 눕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누워있겠습니까?"
울적한 표정으로 자기혐오가 담긴 말을 하는 사람을 앞에다 두고, 소파에 늘어져 있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를 바라보는 윈스톤의 시선이 마치 '정말 누우시려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소.'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분명 이 또한 내 착각이겠지. 계속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앞으로 윈스톤의 눈빛 분석을 위한 데이터를 착실히 모아야겠다.
"미안하다, 불편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세르펜스가 걱정하지 않아도 저는 늘 편하게 있습니다. 그보다 어째서 자신을 이기적이라 생각하게 된 건지, 그 이유나 말씀해 보세요."
내가 이유를 묻자, 세르펜스는 바로 입을 여는 대신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미적거렸다.
자기가 먼저 대뜸 말을 꺼내긴 했으나 막상 말을 하려니 망설여지나 보다.
나는 세르펜스가 입을 떼길 기다리면서, 최근 녀석이 자신을 이기적이라 판단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찾아내 보라고 한다면···.
'설마···. 자신이 설정 놀이에 심취한 탓에, 중요한 대화를 방해했다고 생각해서 저러나?'
터무니없는 가정이다. 하지만 아까 젤리를 먹던 녀석의 표정이 어두웠던 걸 떠올려 보면,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만약에라도 정말 그런 이유로 이기적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한 거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눈을 부릅뜨자, 세르펜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제 휴마누스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다행히도 내가 생각했던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기에는 이르다.
그도 그러할 것이 휴마누스와 대화를 나눈 이후, 나에게 상담할 시간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으니까.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쉴 땐 내색 하나 없더니.
이제야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세르펜스 혼자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걸 의미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 때문에 힘들어할까 봐, 제 딴에는 배려한다고 혼자 고민한 것 같은데···.'
그 마음은 무척이나 고맙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혼자서 자신을 올바르게 정의 내릴 수 있을 만큼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에 주입된 것을 바탕으로 생각하여, 부정적인 틀 안에 자신을 욱여넣어 버린 걸 테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더욱더 깊은 자기혐오에 빠져들기 전에, 이렇게 말이라도 꺼낸 것에 감사해야 하나···?'
아이가 어른을 걱정하느라, 혼자서 고민을 끌어안는 것만큼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눈에 힘을 풀고, 세르펜스에게 계속 얘기해 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당신이 싫어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대뜸 느낀 점부터 내뱉은 겁니까?"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정말 가르칠 것이 산더미구나 싶다. 그래도 그것이 버겁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세르펜스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지나치게 착한 아이였고, 착한 아이답게 무언가를 알려주면 고치려고 노력하니까.
그래서 버겁다기보다는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저는 방에 올라가 있을 테니, 두 분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십시오."
내가 먹먹함을 느끼고 있는 틈을 타, 윈스톤이 도주를 시도했다.
벗어 놓은 투구를 챙겨 들고 슬그머니 일어나는 윈스톤을 붙잡은 건, 그의 옆에 앉은 세르펜스였다.
윈스톤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붙잡은 세르펜스의 손을 향했다.
충성스러운 기사인 윈스톤은 주군의 손을 냉정히 뿌리칠 수 없었을뿐더러, 무력적인 측면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윈스톤 경."
세르펜스가 윈스톤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굳이 '윈스톤 경'이라는 말을 덧붙인 거로 보아 앉으라는 명령으로 봐도 무방했다.
윈스톤은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쯧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가 뭐하러 윈스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냈겠습니까? 윈스톤의 의견도 듣고 싶다는 뜻인데, 그렇게 자리를 피하시면 안 되죠."
내 말에 윈스톤이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여 내 말을 긍정하며, 윈스톤의 팔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이제 붙잡고 있는 손이 없어졌는데도, 윈스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잔돈이 남았는데 주머니에 넣기 불편해서, 재미 삼아 산 즉석 복권이 1등에 당첨됐을 때의 반응이 저러할까?
횡재했다는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이 더 크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부터 드는. 그런 상태로 보였다.
그동안 세르펜스는 윈스톤 앞에서 울기도 하고, 아이 같은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세르펜스가 일부러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 것뿐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세르펜스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윈스톤이 있는 자리에서 속내를 털어놓은 거다.
그뿐만이 아니라, 윈스톤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이 순간. 윈스톤이 얼마나 감격스러워할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마냥 기뻐하기엔, 세르펜스가 한 말이 걸리지만···.'
바위처럼 굳어 버렸던 윈스톤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윈스톤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내가 한 말이 맞는지, 세르펜스에게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런, 거였습니까···?"
"예. 하지만 경께서 정히 거북하시다면, 억지로 붙잡아 두지는 않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눈을 내리깔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미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서 앉혀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세르펜스의 내숭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으나, 윈스톤은 당황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 아닙니다! 전혀 거북하지 않습니다! 그냥, 너무 놀라서···. 크흠! 죄송합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윈스톤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가며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아차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목소리 톤도 평소대로 돌아왔다.
웬만하면 이 훈훈한 광경을 좀 더 지켜보고 싶지만, 어제 휴마누스와 나눈 대화 중. 그 어떤 말이 세르펜스가 자신을 이기적이라 느끼게 했는지, 궁금해서 못 참겠다.
"그럼 이제 슬슬 얘기해 주실래요? 어째서 세르펜스가 이기적이라는 건지."
"어제 휴마누스가 '지키고 싶은 자들을 남겨두고 떠나며 느끼는 불안감'에 관해 말하였잖은가. 그건 분명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겠지?"
"뭐···, 그렇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마누스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좁게 보면 가족과 약혼자와 현재 함께하는 동료들. 그리고 친구인 세르펜스 정도일 테고.
넓게 보자면 제국. 그보다 더 넓게 보자면 이 세상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건, 휴마누스 뿐만이 아닐 거다. 유지스와 윈스톤 경에게는 가족이, 베네볼렌 씨에게는 보육원의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휴마누스의 동료들에게도 제각기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을 테지."
"여기서 제 언급이 빠진 건, 어제 휴마누스와 대화한 주제가 '실력 있는 인재에게,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대륙을 위해 싸우자고 강요해도 되는 걸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그들을 지킬 무력이 없으니까 제외된 겁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올려 잠시 세르펜스의 말을 끊고, 윈스톤을 향해 변명에 가까운 설명을 했다.
"마저 얘기하세요."
"으음···. 아무튼 다들 그런 불안감을 감내하며 이 머나먼 타지까지 오게 된 것이잖은가.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 불안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
세르펜스가 새삼스럽게 자신의 분리 불안 증세를 자백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지키고 싶은 사람들과 억지로 떨어져서 지내는데, 자신만 지키고 싶은 사람을 데리고 다니니까.
"그래서 자신이 이기적인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분리 불안이 심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것까진 좋은데, 그게 왜 그런 방향으로 튀는 건지.
가슴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는 세르펜스의 탓이 아니다. 그가 이기적인 건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세르펜스의 분리 불안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진 것도, 휴마누스를 비롯한 모두가 그런 불안함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도.
그 모든 건 현재 이 대륙이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만약 악숭이가 없었더라면 세르펜스가 지금처럼 나를 과보호 했을까?
'아니다, 과보호는 했을 것 같아. 내가 벌 받느라 무릎 꿇고 손들고 있으면, 신성력으로 회복시켜 주는 녀석이잖아.'
어쨌든 지금처럼 시종일관 붙어있으려 하지는 않았을 거다.
"세르펜스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 저뿐인 건 아니잖아요? 공작저에서 일하는 이들과 에일리히 님도 지키고 싶은 사람 축에 속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당신만큼은 아니다."
세르펜스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에일리히가 들으면 서운해할 소리를 해댔다. 괜히 미안해지게.
프라시더스 가문에 멀쩡한 어른이 두 눈 뜨고 버젓이 살아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진작 알았더라면 에일리히 몫의 보호자 역할은 남겨뒀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어째서 세르펜스가 항상 저를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가 제 의지로 따라나선 거거든요? 세르펜스가 오늘처럼 어디서 또 이상한 얘기 주워듣고 우울해하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요. 자식이 현장 학습을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부모가 있으면 부모가 극성인 겁니다. 아이가 이기적인 게 아니라."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렇게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줄 알았다."
세르펜스는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무슨 책임을 돌리고 자시고 한단 말인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싫다고 했음에도 세르펜스가 멋대로 보쌈해서 데리고 다니는 줄 알겠다.
"허···, 어이없어."
"당신과 유지스는 항상 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해줘서···. 굉장히 기쁘고, 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객관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대체 얘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항상 긍정적으로 말해주긴 개뿔이. 내가 세르펜스를 혼낸 게 대체 몇 번인데.
객관성이 떨어지는 건, 내가 아닌 세르펜스다.